- 해남 대흥사, 200여 년 만에 서산대제 재현
- 숭유억불 조선도 국가제향으로 구국 공덕 기려
- 순국 의승병은 위령탑비도 없어
- 고교 한국사교과서 6종 중 1종만 義僧將 거명
- 11월 묘향산에서 남북 공동 서산대사 제향 추진
범각 스님.
역사교과서 한 귀퉁이에서나 접했던 그 기억의 편린을 화두로 부여잡은 스님이 있다. 범각(梵覺) 스님. 전남 해남군 두륜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의 주지인 스님은 서산대사 재조명 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특히 조선 정조 때 왕명으로 시작됐다가 구한말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된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자취조차 희미해진 서산대사에 대한 국가적 제향(祭享)의 복원과 의승군(義僧軍) 명예회복을 위해 각계각층에 ‘서산대사 제대로 알기’를 전파하고 있다.
대흥사는 맥이 완전히 끊겼던 서산대사 국가제향을 서산대사 탄신 제492주년을 맞은 지난해 4월 16일 ‘호국(護國) 대성사(大聖師) 서산대제’라는 이름으로 200여 년 만에 재현하는 등 서산대사의 유지(遺志) 계승에 힘을 쏟고 있다.
9월 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인근에서 만난 범각 스님은 “서산대사는 반드시 국가적 차원에서 재조명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님은 1968년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지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84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조계종 사회국장 및 초·재심호계위원을 지냈다. 2008년 대흥사 주지로 임명됐고, 2011년 6월 주지에 재선됐다.
사찰 안에 유교식 사당
서산대사 휴정 진영(眞影).
“2008년 대흥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서산대사 국가제향 복원 노력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매년 대흥사 스님들끼리만 조용히 서산대사 제향을 지내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이던 1978년에 대흥사에 건립된 서산대사 유물관도 세월과 함께 노후해 유물의 도난이나 훼손, 화재 위험성에 심각한 수준으로 노출돼 있더군요. 대흥사가 호국의 상징적 인물인 서산대사의 유의처(遺意處)임을 감안할 때 재건립은 필수 과제였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해 4월 대흥사 성보박물관으로 재개관했고, 이때 대흥사가 소장한 지정·비지정 유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서산대사 제향이 조선 정조가 파견한 예조(禮曹) 관리와 전라도 경양찰방(京陽察訪), 장흥·낙안(순천)·흥양(고흥)·해남·진도 등 인근 5개 고을 수령이 모두 예제관(禮祭官)으로 참여한 대규모 국가제향이었음을 입증하는 정조의 사액시제문(賜額時祭文)을 발견했어요.
또한 정조 18년(1794년)에 서산대사의 공훈을 인정해 왕명으로 서산대사를 기리는 유교식 사당인 표충사(表忠祠)를 해남 대흥사 안에, 수충사(酬忠祠)를 묘향산 보현사 안에 건립하고 국가제향 봉행을 해마다 봄·가을로 정례화할 것을 지시한 ‘정조 친필 서산대사 화상당명(西山大師 畵像堂銘)’ 등 국가제향을 입증하는 많은 문헌을 확인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잊히거나 축소된 호국 의승들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서산대사 국가제향을 복원해 민족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원력(願力·부처에게 빌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마음의 힘)을 세우게 된 겁니다.”
표충사는 대흥사 경내에 있는 사액(賜額)사당이다. 정조 재위 당시 대흥사의 계홍(戒洪), 천묵(天默) 두 스님이 서산대사의 구국 공훈을 기리기 위한 사당 건립 청원을 올렸는데, 그 결과 전라도 및 평안도 관찰사의 검증을 거쳐 왕명으로 국가제향을 위한 사당을 만든 것. 사액사당은 임금이 친필로 편액을 내린 사당을 뜻한다. 불교 사찰 안에 유교식 사당이라니, 특이하다.
▼ 대흥사엔 서산대사의 어떤 유품이 모셔져 있습니까.
“1604년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한 서산대사의 유품이 대사의 뜻에 따라 3년 뒤 대흥사에 모셔졌어요. 1602년 선조가 대사께 당상관 정2품과 증호를 내린 교지와 교지통, 의승대장 황금연가사(義僧大將 黃錦緣袈裟), 옥발(玉鉢, 발우) 및 벽옥발(碧玉鉢) 3좌, 당혜(唐鞋, 신발) 2쌍, 호박 염주 및 단주 등이 모두 선조의 하사품으로 일괄 보물 1357호입니다.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精選四家錄)은 보물 1667호입니다. 서산대사 친필인 정선사가록은 중국의 마조, 백장, 황벽, 희운 조사의 어록을 간추린 것으로, 조선 전기 고승으로선 극히 드문 필적이며 구국 의승장의 필적이라는 면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유품이 있지요.”
선조의 僧軍 지휘 명령
지난해 4월 16일 대흥사에서 열린 ‘호국 대성사 서산대제’.
“승군은 고려 때의 조직 및 훈련체계를 조선조에도 계속 이어왔고, 조선 전기 무기력한 관군을 대신해 남한산성, 수원산성, 동래산성 등 전국 각지에 산성을 축조했어요. 진주성 내 내성사(內城寺, 현 호국사) 같은 사찰에서처럼 군사훈련도 꾸준히 했습니다. 이 때문에 임란을 맞아 서산대사를 의승대장으로 삼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승군은 조선의 실질적 주력군으로 왜군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전과를 올렸어요. 그래서 승려를 ‘8대 천민’으로 전락시키고 도성 출입마저 금지했던 극단적 숭유억불(崇儒抑佛) 시대였음에도 나라와 백성을 구한 서산대사에 대한 제향을 국가적으로 모시면서 구국의 공덕을 기린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서산대사와 무명 의승군들의 호국 공적이 국가적으로 재조명되지 않고 국민에게도 관심 밖인 세태는 정말 납득하기 어렵지요. 서산대사 국가제향은 없던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자는 게 아닙니다. 명백히 실재한 역사적 사실을 복원함으로써 목숨 바쳐 조국을 지켜낸 호국의 얼을 계승 발전시켜 국가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조선 전기엔 ‘태평성대’라고 칭하며 누구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관군도 외적 침입에 무방비 상태였다. 양반, 평민 가릴 것 없이 군역을 면제받기 일쑤였다. ‘선조실록’을 수정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6권 7월 1일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일 만에 한양이 함락될 만큼 관군의 수준은 형편없어 도망가기 바빴다. 신의주로 피난 간 선조는 서산대사를 불러 의승군 총사령관인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 직책에 임명하고 승군을 이끌어 왜군을 물리쳐줄 것을 간곡히 명한다.
이후 서산대사는 사명, 처영, 영규 대사 등 제자들과 함께 전국에서 의승군을 규합하고 왜군을 무찌른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정2품 당상관 직위와 시호를 하사받는다. 서산대사가 열반에 든 몇 년 뒤 선조는 그에게 영의정을 추서한다.
▼ 지난해 대흥사 차원에서 봉행한 서산대제는 어떤 반응을 얻었습니까.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종묘제례) 보유자인 대동종약원에 의뢰해 조선시대 서산대제 제향의례집인 표충사향례홀기(表忠祠享禮笏記), 조선 후기 서산대사 국가제향의 제사 차림도인 대흥사 진설도(陳設圖)를 철저히 고증해 서산대사 국가제향 의례를 원형에 가깝게 재현했습니다. 예조정랑과 전라도 경양찰방, 인근 5개 고을 수령들의 예제관 행렬도 당시 의궤에 치밀하게 맞춰 재현했어요. 전남도민과 해남군민 1500여 명, 서산대사의 호국정신을 알리고자 연 제18회 나라사랑 글쓰기 대회에 참가한 초·중·고 학생 1500여 명이 대흥사 경내를 가득 메웠습니다. 조선 예제관 군사 및 가마 행렬 참가, 조총 의전, 군악대 동원 등 목포 해군 3함대의 적극적 지원도 끌어낼 수 있었고요. 국가제향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보람으로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조선시대 서산대사에 대한 제향은 국가 주도로 치러졌다. 하지만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전국 서원 중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면서 사당인 표충사도 운명을 다했다. 이로 인해 서산대사 국가제향도 함께 폐지됐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맥이 끊겼다.
‘호(護)정권 불교’는 침소봉대
▼ 2011년 4월 서산대사 성역화 사업의 하나로 대하장편소설 ‘서산’(신지견 지음, 연인 M·B)의 출간도 지원했는데요.
“‘서산’은 한마디로 ‘사실적 소설’입니다. 소설은 원래 픽션이지만 ‘서산’은 역사적 사실과 문헌의 근거를 각주로 제시하며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한 거예요. 소설적 재미와 의승군의 호국 역사 복원을 동시에 추구한 거지요. 1부 5권이 완간됐고 2부는 8권까지 출간됐는데, 9, 10권은 내년 말에 나올 예정입니다. 서산대사와 의승군의 공적, 나라사랑 정신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 국가제향을 복원하려면 무엇보다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우선일 텐데, 갈등의 한국 사회에서 과연 쉬운 일일까요.
“서산대사 국가제향은 특정 종교지도자에 대한 제사가 아닙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군권을 부여받아 왜군을 격퇴한 구국 충신열사에 대한 제향입니다. 유교가 국교(國敎)였던 조선시대에도 국가제향으로 예우를 다했는데…. 더욱이 제향 의례도 불교 형식이 아니라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기준에 따른 유교식 제향입니다. 국가제향은 호국과 애민의 정신을 계승해 민족 자존심을 드높이는 장(場)이 돼야 합니다. 일본의 끊임없는 역사왜곡에 맞서, 왜군을 물리친 서산대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추모한다면 국민적 단결을 도모할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봅니다.”
‘국조오례의’의 분류법으로 볼 때 제기와 제찬의 숫자인 변두(?豆)는 조선시대 국가가 행한 제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사(大祀)인 12변12두는 종묘·사직 제사로 임금이 친향한 것이다. 중사(中祀)인 10변10두는 공자의 제향인 석전(釋奠)이 대표적이다. 소사(小祀)인 4변4두는 충신열사에 대한 제향으로 율곡, 퇴계 등 유교 대학자의 제사가 이에 해당한다.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 제향도 4변4두 제사였다. 그런데 대흥사 진설도엔 서산대사 국가제향의 변두가 12변10두로 기록돼 있다. 서산대사 제향이 종묘제사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 위상임을 보여준다.
▼ 서산대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치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종단 내 대다수 스님은 적극 지지하고 있어요. 다만 사회 일각에 의승군 활동이 결과적으로 부패한 이씨 왕조만 되살려준 꼴이 됐다는 시각이 있고, 군사정부 시절의 ‘호국불교=호(護)정권 불교’라는 프레임을 통한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산대사가 임란 때 백성의 처참한 상황을 통탄하며 오로지 그들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에서 승군의 총궐기를 호소해 호국불교가 형성된 겁니다. 이씨 왕조는 왜군을 물리치고 영토를 회복한 ‘덤’으로 유지된 거예요. 서산대사가 임란 후 부귀영화를 누린 게 있습니까. 벼슬도 버리고 묘향산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을 따름입니다. 국가제향도 입적 후 170여 년이 지나서야 이뤄졌어요.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국가 주도의 국가제향 복원과 무명(無名) 의승군에 대한 연구,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을 시작조차 하지 않아 안타까워요. 처음엔 전남과 해남지역에서조차 그 관심이 미미했어요. 그러나 공청회 개최, 지역사회 홍보, 대민 설득, 소설 ‘서산’ 배포, 지역 해군의 참여 등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해가고 있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한 서산대사의 사은사상(四恩思想, 국가·부모·스승·백성의 은혜)의 진정성이 우리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주리라 생각합니다.”
▼ 임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과 서산대사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이순신 장군은 분명 영웅이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관군의 수장이었으니 당연히 국가를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순신 장군의 제향은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의 국가(문화재청) 주관 제향을 비롯해 지방자치단체 등 전국 46개소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집니다.
반면 서산대사 휘하 의승군들은 세속을 버리고 출가한 승려로서 나라로부터 어떠한 녹도 받지 않았습니다. 공식적 책무가 없는데도 월계(越戒)의 비난을 감수하며 전쟁 보급물자까지 자체 조달하면서 일찌감치 꽁무니를 뺀 관군을 대신해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5000여 순국 무명 의승군에 대한 명예회복과 위령탑비 건립 등 제반 추모사업과 서산대사 국가제향 복원이 정부 주도로 이순신 장군의 예우에 준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역사에서 소외된 의승군
▼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6월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서산대제의 국가제향 복원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열었는데, 어떤 논의가 오갔습니까.
“조선시대 전란사에서 의승군의 위상과 역할, 단절된 표충사 서산대사 춘추(春秋)제향의 역사와 의의, 현재적 복원 방향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현행 제도 아래서 서산대제를 국가제향으로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은 가칭 ‘호국 의승군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국가제향을 봉행하고 역사 속에 묻힌 의승군을 추모하는 것이라 결론지었습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대흥사 차원에서 1996년 발족한 (사)서산대사 호국정신 선양회를 비롯해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국회 정각회(회장 정갑윤 의원) 등의 적극적인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불교계는 물론 타 종교계와 각계각층의 추진위원회를 범국가적으로 구성하고 정부와 국회에 대한 청원, 서명운동과 여론 홍보 등 후속작업을 벌일 예정입니다.”
▼ 그렇다 해도 서산대사에 대한 국가적 재조명까지는 걸림돌이 적지 않을 텐데요.
“정부가 역사적 위인들에 대한 연구 및 홍보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교육적 측면에서 볼 때 고등학교 검정 한국사교과서 6종 중 단 1종에서만 겨우 의승장 이름을 거명하는 수준입니다. 엄존했던 역사적 사실을 누락한 겁니다. 이런 현실은 우리 역사교육 및 인식의 퇴보를 불러오고 서산대사 국가제향에 대한 재조명까지 어렵게 만듭니다. 서산대사와 의승군에 대한 연구, 홍보사업도 정부 주도로 이뤄져야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회복해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대흥사 전경. 조선 정조 때 대흥사 안에 건립된 서산대사의 유교식 사당인 표충사(작은 사진).
▼ 종단 차원에선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많은 노력을 해왔어요. 최근의 성과는 8월 18~19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본부장 지홍 스님)와 북한의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위원장 강수린, 이하 조불련)가 중국 선양(瀋陽)에서 개최한 회의에서 11월 19~22일 북한 묘향산 보현사 내 서산대사 사당인 수충사에서 서산대사 제향을 공동으로 봉행하는 데 합의한 것입니다. 이는 서산대사 국가제향의 온전한 복원과 남북한 호국 역사의 전통을 공동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산 지원과 통일부의 승인 절차를 통해 진행될 겁니다. 현재 북한에서도 서산대사 제향은 단절된 상태입니다.”
▼ 묘향산 수충사를 방문한 적이 있나요.
“소설 ‘서산’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수충사에 직접 가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자료 수집 및 현장 방문차 통일부 승인을 얻어 4차례 다녀왔어요. 당시 보현사 주지스님과 조불련 위원장은 제가 서산대사를 모신 대흥사의 주지라고 하니 매우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서산대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어요. 김일성 주석도 서산대사를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존경하고 수충사를 보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관점에선 나름 수충사가 보존됐을지 몰라도 제가 보기엔 문화재 보수를 해야 할 것이 많았어요. 남북 공동 제향이 성사돼 정례화하면 지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현재 의승군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제향이 대흥사의 서산대제, 경남 밀양 표충사의 사명대사 추모대제, 충남 공주 갑사의 영규대사 대제 등 연고가 있는 개별 사찰 단위로 이뤄지고 있는데요.
“사찰별 추모 제향은 해당 지역민과 오래전부터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거행돼 왔기에 앞으로도 존중되고 지속돼야 합니다. 다만 ‘호국 의승군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 서산대사 국가제향, 무명 의승군 위령대제와 더불어 합동 배향을 사찰별 추모제와는 별도로 거행해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정부와 조계종의 종합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사명, 영규 대사 두 분 모두 서산대사의 제자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의병은 있되 의승병은 없다
▼ 일반 의병과 달리 의승군에 대한 국가적 예우가 ‘방치’ 수준이라는 말씀인데….
“전국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시골마을 구석구석까지 의병들의 사당, 위령비, 의병장 생가 등이 훌륭하게 지어져 있어요. 그런데 ‘조헌과 칠백의총’을 예로 들면 그곳 안내문엔 의승병도 함께 순국했다고 기록돼 있어요. 1592년 1만5000명의 왜군을 막아낸 금산성 연곤평 전투인데, 조헌 선생 휘하의 유생 출신 의병 700명뿐 아니라 영규 대사가 이끈 승병 800명도 같이 싸우다 전사했지만, 의병의 역사만 존재하고 승군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칠백의총만 국가에서 제향을 모시고 성역화했지, 의승병을 위한 사당이나 비석은 없습니다. 물론 제사도 모시지 않고요.
임란 때 수락산, 노원평 등의 전투에서 보듯, 일반 의병이 싸우기 꺼린 불리하고 험난한 전투는 무명 의승군이 거의 도맡아 묵묵히 싸워 승리했어요. 의승수군(義僧水軍)도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3차례나 상소를 올려 그들에게 표창을 내리라고 건의할 정도로 열심히 싸웠습니다. 정부가 무명 의승군 역사에 대한 연구, 명예회복 및 위령시설 건립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 서산대사 국가제향 복원 외에 또 다른 계획이 있습니까.
“향후 새롭게 도입할 대한민국 해군 함정의 명명(命名)에 서산, 사명, 처영 대사의 명칭을 부여해달라고 조계종과 군종교구를 통해 국방부에 정식으로 청원할 겁니다. 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해군 장병들을 기리는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바자회에 지난 6월 참석했는데, 해군 3함대사령관이 감사의 표시로 참석자들을 선상 연회에 초대했어요. 해군의 새로운 함정 진수식 때 역사적 영웅의 이름을 붙인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간 진수된 이지스함과 구축함 중에 ‘율곡 이이함’ ‘서애 류성룡함’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유성룡, 이이 같은 분은 임란 당시 전투 경험이 없던 문신(文臣)인데, 용맹한 기상을 뽐내야 할 함정 명칭에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이들의 이름을 붙인 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학자의 이름은 연구사업이나 책 제목에 붙이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반면 그들과 동시대에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고 목숨 걸고 싸운 서산, 사명, 처영 대사 등 호국 의승장들의 이름이 명명 과정에서 후보로조차 거론되지 않는 건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종교적 덕망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군권을 부여받아 구국의 공을 세운 기상을 이어받자는 의미에서 제안하는 겁니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제,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게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절대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신념을 담은 서산대사의 선시 ‘답설야중거’에서 그의 진면목이 엿보인다. 이 시구처럼, 가려진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는 것도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걷는 일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대통령후보이던 지난해 12월 6일 대전 유성관광호텔에서 열린 ‘대한민국 지키기 불교도총연합’ 주최 ‘임진난 금산전투 승군 역사 재조명’ 세미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
‘잊힌 역사 복원도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일로, 행사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