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합당은 정당체제와 그 성격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민정, 민주, 공화 3당이 단일 여당 민자당으로 합당하는 바람에 집권여당의 성격이 복잡해졌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한나라당 내부의 정체성 논란은 여기에 뿌리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호남에 주요 기반을 둔 평민당(국민회의가 계승)이 야당세력으로 단일화된 가운데, 민주화 세력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민자당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은 비호남지역주의였으며, 평민당의 정체성은 민주화세력과 호남지역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또 한나라당으로 재편 확대되는 과정에 민주화세력과 진보 운동권 출신들이 가세하게 되면서 이질적인 요인들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이 이질적인 요소들은 차기 정권장악과 반DJ 및 지역주의 구도라는 정체성으로 봉합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 야당의 중심이던 김대중과 국민회의는 집권세력이 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새로이 조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국민회의는 이런 상황을 반영하겠다면서 민주당으로 재편하였으나, 아직도 새로운 정당으로 변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집권 이후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는 집권여당의 실종과 무기력에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민자당에서 다시 분당해 김대중정부의 출범 과정에 민주당과 연합했던 자민련은 구시대의 논리인 근대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명분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15대 대선 시기에는 정권교체와 지역화합이라는 명분이 민주당과의 연합에서 나타난 이질성을 극복할 수 있었으나, 이후에는 사실상 민주당과 연합하는 구심점이 불분명한 상태다.
정권창출에 기여했다는 것과 지역구도에 따른 캐스팅보트라는 위치가 자민련의 정치적 입지를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자민련은 16대 총선에서 자신들의 지역주의적 기반마저 흔들리게 되면서 국회 교섭단체 정수에도 못 미치는 군소정당으로 왜소화된 상태다.
결국 현재 한국 정당정치는 한편으로 위상 재정립이 요구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변화에 대한 요구를 지역주의 구도로 봉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화에 따른 권위주의 유산 청산, 세계화 추세와 경제 구조조정에 따른 위기 대응 방식, 남북관계의 변화 등을 둘러싸고 한국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북한에 대한 시각이 최근 쟁점
최근 부각되고 있는 이념 논란에서 가장 두드러진 쟁점은 북한에 대한 시각이다. 북한과 사회주의를 둘러싼 견해는 그 동안 한국정치 이념의 핵심 축이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이를 둘러싼 차별성이 우리의 정당정치에 이념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반공 권위주의 체제는 이념의 다양성을 불가능하게 했고 집권세력의 이념만 허용했다. 따라서 반공만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치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이념은 정치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바, 최근 우리의 정치환경 변화는 반공헤게모니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념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환경은 김대중 정부의 출현과 이어진 남북관계의 변화다.
김대중과 민주당 역시 기존 정치세력의 한 분파였다는 점에서 이들의 집권 자체는 새로운 이념적 지평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주요 정치세력 중에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남북관계에 대한 시각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음은 다 아는 바다. 이 때문에 상대 세력에서는 김대중을 ‘빨갱이’ 등으로 음해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김대중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공주의자다. 다만 반북이데올로기와 대북 강경정책에 집중하던 반공주의자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것이다.
집권세력이 국가정책과 노선을 거의 독점해왔던 한국정치 구조에서 여야 관계의 역전은 정치이념 지형에서도 일정한 변화를 초래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집권 민주당이 대북화해 기조를 주도하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이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부와 집권여당은 대북 강경정책을 주도하고 야당이 부분적으로 이를 비판하던 그동안의 경향이 역전된 것이다.
한국 정당구조의 특성상 정당 보스의 노선이 곧 정당의 노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었지만, 민주당의 경우 대북정책을 둘러싼 내부 이견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보안법 폐지 등에 있어서는 당의 노선보다 더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세력도 있었다. 지난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 15명 모두가 국가보안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 중 두 명은 아예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야당 한나라당의 경우 대북관계에 대한 당의 노선은 안보와 북한에 대한 경계를 강조하는, 즉 전통적 집권여당의 노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폐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개정도 반대한다는 것이 당론이라고 이회창 총재는 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부 진보운동 계열 출신과 소장파 의원들이 당의 노선과 다르게 집권여당의 대북 화해 노선에 호응하고, 나아가 국가보안법 폐지 등 오히려 집권여당의 당론보다 더 전향적인 의견을 내면서 한나라당의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런 노선이 이념에 기초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현재 한나라당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반DJ노선에 있기 때문에, 현재 DJ정부가 추구하는 대북화해 노선에도 반대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의 경우 15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부터 북한에 대해 적대적 대립관계에 기초한 상호주의를 강조해왔다. 통일방향에 있어서도 공존보다는, 현재 북한의 체제가 존속하느냐 아니면 흡수통일이냐의 문제만 남았다고 15대 대선 후보합동토론회에서 피력한 바 있다. 총재의 당내 대북관계 조언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남북관계 대책특위’에도 이세기, 김용갑, 정형근, 박세환, 윤여준, 송영대, 구본태 등 전체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인물이 주축을 이루고 있고 일부 실용주의 성향의 인물이 참여하고 있다.
자민련도 대북관계에 있어서는 한나라당 주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한체제로의 흡수통일을 함의하는, 자유민주체제로의 통일을 당의 강령에 담고 있다. 다만 보안법에 대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일부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김학원 의원 등에 의해 제기되기도 하나, 보수를 당의 이념으로 하는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없어 보인다.
이렇듯 현재 대북관계를 둘러싼 정당별 스펙트럼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민주당과 보수적인 한나라당, 자민련으로 나뉜다. 물론 더 진보적인 입장에서 국보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다. 원내에 진입하지 못한 민주노동당, 그리고 시민사회 단체들에서는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를 구성하여 국가보안법 자체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보법 개정과 개정반대 의견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국보법 폐지 요구는 개정에 대한 압력으로는 작용할 수 있겠지만, 제도정치의 이념적 쟁점은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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