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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정치인들에 믿음 버렸지만, 그래도 희망은 그들”

“386정치인들에 믿음 버렸지만, 그래도 희망은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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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선 오후 6시부터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가 열렸다. 기자가 행사장에 도착한 것은 7시 조금 지나서였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올해로 12회를 맞는 이 공연이 외치는 일관된 구호다. 3층까지 꽉 들어차면 1만2000명임을 감안할 때 어림잡아 7000명 이상이 모인 듯싶었다.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영사막에 임수경씨(32)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MBC 아나운서 손석희씨가 ‘돌아보면 그가 있다―국가보안법 희생자들에게 바침’(이원규 시)이라는 시를 낭송할 때였다. 배경화면으로 광복 이후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는데, 그중에 임씨의 방북사건이 포함돼 있었다. 1989년 7월 북한에 밀입국했던 임씨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장면이었다. 앳된 얼굴에 가녀린 몸.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선 힘이 느껴졌고 굳게 다문 입술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경계선을 넘는 순간 고개를 뒤로 돌려 이별을 아쉬워하는 북쪽 사람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드는 모습. 소리 없는 외침이 새떼가 날듯 공중에 흩뿌려진다. 이어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들어서는, 수척한 그녀. 통곡과 절규의 시대를 삼키며 영사막 화면은 꿈처럼 강물처럼 흘러갔다. 인터뷰는 12월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인사동과 구기동에 있는 찻집에서 모두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인사동 찻집에서 임씨와 마주앉은 것은 양심수 공연이 시작되기 5시간 전인 오후 1시께. 경인미술관 뜰에 사로잡힌 겨울 햇살은 거짓말처럼 따사로웠고, 그녀는 습관처럼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눈은 그럴 때마다 아예 감겨버렸다. 때로 도도함이 느껴지는 활달한 성격은 여전했고 6년 전 기자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 사이 그녀는 석사를 땄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별거를 했고 미국 유학을 떠났고 이혼을 했고 양육권소송을 했다. 최근엔 일본에 갔다왔다. 》

-일본 갔다온 얘기부터 들려주시죠. “11월22일에 가서 12일 정도 머물다가 돌아왔어요. 공식적인 행사는 두 개였어요. 하나는 일본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학술회의였고, 하나는 일본국제사면위원회 강연회였어요. 두 행사 다 도쿄에서 열렸어요. 학술회의에서는 기조발표를 했는데, 제목은 ‘동아시아 냉전 구조와 테러리즘’이었어요. 국제사면위원회는 (방북사건 당시) 저를 ‘세계 양심수’로 지정해 꾸준히 석방운동을 했던 단체예요.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강연을 했죠. 아사히신문에 강연회와 관련해 제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를 보고 많은 사람이 왔더군요. 11월23일 학술회의에 참석한 후 오사카에 갔다가 다시 도쿄로 돌아와 12월2일 국제사면위원회에서 강연회를 갖고 다음날 귀국했어요.”

애초 임씨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마음이 바뀌었다. “조국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의 생각을 흔들었을까.

“일본에서 미국으로 곧장 건너갈 생각이었죠. 가서 남은 학업(임씨는 코넬대 대학원에 등록한 상태다)을 계속할 생각이었는데, 개인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어요. 일본에 가서 동포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일본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뿌리 깊은 민족적 차별이 여전한 것을 보고 굉장히 가슴 아프더라고요. 분단 문제만 하더라도 그들이 분단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국적을 선택하는 어려움 못지 않게 총련이나 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대한 설움이 아직까지 남아 있고, 그래서 더더욱 통일된 조국을 보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일동포가 60만 명인데, 오사카에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우리 동포라고 할 정도로 동포들이 밀집해 있어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일본에서 임수경 석방 탄원에 서명한 사람이 83만 명이었어요. 총련이 78만 명을 끌어냈고, 다른 조직에서 별도로 5만 명을 받았다고 해요. 한국 대사관에 접수하려 했는데 안 받아줘서 UN인권위원회에 보냈대요. 10년 전 일인데도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기억해주셨는데, 제가 일본에 처음 가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었죠. 통일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절실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외동포들도 통일의 주체로

재일동포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확인하면서 임씨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통일운동에 대한 신념을 새삼 다진 듯싶다. 그녀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우리는 통일의 기운을 크게 느끼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일본 동포사회에선 정상회담이후 총련과 민단 사이에 벽이 많이 무너지고 있어요. 공동행사도 많이 열리고, 통일 기운이 솟구치는 걸 느꼈어요.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저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며 해외동포들도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동포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문제인데, 밖에 살면서 분단된 나라를 조국으로 두는 것과 통일된 나라를 조국으로 두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그들이 거기서 뿌리 내리는 힘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통일의 주체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일문화재단 만들겠다

그런데 지금 통일운동엔 구심점이 없어요. 통일 문제를 정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물론 설사 이용이 되더라도 통일이 되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통일연구소 같은 통일 관련 단체는 많지만 통일의 기운을 일으키는 실질적 일들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요. 선언적인 의미에 그치고 있지요. 과거의 통일운동 양상도 비슷하고.

일본 강연회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어요. 물론 여러 가지 답안이 있겠지만 정말 우려되는 것은 남과 북의 민중들 사이에 놓여 있는 불신의 장벽, 마음의 장벽이에요. 그것을 허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정상들이 왔다갔다 하는 일과 제도적인 정비도 필요하겠지만, 정말 우리가 북한의 민중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또 북에 사는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에 얼마나 동화될 수 있을지, 통일 이후에 갖는 후유증이란 바로 그런 것이거든요.

저는 해외동포들을 하나의 주체로 세우면서 정말로 커다란 통일문화 캠페인을 벌일 생각이에요. ‘이 시대에 통일의 주역으로 힘있게 일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라고 물을 때, 저의 잠재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사실은 그동안 제 입지나 의지가 약했어요. 석방된 후 학생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기도 했고, 틈틈이 단체 활동을 했지만 제가 스스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같아요. 결혼하면서 자신을 한계지었던 점도 있고. 일본에서 동포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내가 스스로 주체가 돼서 뭔가 해야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어요.

과거에 나를 옭아맸던 외부조건들, 예를 들어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보안관찰 대상이었고, 사면복권도 안됐고, 최근에는 이혼과 아이 문제로 많이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굴레가 거의 없어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힘있게 추진할 때가 됐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비록 지난 10년 간 특정 조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통일운동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변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이제는 저도 제 이름을 걸고 제게 맞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를테면 ‘통일21 캠페인’ 같은 것인데, 통일문화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선언적인 의미의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아니라 비정치적 교류를 계속해 국가보안법이 일상 생활에서 유명무실해지도록 만드는 일 같은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있는 반면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특별법이 있잖아요. 선언적 통일운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북과 남에 도움이 되는 통일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불씨가 얼마나 크고 밝은 횃불로 빛날 수 있을지, 그들이 그런 희망을 저에게서 보고 있다면 저는 또 그들을 통해 희망을 봤거든요.”

이런 결심을 하기 전까지 그녀가 최근까지 가장 마음을 뺏긴 일은 오빠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과 다섯 살 난 아기를 둘러싼 전남편과의 양육권소송이다. 운동권이던 그녀의 오빠는 연세대 3학년 재학중인 1984년에 입대, 강원도 철원에서 근무했는데 7개월 만에 죽었다. 군 당국은 사인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오빠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습니까.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조사대상으로 결정됐어요. 관련자 몇 명을 조사한 걸로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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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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