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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미방 사건과 이회창 문부식 김현장의 기묘한 인연

부미방 사건과 이회창 문부식 김현장의 기묘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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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얼핏 그다지 인연이 없어 보이는 인물과 사건이다. 그러나 양자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총재는 미문화원방화사건의 대법원 상고심 판결에 참여한 대법관이었다. 1982∼1983년 봄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피고인으로, 검사로, 변호인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19년이 흐른 오늘, 당시의 관계자들은 다시 역사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갈등관계로 만나고 있다. 1982년 초봄, 부산의 중심가를 뒤흔든 폭발음과 함께 시작돼 어지럽게 뒤섞여온 우리 현대사의 인맥군상을 추적해보았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1983년 3월8일 선고된 부산미문화원방화(부미방)사건 대법원 판결문(140쪽 참조)을 입수했다. 판결문은 첫머리에 판시사항, 판결요지, 참조조문, 참조판례 등이 기재돼 있었다. 본문격인 판시이유에는 ‘부미방’ 사건 당시의 사건정황과 피고인들의 개별적인 주장이 나열된 뒤 이에 대한 원심판결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논리들이 치밀하게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맺음말에 이어 마지막에 적혀 있는 대법원 대법관들의 이름. ‘대법관 이일규(재판장), 이성렬, 전상석, 이회창’.

속사정이야 어떻든 이총재가 1980년대 초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대법원 상고심 재판관이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판결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낯익은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으로 나선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 또 피고의 한 사람으로 1, 2심 재판정에 섰던 이창복씨 등등. 이 가운데 사형제도반대 운동가로 유명한 황인철 변호사만 작고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한켠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질문 하나. 도대체 ‘부미방’은 어떤 사건이었기에 당시의 명망가들이 총출동해 이렇듯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린 것일까.

사건 당시에도 그랬지만 부미방 사건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엇갈린다. 운동권 인사들은 부미방 사건을 “1980년대 초반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선명한 선도투쟁이요, 80년대 반미투쟁의 효시”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방화 당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 때문에 방법상 지나친 테러였다는 비판도 ‘낙인’처럼 늘 따라다닌다.

“200% 목표를 달성했다”



사건에 대한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국내 언론은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들이 검거되고, 사형이란 극형에 처해지기까지 이 사건보도에 총력을 쏟았다.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국시(國是)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1982년 3월21일자 ‘조선일보’에는 ‘누구를 위한 방화인가-미문화원 소실과 민족적 수치’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양국간의 안보협력체제는 공고하고 긴밀한 형편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더욱더 한미관계를 이간하려 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망상과 다름없다”며 당시까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범인들의 행동을 비난했다.

‘동아일보’도 3월20일자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어떤 경우에도 테러는 용납될 수 없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한미간의 오랜 우호관계가 이와 같은 일부 분자들의 폭력행위로 손상되지는 않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는 내용이었다.

‘중앙일보’의 사설은 요즘 다시 읽어봐도 가히 충격적이다. 제목부터가 ‘반공(反共)과 친미(親美)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는 것이다. 언론의 ‘호들갑’도 어느 정도 작용했지만 당시 부미방을 바라보는 국내외 시선이 얼마나 차가웠는지를 짐작케 하는 사례들이다.

경찰도 사건 초기 전국에 걸쳐 수사본부를 설치해 범인검거에 나서는 등 물량을 총동원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이 잡듯 범인 검거에 나선 탓에 수년간 미제사건으로 방치돼 있던 다른 시국사건 관련자들이 경찰의 단속망에 걸려들어 옥고를 치르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한때 경찰은 당시 다른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박계동씨가 용의자라며 그의 사진을 수배전단 앞자리에 올려놓기도 했다.

세계 언론도 한국의 남단 항구도시에서 벌어진 대담한 반미투쟁에 주목했다. 오죽했으면 범인 검거 이후 검사들마저 문부식 등 방화 주동자들에게 “너희 목표는 200% 달성됐다”고 평가를 했을까.

부미방 이후 19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인간군상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했다. 피고인 변호사 검사 판사로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상상 밖의 정치적 선택을 해 주변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초지일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과거의 적이 동지가 되고 과거 ‘대립각’을 세우던 당사자들이 한 정치세력에 포함돼 협조하는 사례도 목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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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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