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출범했다. 초기 김영삼 정부는 지금의 김대중(金大中) 정부만큼이나 북한에 대해 꽤 온정적인 유화정책을 택했다. 그러나 북한은 다른 선택을 했다.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 국가들의 연쇄적 붕괴와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를 지켜보면서 심각한 고립에 빠진 북한은, ‘정권 안보’를 위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선택했다. 이는 한반도 주변에 새로운 위기를 몰고 왔다.
핵과 미사일처럼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무기를 ‘대량살상무기’라고 한다. UN과 ‘세계의 경찰’ 미국은 제3세계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하거나 보유하는 것을 적극 억제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북한은 IAEA(국제원자력기구) 등의 사찰을 받아라”고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섰다. UN 안보리도 ‘북한이 IAEA의 사찰을 받지 않으면 경제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 채택을 논의하게 되었다.
미국은 구체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괌에 주둔한 미 13공군에서 고공 정찰기 U-2, 미국 본토에서 F-117 스텔스 폭격기와 B-2 전략 폭격기 등을 미 7공군이 운영하는 한국의 오산기지로 대거 전진 배치한 것이다. 이에 맞서 북한도 후방에 있던 전투기를 황해도 과일군 등에 있는 전방 비행장으로 대거 전진 배치했다. 1994년 미국과 북한 공군은, 한국 공군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이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며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김영삼 정부는 미·북간의 대립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간의 회담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발상은 정권 수호를 위해 이를 악물고 핵개발에 매진해온 북한에게 스스로 ‘인질’이 돼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의 정상회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과 미국측이 대단히 불쾌해 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곳은 바로 한국”이라며 북한에 핵무기를 개발할 빌미를 주지 말라고 경고했다. YS는 그러한 미국의 입장도 헤아려준다며 “핵무기를 가진 자와는 악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북한은 ‘오월동주(吳越同舟)’로 대립하고 있는데, YS는 두 세력의 비위를 모두 맞추겠다고 했으니 사단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바다’ 자초한 YS의 양다리 외교
1994년 3월19일 판문점에서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제8차 실무접촉이 열렸다. 냉랭한 표정으로 회담장에 들어온 북측의 박영수 대표는 험담을 퍼붓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대화에는 대화,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남측의 송영대 대표를 가리키며) 전쟁이 나면 당신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은 ‘북한도 동유럽처럼 무너질 것’이라며 ‘북한 급변대책’까지 논의하던 ‘YS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일전불사로 나아갔다. 미국은 1994년 6월 중 어느 하루를 택해 핵시설이 있는 북한 영변을 공습한다는 작전계획 작성에 들어간 것이다. 시시각각 전운(戰雲)이 짙어가자 박영수의 ‘불바다 발언’ 때는 아무 소리 않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을 향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안된다”고 강력히 제지했다.
이때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최후 통첩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카터는 김일성으로부터 뜻밖에도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대답을 갖고 돌아왔다. 이로써 전운은 걷히고 다시 대화의 길이 열리게 됐는데, 그로부터 채 한 달이 못돼 김일성이 사망했다(7월8일).
김일성 사망은 또다른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북한은 외부세계를 향해 연신 “우리를 위협하면 강력히 대처할 것이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로인해 남한에서는 ‘북한이 자포자기로 전쟁을 벌인다’ ‘북한에 내부 권력투쟁이 일어나 한반도 전체가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등 전쟁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두려움은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결의를 촉구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북한의 ‘불바다’ 위협에 자극받은 세력은 국회로 하여금 연일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 아닌가를 따지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방부 정책실은 국방백서에 ‘주적’이라는 단어를 넣기로 결정했다. 주적이란 단어는 1995~1996년 국방백서에 처음 등장했는데, 그 논리가 상당히 흥미롭다(1995~1996년 국방백서는 1995년 발간되었다. 당시에는 연도 표시를 이렇게 했다).
국방백서는 먼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추구하는 ‘국가목표’를 설정하고, 이 국가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위 목표 ‘국방목표’를 정의한다. 그리고 국방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무기와 조직체계가 필요한지를 서술하고 있다. 주적은 국방목표를 부연 설명하는 대목에서 단 한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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