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호

김영삼 전 대통령

“97년 대선 ‘JP 대통령’이 역사의 순리였다”

  • 글: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입력2003-09-25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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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은 ‘전’자를 떼고 ‘김영삼 대통령’이라고 부르겠습니다.”“하하, 그래요.”“그때 기분 나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아니, 괜찮았어요”

    “퇴임하신 이후 만난 사람 중에서 ‘각하’나 ‘김영삼 대통령’이 아닌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고 호칭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뇨, 없었어요. 그때가 처음이었죠.”

    8월30일 오전 서울 동작구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의 2층 응접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마주앉으며 필자는 2년 6개월 전 ‘같은 장소’에서 진행했던 인터뷰(여성동아 2001년 3월호)를 떠올렸다.



    ─그땐 우리 사회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호칭이 현직에 있을 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질문을 했던 거고요. 또 며칠 동안 장관직에 머물렀던 사람도 죽을 때까지 장관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오늘은 또 뭘 물을지 모르겠네. 아, 뭐든지 물어봐요.”

    필자의 ‘고백’에 ‘김영삼 대통령’(이하 YS)은 호탕한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인터뷰는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필자는 사전에 ‘예상 질문지’를 건네줘 답변을 미리 준비케 하는 관례를 깨고 나름대로 정리해온 질문들을 즉석에서 풀어놓았다.

    먼저 황장엽씨 얘기부터 꺼냈다. YS 재임 마지막 해인 1997년 북한의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인 황씨가 망명한 것을 두고 항간에선 문민정부의 공작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황장엽 면담, DJ가 방해

    ─얼마 전에 황장엽씨가 상도동을 다녀가지 않았습니까. 재임 중에 그를 만난 적은 없었습니까.

    “아, 못 만났어요. 김정일하고 대화도 많이 한 사람이고,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이북의 실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죠. 당시 황장엽을 만나보고 싶어 날짜까지 잡았는데, 동아일보가 ‘황장엽이 김대중과 이북의 비밀관계를 알고 있다’, 뭐 이런 내용을 톱기사로 실은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통령선거 전인데 내가 만나면 그 얘기가 새 나간단 말입니다. 청와대에 비밀이 없거든요. ‘둘이서 김대중 죽이는 음모를 꾸몄다’, 두 야당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더란 말이야. 참 난처하게 됐지.

    그래서 결국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못 만났어요.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도 몇 번 만나려고 했어요. 안기부장(국정원장)이 오케이 했는데, 한 시간쯤 지나 청와대와 연락한 다음엔 못 만나게 했죠.”

    ─당시 청와대측에서 황씨를 못 만나게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장엽이 김대중의 비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때 내가 김대중을 많이 공격하고 있었으니까 황장엽을 만나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약점을 잡힐까봐 그랬다는 거죠.

    “그런 것 같아요.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그토록 겁이 많은 사람이에요. 내가 오래 봐 왔기 때문에 잘 알지. 그 사람은 겁쟁이예요.”

    ─이거, 이대로 써도 되겠습니까. 겁쟁이라고.

    “아∼이∼고. 써도 괜찮아요. 거짓말도 잘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그 사람 전공이에요.”

    ─이것도 이대로 써도 되겠습니까.

    그는 “돼요. 돼” 하면서 박장대소했다. 그 웃음에는 DJ에 대한 오랜 불만과 앙금이 담겨 있는 듯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황장엽씨 쪽에서 먼저 YS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YS와 황장엽씨는 지난 1월7일과 6월16일 두 차례 만났다.

    ─지난 1월에 만났을 때 무슨 말씀을 나누셨나요.

    “이북의 실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국정원이 하는 여러 가지 일을 비판하고, 김대중을 비판하고, 뭐 그랬어요. 그런데 그날 만나보니 이런 양반한테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황장엽씨) 부인이, 남편이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옛날 사람들처럼 사약을 가지고 있다가 목숨을 끊었다고 해요.”

    ─망명 후 얼마나 지나 일어난 일인가요.

    “중국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자살했다고 해요.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딸은 붙들려 가다가 차에서 뛰어내려서 죽고 아들은 수용소에 끌려갔을 텐데 아마 죽었을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보통 불쌍한 게 아니야. ‘건강이 어떠냐’ 물었더니 ‘좋다’ 이러더라고. 참고 견디는 수양이 돼 있는 거지. 내가 전두환 정권 때 3년 동안 갇혀(가택연금) 있어 봤잖아요. 감옥보다 훨씬 나쁩니다. 갇혀 지낸다는 게. 이거는 나가지도 못하고 누가 오지도 못하고. 황장엽씨도 그리 지낸 거 아닙니까.”

    YS는 질문에 대답하는 중간중간 에어컨 리모컨을 손에 쥐고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였지만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는 필자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황장엽씨 망명을 두고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기획망명’이라는 거죠. 당시 안기부가 망명공작을 꾸민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인데요.

    “그것은 사실과 달라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둘째 아들인 김현철씨가 황씨 망명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비선 조직이 움직였다고도 하는데요.

    “언론이 전부 조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사전에 황씨의 망명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는 겁니까.

    “그래요. 몰랐습니다. 북한에 있는 그 정도 위치의 인물에 대해 공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공작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공작에 의한 망명은 아니었다는 건데 혹시 대통령 모르게 안기부가 망명을 주도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봐요. 그 사람이 중앙당 서기 아니요. 그 정도 되는 거물급을 한국에 데리고 올 정도로 공작능력이 있었다면 김정일도 벌써 죽였죠.”

    ─함께 망명했던 김덕홍씨에 따르면 망명방법과 망명시기 등을 두고 우리 정부와 상당히 많은 얘기를 나눴다는데요.

    “나중에 황씨가 ‘일본 갔을 때 망명할 기회는 있었지만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황씨는 국제담당 서기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든 갈 수 있었어요.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망명을 하겠다고 맘먹진 않았을 테고. 망명이란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김광일 설득해 노무현 ‘픽업’

    지난 7월15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인사차 상도동을 방문했을 때 YS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일본, 중국에 가서 한 얘기가 다 다르며 아침과 저녁 얘기가 다른데 믿음이 가겠느냐”면서 “내가 ‘픽업(pick up)’했기 때문에 잘 해주기를 바랐는데 다 틀렸다”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었다. 화제를 ‘픽업’의 대상인 노무현 대통령으로 돌렸다.

    ─항간에 들리는 얘기로는 송기인 신부로부터 노무현 대통령을 추천 받아 정치에 입문시켰다는데요.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달라요.”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났습니까.

    “당시(1988년) 야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로서 내 맘대로 공천할 때 아니요. 부산에서는 내가 공천하면 다 되게 돼 있었어요. 5·6공 사람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많이 공천하면 좋겠다는 분위기였어요. (부산 지역) 재야에서 활동을 많이 하던 두 사람이 있었어요. 김광일과 노무현이었는데, 김광일이 노무현보다 훨씬 위였어요. 그래서 내가 가까운 사람을 불러 ‘부산에 가서 두 사람을 만나라. 특히 오야붕이 김광일이니 먼저 김광일을 설득해야 한다’고 이르고는 부산으로 보냈어요. 심부름을 한 사람 성은 ‘엄씨’였어요. (엄씨가) 김광일에게 술도 한 잔 먹이고 하면서 설득해 그 다음날 (상도동으로) 데리고 온 거요.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을 설득했어요. ‘재야 운동 그만하고 제도권으로 들어 온나’ 하고 말이죠.”

    허삼수에 맞선 노무현 특별지원

    ─제도권으로 들어오라는 설득에 노무현 대통령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재야가 좋다’면서 ‘시간을 얼마 달라’ 하더라고. 그때는 김광일이 노무현의 오야붕이니까. 뭐 주로 김광일이 얘기를 하고 그 사람(노무현 대통령)은 따라가는 쪽이었지. 나도 오랜 시간 여유를 줄 수는 없었어요. ‘언제까지 답을 하라’고 시한을 정한 다음 여기서(상도동)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랬는데 약속한 시일에 안 왔어요.”

    ─아무 연락도 없이 안 왔다는 겁니까.

    “예. 연락도 없이요. 그래서 내가 직접 통화를 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나도 공천을 줘야 하는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안 오면 어쩌냐. 올라와라’ 이래 된 거라. 그러고 나서 다시 약속한 날짜에 왔기에 ‘이제 결정할 시기가 됐다. 나도 빨리 공천을 마무리지어야 되니까 미룰 수는 없다’ 이랬더니 결국 두 사람 이야기가 뭐냐 하면 ‘(국회의원 선거에 필요한) 등록금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거라. 그래서 ‘돈 같으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어차피 다 도와준다.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면서 그 자리에서 등록금과 선거비용에 보태라고 얼마를 줬지. 그러니까 ‘착수금’으로 얼마를 주고 그 자리에서 입당원서를 준 후에 ‘내일 공천자로 발표를 하겠다’, 이렇게 된 겁니다. 선거구 얘기가 나왔는데, 김광일은 (부산) 중구를 선택했고 노무현은 ‘나는 허삼수가 나오는 (부산) 동구에서 나가겠다’고 해 그렇게 정리됐죠.”

    ─선거기간에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도와주셨나요.

    “아∼이∼고, 그거 말도 말아요. 유세뿐만 아니라 선거자금도 그 두 사람에게 특별히 많이 줘야 될 거 아니요. 사실은 특별히 많이 줬어요. 서너 번 나눠서 줬으니까. 그때는 내가 유세하는 게 굉장한 힘을 발휘할 때였거든. 노무현을 당선시키기 위해 심지어 트럭을 같이 타고 다니면서 하루종일 골목골목을 누볐어요. 사람들이 노무현 얼굴을 잘 모르잖아요. 하여튼 그때 사력을 다해서 당선을 시킨 것이지. 5공 인물인 허삼수에게 이기는 것은 상징성이 컸죠.”

    김영삼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요일만 빼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7시에 운동을 시작한다.

    ─노대통령이 허삼수씨와 붙어보겠다고 할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어, 붙어보라고 했지.”

    ─쉬운 자리보다는 어려운 자리를 선택한 데 대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요.

    “음, 그런 생각도 좀 들었죠.”

    ─당선되고 나서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인사말을 건넸습니까.

    “그건 기억에 없어요. 나중에 국회에서 5공과 광주청문회가 열리지 않았습니까. 총재인 내가 노무현씨를 5공 청문회에 배정했는데, 그것을 통해 스타가 됐지요.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된 기(氣)도 그때 생긴 것 같아요.”

    지난해 민주당 경선을 거친 노무현 대통령후보는 상도동을 방문해 지지를 부탁했다가 여론의 역풍에 밀려 지지도가 하락했다. 그때 YS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뭐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왜 그러는고 하니,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엉뚱한 짓을 잘하거든.”

    ─어떤 측면에서요.

    “예를 들자면, 언젠가 그 사람이 난데없이 국회의원 사표를 낸 적이 있어요(노무현 대통령은 1988년 말 5공 청문회로 스타가 된 이후 이듬해 3월 이어진 청문회가 여당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파국을 맞자 국회의원 사직서를 제출했다). 당과 아무 상의 없이 사표를 내버렸는데, 휴회 때는 국회의장이 (사직서를) 수리하면 (국회의원의) 목이 달아나요. 그래서 내가 김재순 국회의장을 찾아갔어요. ‘김의장. 내가 오늘 참 특별한 부탁을 하러 왔는데, 이 사람의 사표를 절대 받지 말아라. 정부에서 사표를 처리해 버리라는 압력이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니 김의장이 좀 도와달라. 내가 반드시 노무현을 찾아서 보내겠다’고 했죠. 내가 총재지만 의원 사직서는 못 찾아와요. 반드시 본인이 찾아가도록 돼 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행방불명 된 거라. 가까운 김광일도 모른다고 하고. 부인 권양숙씨를 상도동으로 불러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 도대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강원도 속초에 가 있다’는 거야. ‘내일 저녁까지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이튿날 부인하고 왔습디다. ‘노의원 이런 일 하면 안 된다. 국회법에 따라 사직서를 수리해 버리면 끝이다’라고 말했지요. 그래서 결국 (사직서를) 다시 받아왔는데, 이렇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가끔 엉뚱한 짓을 해요.”

    “노무현, 말 줄이고 권위 세워야”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상도동을 방문했을 때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까.

    “어떤 부탁도 있었죠. 그런데 그 부탁은 내가 안 들어줬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

    ─대선 때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뭐 그런 얘기지. 그때 나눈 얘기는 (서로) 안 하기로 했으니까…. 그날 나는 기억을 못하고 있는데, 노무현이 손목의 시계를 내보이더니 ‘각하가 15년 전에 일본에 갔다 오면서 사준 시계’라고 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공개합디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시계까지 차고 온 사람이….”

    ─그때 ‘YS 시계’ 탓에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떨어졌다고들 했지요.

    “말도 아닌 소리요. 인기가 내려갈라고 해서 내려간 거지. 그런 것 때문에 올라가고 내려가고 그러나요.”

    ─노무현 후보의 부탁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내 정도(正道)였기 때문에 그랬어요.”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잘해주기를 바랐는데 다 틀렸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신다면요.

    “내가 보기에 노대통령이라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말하는 게 말이야. 사람은 물론 말을 전혀 안 하면 그것도 문제지만, 대통령은 상당히 가려서 말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개××들’이니, ‘대통령 못해 먹겠다’라든지, ‘누가 하야하라는데 나는 절대 하야 안 한다’고 한다든지,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할 필요가 없죠. 대통령은 법 이전에 권위로써 다스려야 하거든. 그런데 권위가 없어져 버렸어요. 지금 공무원 사회가 어지러운 것도 대통령의 태도 때문에 더 그래요. 대통령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국가 원로의 한 사람으로서 노대통령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글쎄, 사람이 성격을 뜯어고친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우선 말을 줄이고 대통령의 권위를 찾는 게 중요하죠. 아무리 허물이 없다고 수석들하고 맞담배질 하면 안되죠. 국민들 정서에도 안 맞고.”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밤 10시30분에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는 YS의 하루 일과는 오전 7시에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집 근처 고구동산에서 배드민턴을 시작한 지 3년째 접어든 그는 “배드민턴을 치는 것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며 “실력이 늘어서 아주 잘 친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

    필자는 평소 운동과는 담쌓고 살아왔지만 젊음을 무기로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YS는 흔쾌히 응했다. ‘결전’의 날인 9월1일 월요일 오전 7시 상도동 대문 앞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나이보다 꼬박 ‘배’가 많으십니다.”

    “그럼 한번 해 보지.”

    일흔 여섯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게임은 복식으로 진행됐다. YS는 평소 운동할 때의 파트너인 상도동 주민 강계순(43·전업주부)씨와, 필자는 배드민턴 경력 10년째 접어든 이연님(46·노량진동)씨와 각각 팀을 이뤘다.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설마 지기야 하겠어?’ 하는 막연한 기대는 처음부터 빗나갔다. YS가 내리치는 셔틀콕의 속도는 예상을 뛰어 넘었고 몹시 날카로웠다. “좀 봐 주면서 치시죠” 하고 부탁했지만 “아, 그래, 날 이길 거라고 생각했소?”라는 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널리 알려진 강한 승부근성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15대2. 필자의 대패였다.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시죠?

    “예. 그래요.”

    이틀 후인 9월3일 필자는 다시 한번 도전했으나 결과는 15대4. 또다시 완패였다. 그는 흠뻑 젖은 땀을 닦으며 “연습을 더 한 다음에 다시 대결을 신청해요”라며 웃음을 참지 않았다.

    YS는 일요일을 빼고는 눈이 내리거나 폭우가 쏟아져도 운동을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YS는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퇴임했으니 골프를 쳐도 누가 욕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건 안 그래요. 전 한번 한 약속은 끝까지 지킵니다. 골프, 그거 굉장히 재미있는 운동이지. 하고 싶은 유혹이 왜 없겠어요. 그래도 참습니다.”

    자신과의 약속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집념’으로 밀어붙이는 YS는 다른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현실정치와 관련된 발언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있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정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는 김삿갓 마냥 산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의 예를 많이 드는데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도 기회만 있으면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대통령을 경험한 사람이 이것은 잘됐고, 저것은 잘못됐고, 하고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전직 대통령으로서 조언하는 차원을 넘어서 발언 자체가 정치에 개입하거나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경우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00년 총선 당시 민주산악회 재건 등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은 없고요. 그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해요.”

    ─내년에 총선이 있는데 정치를 재개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그것은 꿈에도 생각 안 해요.”

    ─민주당의 신당 출범뿐만 아니라 한나라당도 소장파와 노장파로 나뉘어 정계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내년 총선에서 부산과 영남 지역에서는 ‘김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할 것 같은데요.

    “특별한 생각은 없어요. 사람들이 찾아오면 조언을 해줄 뿐이지. 오늘 아침에도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다녀갔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수는 없잖아요. 오랫동안 관계를 맺은 사람들인데 안 만나고 산다면 그게 이상하지.

    퇴임할 때 나더러 ‘고향인 거제에서 편하게 사십시오’라고 권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정치를) 떠나서 사느냐’고 대답했지. 내가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정치인들이) 물으면 대답은 해주는 것이 옳다는 거지.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는데 한나라당의 어떤 사람이 ‘우리가 야당을 안 해 봐서 우째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묻기에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럴 땐 이렇게 가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해줬죠.”

    지난 8월26일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7년 전인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안기부 예산을 신한국당 선거자금으로 불법 지원한 혐의(특가법상 국고 등 손실)로 한나라당 강삼재 의원과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 대해 각각 징역 9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또 두 사람에게 940억원의 연대 추징금과 함께 김기섭씨에 대해서는 별도로 257억원의 추징금을 구형했다. 이른바 ‘안풍(安風)’으로 불린 이 사건에 YS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나는 김대중이 강삼재 의원에게 정치보복을 했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인 내가 돈을 모아서 당에 준 적은 없어요. 상당히 많은 기업이 사무총장을 통해 돈을 전달했다고 봐요. 정치자금으로 받아 선거(총선) 때 쓴 거지 뭐. 왜 강삼재 의원이 정치보복을 당했느냐 하면, 김대중이 부정축재한 거 폭로한 장본인이 강삼재거든. 그거 이회창이 시켜서 한 일이지만, 강삼재는 당의 대표가 ‘발표해라’ 하니까 발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에 대해 김대중이 정치보복을 철저히 한 거지.”

    “김태정이 나한테 다 얘기했다”

    화제가 1997년 ‘DJ 비자금’ 사건으로 옮겨졌다.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던 강삼재 의원은 “김대중 총재가 67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 관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검찰수사를 촉구해 대선 정국에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비자금 의혹 고발사건을 15대 대선 이후로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그때 일이 참 복잡해요. 김대중이 참 희한한 사람이라는 게, 그때 두 사람(김대중 총재와 김태정 검찰총장)이 만났어요.”

    ─DJ가 당선자 시절에 말입니까.

    “예.”

    ─사전에 두 사람이 만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나중에 알았는데 김대중이 김태정을 만나 ‘내가 취임하기 전에 그것(비자금 사건)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해달라’고 부탁을 한 거야.

    ─DJ가 먼저 김태정 검찰총장을 만나자고 했다는 건가요.

    “누가 먼저 만나자고 했는지는 몰라요. 만난 것은 확실하고. 그때 (김검찰총장이) 내 말은 들을 땐데…. 김태정은 새로운 사람에게 아첨을 해야 되니까, ‘그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지. 나는 다 알았어요. 김태정이 나한테 와서 다 얘기했으니까요.”

    ─DJ의 비자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얘기는 고만 하자고. 하지만 돈에 참 더러운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대통령을 했다는 게 우리나라의 큰 불행이고. 5억달러를 이북에 보냈다는 게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현행 법률위반 아니요? 그러면 반드시 구속해야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재임 중에도 구속해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에요.”

    ─DJ가 여러 차례 청와대에 초청했는데 거절하셨잖아요. 왜 그렇게 안 들어가셨습니까.

    “청와대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그 사람에게 선언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입니까.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이 나한테 설명을 한다고 했을 때죠. 그때 (청와대에서) 둘이서만 점심을 먹었지. 이북을 다녀왔으니 ‘그래, 먼저 얘기를 해 봐라’ 이랬더니 ‘내가 평양에 도착하니까 60만 군중이 나와서 환영을 하더라’ 그럽디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 환영이라고 하더냐, 김정일 장군 만세라고 하지 않았냐. 그런데 무슨 당신을 환영했다고 그러냐. 당신 말이 틀리지 않느냐’고 했지.

    또 의장대 사열에 대해 얘기하기에 ‘내가 세계 여러 나라 돌아봤지만 의장대 사열은 정상끼리만 하는 거다. 클린턴이나 강택민도 우리나라에서 의장대 사열할 때 나하고 둘이서만 했다. 그런데 당신은 이북 총리가 끼여 셋이서 사열하지 않았냐. 총리와 사열하는 법이 어딨노 말이야. 내가 백악관에 만찬 초청 받아 갔을 때 클린턴이 환영사했지, 국무장관이 대신 하고 내가 답사했냐. 김정일이 멀쩡하게 앉아 있으면서 환영사를 총리가 하고 당신이 답사하고, 그래놓고 도대체 무슨 환영을 받았단 말이냐. 격에 안 맞는 일을 한 게 아니냐’고 했지.

    그리고 말이야. ‘(북한이) 미군 주둔 반대 안 하기로 했다’ 이런 얘기를 하기에 ‘그게 거짓말이라는 게 벌써 빵구 안 났나’ 하고 말했지. 김대중이 다녀온 며칠 후에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이북에서 성명을 발표했어요. (성명 발표) 날짜를 가르쳐 주면서 ‘이거 당신이 거짓말하는 거냐. 아니면 김정일이 거짓말을 하는 거냐’고 물었지. 또 김정일이 온다 하더라고. 약속을 했다고 해서 ‘그것도 봐라. 당신이 또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김정일이 거짓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김정일은) 절대 한국에 못 온다’고 말했지요.”

    ─그에 대한 DJ의 답은 뭐였나요.

    “‘온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내 말이 맞잖아요. 못 오잖아요. 몇 년 동안 기다렸는데 끝내 안 왔잖아요. 내가 그런 말 한다고 언론이 참 많이 비판했어요. 그때 신문사설에서 ‘YS는 왜 이러나’ 하면서 비판을 많이 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을 당시 두 사람 간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현직은 물론 전직 대통령에게도 ‘각하’라는 존칭을 쓰는 것이 일반화 돼 있다. DJ에 대해 평소 독설을 아끼지 않는 YS가 과연 ‘각하’라는 존칭을 썼을까.

    “그 사람하고 (평소에) 서로 존칭은 안 써요. 원래 말을 놨거든요. 고상하게 말은 하지. 나는 절대 ‘각하’라는 용어 안 썼어요. 김대중은 나한테 ‘김대통령께서 우짜고…’ 했지. 그러면 나는 ‘김대통령은…’이라고 했지, 각하는 무슨 각하.”

    ─어쨌든 전직 대통령인 DJ를 그토록 싫어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게 DJ를 싫어하십니까. DJ와 화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그런 생각은 전혀 없고요. 그날 청와대에서 점심 먹고 일어나면서 김대중 보고 ‘오늘로 마지막으로 만나는 거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다’고 말해줬어요.”

    ─DJ의 대답은요.

    “뭐라 말을 못하지.”

    ─그 이후 안 만난 거네요.

    “초대했어도 절대 안 갔지 뭐.”

    ─앞으로 사실 날도 많지 않잖아요. 오랜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고요.

    “DJ가 하도 나를 많이 속여먹어서요.”

    ─DJ를 싫어하는 이유가 속였다는 것 때문인가요.

    “그렇죠. 거짓말을 하도 해 싸서…. 거짓말하는 것은 질색이요, 질색. 그 사람한테 하도 많이 속았으니까. 이제는 거짓말이 아니겠지 하면서도 또 속고 또 속고. 그렇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니까 우리나라 역사가 잘못된 거요.”

    ─DJ뿐만 아니라 거짓말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까.

    “그럼요.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의리 없는 것도요.”

    ─DJ에 대해 다시 한번 여쭤 보겠습니다. 두 분 다 퇴임을 했는데, DJ쪽에서 ‘잘해 보자’고 화해를 제의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이고, 그런 일 없을 거니까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내가 그 사람 성격을 아니까.”

    그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힘이 실렸다. DJ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돈 얘기를 해 볼게요. 한나라당 강인섭·박종웅 의원이 지난 5월 당내 민주계 의원을 대표해 상도동을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상도동에서 일하는 일부 직원이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성금’ 3000만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요. 그 돈을 돌려보냈는데 당시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아이고, 내가 그렇게까지 살아서 뭐하겠어요.”

    “전두환 재산? 얘기하지 맙시다”

    YS는 현재 정부로부터 월 844만원, 예우보조금 월 542만원 등 월 1386만원의 연금을 받는다. 보통사람 기준으로는 작지 않은 액수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위유지와 각종 경조사비, 식비, 생활비로는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전직 대통령에게는 국가에서 월급을 주는 비서관 3명과 운전기사가 지원된다. 하지만 집안일과 주방일을 돌보는 사람 등 개인적으로 고용한 4명의 직원들에게는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월급을 준다.

    ─한 달에 용돈은 얼마나 쓰십니까.

    “별로 안 쓰죠. 연금은 통장으로 들어오는데 비서가 관리해요.”

    ─돈이 필요하면 비서에게 타 쓰십니까.

    “그렇죠.”

    ─집에서도 필요하면 비서에게 타서 쓰는 겁니까.

    “그래요.”

    ─얼마 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법정에서 자신의 재산이 29만원이라고 밝혔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이고 마, 그것은 이야기하지 맙시다.”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건가요.

    “그거 이야기해서 뭐 합니까.”

    ─현재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음, 내 재산이 많지요. 이 집이 있고…. 내가 만일에 김대중처럼 욕심이 많은 사람 같았다면 벌써 땅도 사놓고 했을 거예요. 야당 총재 때 제주도에도 사놓고 서울에도 사놓고 하면서 좀 더 큰집에서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런 짓을 절대 안 했어요. 김대중이 내 돈에 대해 파 보려고 내 뒷조사를 되게 했습니다.”

    ─부동산은 상도동 외에 없습니까.

    “그래요.”

    ─은행에 현금이 좀 있습니까.

    “없어요.”

    YS는 퇴임을 앞두고 상도동 사저를 증·개축하는 과정에 ‘상도동 아방궁’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현재 상도동 집은 비서실과 경호원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1층과 거실, 주방과 두 개의 방이 있는 2층, 그리고 안방과 작은 방 등이 있는 3층으로 구성돼 있다. 3개 층을 전부 합쳐 101평인 이 집에서 주인이 전직 대통령임을 알려주는 표시라고는 거실 벽에 걸린 세계 정상들과의 기념사진들뿐이다.

    ─재임 당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켰는데요. 그 결정에 대해 후회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개인 간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사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혹시 개인적으로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필자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고구동산을 내려오는 김영삼 전 대통령.

    YS가 창당했던 통일민주당 출신 당료 모임인 민주동지회(회장 노병구)는 지난 8월21일 2박3일 일정으로 속리산에서 단합대회를 갖고 1997년 말 들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통해 ‘문민정부 재평가’ 작업을 본격화하기로 결의해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대중 정권에 의해 문민정부가 저평가됐다는 판단에서 출발했다.

    노병구 회장은 “IMF 관리체제를 두고 일방적으로 김 전대통령을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IMF 관리체제의) 원인 규명이 이뤄져야하고 문민정부의 업적 재평가를 통해 자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껴 모임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영삼 대통령) 재임 중에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무너졌다고 해서 그 모든 책임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부실시공 탓에 오래 전부터 안고 있던 문제가 불거져 무너졌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IMF 관리체제도 박정희 정권 때부터 누적된 ‘빚’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국민이 잘 모르고 있다. YS는 경제위기를 예감하고 금융관계법과 노동법 등을 개정하려 했으나 DJ가 이끌던 야당에 의해 좌절됐고, 기아자동차 매각도 야당의 반대에 부딪혔다는 점 등이 규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모임에는 김덕용, 김무성, 박관용, 박종웅, 신경식, 신영국, 심규철 의원을 비롯한 150여명의 회원이 참석해 ‘김대중 정권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는 후문이다.

    ─민주동지회가 문민정부에 대해 재평가 작업을 한다고 나섰는데, 이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지는 게 옳으니까.”

    ─IMF 탓에 재임 중 치적이 묻혀버린 느낌입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치적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나저러나 금융실명제, 그것은 도저히 하기 어려운 일을 한 것이고. 하나회 청산, 그거 안 했다면 노무현이 대통령 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김대중이 대통령 취임도 못했고 군인들이 지금까지 지배한다고 봐야 해요. 또 하나는 지방자치제요. 이것은 대통령선거 때만 되면 출마자들이 공약하던 사항이오. 나도 공약을 했는데, 막상 하려니까 내부에서 반대를 하더라고. ‘대통령의 권력을 떼주는 것 아니냐’면서. 내가 얘기할 게 많지만 이 정도로 하지.”

    ─가슴 아픈 질문이 되겠습니다만, ‘나라를 망친 대통령이다’는 말이 뼈에 사무칠 것 같습니다. IMF를 몰고 온 대통령이라는 평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가 긴 설명을 덧붙였다. YS의 주장은 민주동지회 노병구 회장의 주장과 대동소이했다. 그는 치적 중 하나로 월드컵 유치를 꼽으면서 비화를 소개했다.

    “정몽준이 말이요. (월드컵 유치하면서) 지 돈 한푼도 안 썼어요. 하루는 구평회 회장(월드컵 유치위원회 위원장)이 갑자기 나를 보자고 해서 (청와대로) 오라고 해서 만났는데, 와서 하는 얘기가 ‘정몽준이 돈을 달라’고 한다는 거야. 지가 돈이 있는데도 안 쓰고 말이지. 영수증을 받고 주려 하니 영수증도 안 쓴다고 했다는 거야. 구회장이 ‘그러면 못 주겠다’고 하고 나한테 온 거지.

    그래서 내가 ‘구회장, 그것 가지고 싸우지 마라. 영수증 받지 말고 줘라. 우짜든지 간에 일이 추진되는 게 옳지. 쳐 먹든지 말든지 뭐’, 그리 하라고 시켰어요. (정몽준 의원은) 영수증 하나도 안 쓰고 돈을 제일 많이 썼어요. 174억원을 갖다 썼어요.

    김운용이 요즘 욕을 많이 먹는데, 그때는 고생 많이 했어요. (월드컵 유치와 관련해) 심부름 많이 다녔어요. 후진국은 IOC위원이 FIFA위원을 겸하고 있는 데가 많아 먼 나라는 그 사람이 다 돌아다녔으니까. (월드컵 유치 발표) 하루 전날 김운용한테 전화가 왔어요. ‘지금 사마란치 위원장이 그러는데 (일본과) 공동주최로 간답니다’ 하고 말이지. 그때까지 정몽준은 연락도 없었어요.”

    ─재임 중에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요?

    “우찌됐든 간에 국민에게 고통을 안긴 것이지. 어찌됐든 잘못된 거지. 김종필씨에게 내 뜻이 제대로 전달 안 돼 당을 떠났던 것도 그렇고. (김종필 총재가 탈당하지 않았다면) DJ가 대통령이 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햇볕정책이니 뭐니 하는 것도 없었을 거고.”

    화제는 자연스럽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가 하루아침에 국민에게 널리 퍼지게 한 민자당 김종필 대표의 탈당으로 이어졌다. 1994년 말 민주계 핵심인 최형우 당시 내무장관은 기자들에게 “내년에는 큰 변화가 있으며, 당대표제는 필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의 말은 ‘세계화 개혁을 위해 당대표를 새 인물로 바꿔야 한다. 즉 김종필 대표의 2선 후퇴가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해석돼 민자당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 2월 김종필 대표가 민자당을 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그는 구 공화계 세력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연합’을 만들었다.

    ─DJ가 아니라 JP가 되는 것이 순리였다는 겁니까.

    “그렇죠. JP는 (DJ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요.”

    ─당시 JP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음에도 JP가 김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겁니까.

    “내 뜻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흐름(JP의 2선 후퇴)이 당내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JP를 쫓아내야 할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니었거든. 그런데 나중에 많이 후회했다고요. 내가 후회하는 일 중에 하난데, 그때 내가 청구동에 갔어야 했어요. 그라믄 (JP를) 분명 잡을 수 있었다니까. JP 성격을 내가 잘 알거든요.”

    ─그런 생각까지 했다면 어떻게든지 잡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때는 (JP가) 그리 말은 했지만 탈당할 것 같지는 않았고.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보냈어요. (탈당을) 말려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얘기도 했고. JP가 됐다면 우리나라와 이북의 관계가 이렇게 안 됐을지도 모르지. 이북은 남한이 원하는 식으로 통일이 되기를 바라지 않거든요. 역사의 흐름이란 게 뭔지. 이상한 흐름으로 가는 거예요.”

    “국립묘지말고 고향에 묻히겠다”

    ─그렇다면 당시 청구동에 못 가신 겁니까. 안 가신 겁니까.

    “누군가를 보내는 것으로 일이 해결 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게 참 후회돼요. 우리나라의 역사를 위해서도요. 소위 3김 중에서 내가 먼저 대통령이 된 거 아니요. 나 다음에 JP가 대통령이 됐다면 그 다음에는 누가 되더라도 괜찮아요. 그것이 역사의 순리였지 않나 생각해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 그래요.”

    ─JP는 한편으로는 김대통령이 오랫동안 맞서 싸워 온 이른바 쿠데타 세력이지 않습니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게 우리 역사의 불행이었지. 노무현으로 연장된 것도 잘못된 거고. 그런데 JP를 거쳤다면 우리나라가 이런 상태는 안 됐을 거다, 이 말이야. 이게 뭐냐 말이야. 이번 대구의 여자(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석한 북한 선수와 응원단)들 봐요. 하여튼 참 창피하고 부끄럽고. 그리 사과하고 매달려서 오게 하고….”

    ─JP를 평가한다면, 그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대통령을 했으면 잘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뭐, 여러 참모들이 있고. 대통령은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니까.”

    ─JP의 경우는 권력과 돈 모두를 가졌던 분이 아닌가요. 부패도 했었고. 김대통령께서 싫어하는 점이 있는 분인데요.

    “그런 점이 있죠. 그런데 크게 볼 때 김대중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은 게 잘못된 일이라는 거죠.”

    ─DJ보다는 JP가 더 낫다는 겁니까.

    “그럼요. 참 잘못됐죠. JP가 됐다면 우리나라 기틀이 딱 섰거든요. 이번에 누가 대통령이 됐든 간에. 그러면 역사가 굉장히 바뀌었을 테고. 첫째로 이회창이라는 사람이 안 나타났겠죠(웃음). JP가 대표였으니까.”

    최근 YS의 차남 현철(賢哲)씨와 한나라당 김기춘(金淇春) 의원이 내년 총선에서 경남 거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현철씨는 한나라당 공천 여부를 떠나 반드시 출마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철씨가 내년 총선에 거제에서 출마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는데요.

    “나는 거제에서 출마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고향이고. 내가 이담에 죽으면 거기 묻힐 거거든요. 어머니 산소 밑에. 나는 국립묘지 안 갈 생각이거든. 내 책(자서전)에도 썼지만 원래 고향에 묻힐 생각이거든요. 나는 드골이나 미테랑이나 이런 사람들을 굉장히 존경하는 사람이요. 미테랑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인데, 이 사람들이 전부 고향에 묻혔거든요. 참 보기 좋더라고. 고향에 묻히는 것이. 아, 고향이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그래서 (현철이가) 거기서 나오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현철이가) 당선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고, 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현철씨가 총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게 언제쯤이었습니까.

    “한 1년쯤 된 게 아닌가 싶어요.”

    ─현재 김기춘 의원 지역구인데요. 김의원이 상도동을 방문해 “지역구에 출마 안하고 비례대표로 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해 김의원은 “지역구를 포기하고 비례대표를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내년 총선 때 경선에 나갈 것이고 지역구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반박하고 나섰는데요.

    “김기춘 의원이 그리 말을 했죠. 내가 공천을 줘서 당선된 사람이거든요.”

    ─김의원이 상도동에 찾아와서 그 얘기를 했다는 겁니까.

    “어, 나한테 와 가지고. 금년 초까지 그랬죠.”

    ─지역구를 현철씨에게 주겠다고요.

    “‘김현철 소장이 나오면 나는 전국구로 가게 해 주십시오. 좀 조언을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기에 내가 알았다고 했지. (김기춘 의원이) 계속 그리 말해 왔어요. 금년 초까지는 그랬는데, 요새는 오지 않으니까 모르지.”

    ─현철씨의 한나라당 후보 경선 참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지구당 위원장 중심으로 돼 있잖아요. 참여고 뭐고 없지 뭐.”

    ─그럼 무소속으로 출마한다는 얘긴가요.

    “아니요. 그것은 아니죠.”

    ─정치적인 상황을 봐 가며 결정한다는 건가요.

    “그렇죠. 거제에서 출마하는 것은 분명하고.”

    ─6개월 전부터 현철씨가 거제에 내려가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요. 전직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어떻게 선거를 도와주실 건가요.

    “아이고, 아이고, 말이 되나. 그것은 마, 그만 하자.”(웃음)

    ─8월초 거제로 휴가를 다녀오셨는데, (현철씨의) 사전 선거운동을 하고 오신 게 아닙니까.

    그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게 무슨 운동이고?” 하더니 터지는 웃음보를 참지 못했다.

    ─그때 상황을 봐 가면서 판단하고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죠. 거기(거제)도 내가 아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까.”

    YS는 인터뷰 내내 국가기밀에 관련된 미묘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질문에도 솔직하게 답변하는 듯싶었다. 그에게 가장 가슴 아프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역시 현철씨 문제일 터. 현철씨가 ‘소통령’으로 군림한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전혀 듣지 못했는지 물어보았다.

    “에이. 그것은 다 듣지요. 내가 무슨 말을 못 들어요? 그것과 관계없이, 내가 제일 서운한 게,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 중에 그후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YS한테 이렇게 건의했는데 안 듣더라’고.”

    “현철이 얘기는 고만 하자고”

    ─현철씨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건의했다는 겁니까.

    “그거 다 거짓말이라고. 나한테 그런 얘기(직언)를 한 적이 없어요. 또 지가 전혀 관여 안 한 일도 지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한 것처럼 말을 하는데, 참 이상한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군사정권 시절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아들들은 당시에 나이가 어리기도 했습니다만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반면 민주화시대 지도자인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은 재임 중 여러 가지 불미스런 일에 연루됐습니다.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현철이 얘기는 고만 하자고.”

    변호사 출신으로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P씨는 사석에서 필자에게 “권력에 한번 맛들이고 나니 그곳에서 발을 뺀다는 게 쉽지 않았다. 선거 때만 되면 당선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국회의원을 한번 해보니 돈과 명예와 지위가 보장된 변호사가 하찮아 보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남성에게 권력이란 무엇일까.

    ─권력의 맛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지난 정권의 한 실세가 사석에서 “권력의 맛이란 돈 맛과 여자 맛”이라면서 “정권이 끝나는 5년 후에 감옥에 가더라도 이대로 살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는데요.

    “하하하. 그럼, 그 사람 감옥에 갔겠네.”

    ─돈 많은 남자들 중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안달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하이고,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돈 많이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주영이 한다고 할 때 ‘부와 권력을 다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해줬죠.”

    ─정치인을 픽업할 때 돈 많은 사람을 선호하지 않았습니까.

    “그거(돈)와는 관계가 없어요. “

    ─왜 그러셨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을 정치에 끌어들여 정치자금을 받아 쓸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저 사람들이 돈이 많으니까 돈을 받아 써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원래 돈이 많은 집안이라면 상관없지만.”

    ─DJ정권 때 당직자로 있다가 청와대 고위직에 발탁된 인물을 만나보니 거의 고개가 끊어질 정도이던데요.

    “(목에) 깁스를 했어?”(웃음)

    ─청와대에 들어가면 다들 그렇게 됩니까.

    “권력의 자리에 가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돈하고 권력 두 가지를 다 가지는 것엔 반대야. 돈과 권력을 동시에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사적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누가 제 남편을 대통령시켜주지도 않겠지만 저는 청와대에 들어가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개인의 일상생활이 포기된 상태잖아요. 김대통령이야 본인이 원해 대통령이 됐지만 부인 손명순 여사는 ‘따라 들어가는’ 상황이었잖아요. 어떻게 보면 갇혀 지내는 것 아닙니까. 손여사께서 영부인 안하고 싶다든가, 이런 고충을 토로한 적은 없습니까.

    “그런 얘기는 안 했어요. 가끔 내가 이런 얘기를 해요. ‘여보, 우리 대통령까지 지냈어. 그 이상 생각할 거 하나도 없어’. 그 사람도 가끔 나보고 거꾸로 ‘당신은 대통령까지 했고 나는 영부인까지 했잖아. 우리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고. 특히 나보고 (집사람이) 주의를 주는 것 중 하나가 인터뷰하지 말라는 거지. ‘당신 조용히 있지, 인터뷰는 왜 또 하노’ 하기에 ‘맨 하는 이야기 하는 거지’ 하고 대답했어요. 또 ‘정치인을 무엇 때문에 만나느냐’고 물으면, ‘우리집에 온다는 사람을 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내가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오는 건데’, 그렇게 말해줘요. 그런데 요새는 그런 얘기 안 해요.”

    ─손여사께서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우리 집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친구도 만나고 집에 초대도 하라고 해도 잘 안해요.”

    ─손여사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집에서 주로 성경 보고요. 텔레비전은 거의 다 봅니다.”

    ─드라마 같은 거요?

    “전부 봅니다. 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요. 그런데 나는 텔레비전 안 보거든요. (텔레비전은) 거짓말만 하니까 보지 말라고 해도 ‘아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봐야지’라는 이유를 대면서 다 봅디다.”

    ─드라마를 보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시나요.

    “그런 얘기는 안 해줘요. 감출 일이 있는지. 재미있다고도 하는데. 나는 잘 몰라요.”

    ─청와대 내에서 외로운 적이 있었습니까.

    “아. 그…, 외롭지. 외로웠지. 자유도 없고….”

    ─대통령이 되기 전, 청와대에 자유가 없다는 사실은 오랜 정치생활을 통해 예측하실 만도 했을 텐데요.

    “나는 중학교 때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목표를 세웠잖아요(웃음). 대통령 그만두고 돌아올 때 ‘자연인으로 간다. 참 편하게 살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무 데나 가고 싶은 데 가고 말이지. 붓글씨나 쓰고 지내겠다 말이야. 그런데 나와 보니까 안 그래. 완전 자유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대통령 하는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안 하기는, 사실인데 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자유인데, 자유를 위해 목숨도 바치는데 뭐, 나는 자유가 없이 산 거지. 그것은 마, 다음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 주고 싶어요.”

    현재 정치권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치닫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정치권에 대해 ‘정치 9단’인 그의 ‘예측’을 들어봤다.

    “지금은 예측불허예요. 좀 더 봐야겠어요.”

    ─뭔가 결정되는 시기가 언제쯤이라고 보십니까.

    “10월까지지. 선거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진퇴를 분명히 해야 하거든.”

    ─내년 총선에서 관심의 초점은 영남지방일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산인데, 노무현 대통령도 내심 부산·영남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노대통령이) 되게 관심이 많다고 봐요. 부산 쪽은 상당히 미묘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요. 그쪽에 5공, 6공 사람이 많거든요. 내년 총선 때 세대교체 바람이 굉장히 불 거요. 선거민심이란 게 아침과 저녁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 가봐야 알아요. 좌우지간 지금은 몰라요.”

    YS와의 인터뷰는 5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피로한 기색도 엿보이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명순이 사랑해” 하고 아내 손을 꼭 잡고 친구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비치고, 미국에 있는 세 딸이 엄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샘이 난다는 이야기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YS.

    배드민턴을 치러 가는 길에 만나는 동네 주민들과 나누는 인사가 즐겁고,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와 하루에 두어 번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주고받는 ‘수다’가 생활에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고 고백하는 그에게서 전직 대통령의 ‘딱딱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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