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3월 정찬용 대통령인사보좌관(오른쪽)과 문재인 민정수석이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과 관련한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2003년 말 개각계획을 밝힌 직후 청와대 누군가가 ‘장관수행평가 결과’를 언론에 흘렸다.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이 ‘꼴찌’로 나왔다. 윤 장관은 자진 사퇴했다. 잘리는 것도 서러운데 불명예까지 덮어쓴 셈이다.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국회 본관에 들어서는 허 장관은 ‘성적표’ 질문을 받자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처럼 장관들 벌벌 떨게 하는 장관평가가 청와대 인사보좌관 업무 중 하나다. 정 보좌관은 12월8일 “나는 600여명의 장관 후보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으며, 1개 부처당 30여명의 후보군이 있다”고 말했다. 인사보좌관은 장·차관을 비롯한 주요 공직뿐 아니라, 국내 공기업 인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부산 문재인, 광주 정찬용’은 대통령이 광주에서 인사치레로 한 말은 아니다.
노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인 송기인 신부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재인이, 호철이(청와대 이호철 민정1비서관)만 5년 내내 대통령 곁에 있으면 안심이야.” 문재인 수석은 권력을 ‘사용(私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광주에서는 정 보좌관이 그런 평가를 받는다. 그는 광주일고-서울대 문리대를 나와 경남 거창고 교사, 광주 YMCA 사무총장을 지냈다. 젊었을 때 집안에서 “사업을 하자”는 얘기가 나오자 그는 “난 돈 벌 줄 몰라. 돈 몰라”하며 손사레를 쳤다.
정 보좌관에겐 사업을 하는 7살 아래 남동생이 있다. 두 사람의 우애는 남다르다. 그런데 요즘 정 보좌관은 몇 차례 동생을 불러 조심스러운 얘기를 꺼냈다. 첫 번째는 소위 증권가의 ‘정보지’가 발단이 됐다. “증권가 찌라시에 이런 게 있던데… ‘대통령인사보좌관의 동생이라는 정찬석이라는 사람이 여러 기관에 인사 리스트를 들고 다닌다’는 내용인데… 우리 가족 중에는 그런 이름이 없으니까 혹시 네가 그런 오해를 산 것은 아닌지 해서.” 동생은 펄쩍 뛰었다. 동생은 “불량한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음해성 작품이니 무시하셔도 된다”고 말했다. 정 보좌관은 사실 무근임을 확인한 뒤 안심했다.
그러나 두 번째 발단은 ‘정보지’가 아닌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보고’였다. 민정수석실은 정 보좌관 동생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몇 가지 조사를 한 뒤 정 보좌관에게 보고를 한 상태였다. 정 보좌관은 다시 동생을 불렀다. 정 보좌관은 다짜고짜 “네가 모 대기업에 가서 특정 업체의 물건을 구매해달라는 압력을 넣었느냐. 되지도 않는 장비를 강매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동생은 다시 “억울하다”고 말했다. 동생은 또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동생의 설명을 들은 뒤 정 보좌관은 민정수석실에 “다시 조사해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정수석측이 또 다른 실세인 인사보좌관의 동생을 조사해 당사자인 인사보좌관에게 보고를 해왔다는 점에서 단순한 해프닝은 아니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다. 일종의 ‘경고’ 의미도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동생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보고
무역회사인 K사의 대표이사인 정 보좌관의 동생은 2003년 9월1일 미국 실리콘 밸리에 본사를 둔 IT기업인 S사에 채용돼 이 회사의 서울지사에 근무하게 됐다. 직함은 ‘아시아·태평양 영업담당 본부장’. K사 대표이사직도 그대로 유지했다. S사는 주로 인터넷통신 성능을 계측하는 장비를 판매하는데 한국 내 상당수 초고속 인터넷 통신사들, 공기업들이 수요처로 알려져 있다. 정 보좌관의 동생은 S사 영업본부장에 임명된 뒤 모 공기업을 찾았다. 이 공기업은 자신들의 IT관련 사업현황에 대해 그에게 브리핑해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