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2월 개성공단 건설 공동협력 사업자인 한국토지공사와 현대아산의 개성공단 육로답사팀이 탄 버스가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고 있다.
당시 한미 양국군 지휘부는 절단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이 도발할 경우 군사분계선을 넘어 연백평야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병현 전 합참의장 등 당시 연합작전 관계자들은 이후 회고록과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취할 공격행위의 규모와 형태에 따라 개성까지 보복범위에 포함시킬 것을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기회 삼아 휴전선을 예성강까지 북상시킴으로써, 군사대치선이 서울에서 지나치게 가까운 현재 상황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세에 눌린 북한군은 정찰활동 말고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고, 한미 양국군의 작전은 별다른 무력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개성을 점령하고 휴전선을 북상시킨다는 유사시의 작전개념 또한 실현되지 못한 채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군사대치선을 임진강에서 예성강으로 옮긴다는 당시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고 있다. 판문점에서 개성 구시가지 사이의 평야지대와 주변 산지에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 지상군 전력이 상당부분 북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한미 양국군의 군사작전에 의한 것은 아니다. 현대아산과 한국토지공사가 개성시 전체와 판문군 일부 2000만평에 걸쳐 진행중인 ‘개성공업지구 개발사업’이 총소리 한번 없이 ‘휴전선을 밀어올린’ 주인공이다.
한반도 최고의 전력 밀집지역
판문점을 사이에 두고 개성과 문산을 연결하는 통로는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군사전력 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철원-포천 회랑, 동해안 도로와 함께 유사시 남하하는 인민군 지상전력의 대표적인 이동경로가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38선이 군사분계선이었던 한국전쟁 당시에는 철원-포천 회랑이 서울과 가장 가까웠지만 현재는 개성-문산을 통해 훨씬 빠르게 서울에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주공격 루트다.
반대로 한미 양국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경우를 가정하면 개성은 평양으로 가는 핵심 교두보다.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평양과 개성은 자동차로 불과 두시간 남짓 거리다.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개성 지구와 황해북도 일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 평양까지는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인민군 지휘부는 이 지역을 중부나 동부전선에 비해 중점적으로 관리해 왔다. 주요지휘관 시범교육도 주로 이 지역 사단장들을 중심으로 진행할 정도라는 것. 1970년대 후반 오진우 당시 인민무력부장은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작전교육을 실시해, 개성 전선에 자신이 외국에서 보고 온 대전차 철조망 장애물을 설치하도록 지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서부전선의 최고 요지인 이 지역의 인민군 전력밀도가 엄청났으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개성 시가지를 포함해 이 지역을 관할하는 인민군 부대는 2군단 6사단. 6사단은 크게 4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 탱크대대와 경보병대대로 구성된다. 이들 대부분은 개성과 판문점 사이의 벌판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을 겨누고 있는 62포병여단 장사정포가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고, 1990년대 말에는 개마고원 지역에 있던 64사단이 이 곳으로 옮겨져 국도 1호선(남북 연결도로) 주변에 배치됨으로써 한국군 정보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최고사령부와 군단사령부
주목할 것은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개성공단 건설사업의 부지가 바로 이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003년 6월 1단계 사업부지 착공식이 열린 개성공단 조성사업은 판문점과 개성 사이의 벌판 2000만평에 공업단지 800만평과 배후도시 1200만평을 건설한다는 계획 하에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