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용 :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서 국내로 들어올 때 국민에게 공약을 한 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27년간 내려온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해서 거기에다 정권을 넘기겠다는 것이었어요(1941년 제정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는 귀국 후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비상국민회의가 1946년 2월1일 결성됐습니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결성식이 열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제가 가장 나이 어린 대의원이었습니다. 연도에 기마경찰들이 쫙 늘어서 있는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사로 치러졌죠.
후에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씨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됐는데, 회의 시작 무렵 미술가인 고희동(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며, 4·19 이후에는 민주당 소속 참의원 역임)씨가 ‘긴급동의’를 했어요. “지금 시국이 긴급한 상황이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 조직을 오래 끌지 말고 이승만·김구 두 분에게 전권을 위임, 새로운 정부조직(최고정무위원회)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어나 “아니, 세상에 임시정부를 긴급동의로 세우는 나라가 어디 있냐”고 반대했지만, 고희동씨는 “빨리빨리 해야 된다”며 긴급동의안을 읽었어요. 내 기억에 당시 대의원이 202명이었는데, 102명의 도장을 받아서 내놨습니다. 그렇게 통과됐던 거예요(1946년 2월2일자 신문에는 201명 초청에 164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2월3일자에는 권동진 외 100명의 연서로 이뤄졌다고 되어 있다). 나중에 내가 나갈 때 뒤에 앉아 있던 항일 국어학자 이극로씨가 잘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줍디다.
박 : 그것이 첫 회의였습니까?
강 : 그렇지요. 그날 저는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새 정부를 세우면서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는 거죠. 우리가 정부를 세우는 날인데, 당시 미군정 책임자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뉴맨인가 하는 이름의, 별로 계급도 높지 않은 사람이 참석했을 뿐이에요(당시 신문에는 대령급 인사로 나와 있다). 그 사람이 군정사령관과 군정장관의 축사를 대독했어요. 그런데 그 축사란 게 ‘국민들은 굶고 있는 형편에 당신들은 여기에서 뭐 이런 짓을 하고 있냐’는 내용이더라고요. 축하하러 온 게 아니라 비꼬러 나왔던 겁니다.
박 : 그때 임시정부와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미군정은 강력한 반탁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임시정부 요인 경호원들의 무기를 압수하기도 했고, 김구 선생을 미군정으로 불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죠.
미군정과 臨政의 기싸움
강 : 사이가 안 좋았어요. 미국은 임시정부가 들어오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니까. 미군정은 임정이 들어오려면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임정은 조직을 전부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 이름으로 비상국민회의를 여니까 미국 사람들 보기엔 약속위반이었던 거죠. 비꼬는 듯한 연설을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미국으로선 그 사람들을 모아 새 정부를 만들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인 버치 중위가 왔다갔다하면서 만든 게 민주의원(정식 명칭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입니다. 28명인가, 30명인가로 만들었어요(민주의원 회의 참석을 거부한 여운형을 포함해 28명). 이승만 박사가 의장,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부의장을 했는데, 내용을 보면 이승만·김구 두 사람이 다 한 겁니다. 그때 국민들은 김규식 박사를 포함해서 ‘3영수’라고 불렀는데, 실제로는 두 사람에게 위임했기에 영 마뜩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