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범학교 재학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입학성적이 상위 40%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관비생(官費生)이라 하여 학비 전액 면제와는 별도로 매월 7원의 생활비를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급받았다. 당시 관공서 하급직원의 월급이 5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반면 생활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학생은 사비생(私費生)이라 불렸다.
관비생은 졸업 후 4년간 의무적으로 교사직에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사비생의 교사 의무복무기간은 2년이었다. 신상묵씨의 대구사범 5기 동기인 송성욱씨는 “신상묵씨는 사비생이었다”고 밝혔다. 1938년 6월 교사에 임명됐으니 1940년 6월 이후엔 본인이 원할 경우 교사직을 그만둘 수 있었다는 얘기다.
3000명 모집에 8만4000명 응시
1940년 2월 일본군은 조선에서 ‘조선특별지원병’을 공개 모집했다. 지원병은 일종의 직업군인. 이 제도는 1938년 처음 시행됐는데 자원해서 일본군이 된다는 점이 강제징병과 달랐다. 소학교 졸업 학력이면 아무나 지원할 수 있었는데 매년 수백 명의 조선인이 이 제도를 통해 일본군인이 됐다. 1940년 2월엔 모집정원 3000명에 무려 8만4000명의 조선인이 지원병에 지원했다.
지원병 지원자들은 자신의 연고지역에서 국어(일본어), 작문, 산술 등의 필기시험과 체력검사를 치렀다. 선발된 지원병들은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집결해 신병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해엔 훈련소 규모가 적어 3000명을 한꺼번에 선발하지 못했다.
지원병에 합격하면 수개월 동안 훈련소에서 일종의 신병훈련을 받은 뒤 각지의 일본 군대에 배치되어 일반적인 일본군인처럼 진급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특별지원병이 일본군 하사관이나 장교가 되는 길도 활짝 열어두었다”고 선전했다.
일본군 연구에 정통한 성균관대 신주백 교수에 따르면 일제시대 일본군의 계급은 이등병-일등병-상등병-오장(한국군의 하사급)-군조(중사급)-조장(상사급)-준위-소위-중위-대위-소좌(소령급)-중좌-대좌-소장-중장-대장으로 돼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 경찰이나 지원병은 중국이나 태평양 전방의 최전선에 배치될 확률이 적어 특히 인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1940년 초 조선총독부는 ‘지원병 열풍’에 크게 고무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지원병 모집 관련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춘원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1940년 3월2일부터 5회에 걸쳐 조선특별지원병을 칭송하는 글을 ‘매일신보’ 1면에 싣기도 했다.
일본군 지원병 합격자 명단에 ‘辛相默’
1940년 7월25일 조선특별지원병 1차 합격자 1415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이 명단은 ‘매일신보’에 게재됐다. 신상묵씨는 전북지역 합격자 명단 맨앞에 나와 있다.
신상묵씨는 화순 청풍소학교 훈도로 재직중 조선특별지원병에 응시, 합격하자 교직을 사임하고 지원병 훈련소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교직 의무복무기간을 채운 상태여서 별 문제가 없었다. ‘매일신보’에 게재된 일본군 지원병 합격자 ‘전북의 辛相默’이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특별지원병 합격자는 거의 대부분조선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침에 따라 신상묵씨를 비롯한 모든 조선인 지원병 합격자는 훈련소 입대 후 반드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