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기는 초고속 승진이 두렵기도 했다. 문과에 급제하자마자 사간원정언(1515. 11), 홍문관수찬(1516. 3)을 거쳐 홍문관교리(1517. 2)를 했고, 불과 여섯 달 만에 세 단계를 뛰어넘어 홍문관전한(1517. 8)으로 승진을 거듭했을 때 다들 부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두려웠다. 불과 2년 만에 종6품의 정언에서 홍문관전한(종3품)이 되었으니 동료가 시기하고 선배가 견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뜻하지 않게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처음 임명되었을 때, “헛된 명예로 세상에 알려지기”보다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무너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를 기약하지 않았던가. “이왕에 이 길로 나아가려면 문과를 거쳐 출신(出身)하지 않을 수 없다”던 내 탄식 어린 다짐이 바로 그것이었다(‘정암선생문집’ 부록 권5, 연보).
그러나 대사헌의 자리는 달랐다. 경연석상에서 성리학의 이념을 해석하는 과정에 정치를 비판하고 개혁안을 제시하는 홍문관원이나, 유생의 교육을 맡는 동지성균관사(1518.7)는 그래도 ‘경국대전’에 면책특권이 보장된 활동이었다. 내 정적들이 드러내놓고 나를 공격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무백관의 치적(治積)을 조사·규탄”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경국대전’ 吏典 / 京官職) 사헌부의 수장이 되었을 때, 나는 권력의 자기장(磁氣場)으로부터 더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조정을 공론 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게끔 만들고
수레가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지날 때까지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앞서가는 압송관이 지나치게 길을 재촉하는 것이 불길하기는 했다. 그런데도 나는 “정암(靜庵, 조광조)을 다시 부르라”는 전하(중종)의 파발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부처(付處), 즉 정상을 참작하여 배소(配所)로 가는 도중인 천안 근처에라도 머물게 하는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전교가 내려올 것으로 기대했다. 아, 그런데 7일의 강행군 끝에 지금 화순 근처의 너릿재고개를 넘으면서 그러한 희망과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주동자인 남곤을 이조판서로, 이장곤을 병조판서로, 그리고 심정을 지의금부사로 임명했다고 한다. 인사권과 군·경찰권이 저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대간들도 전면 교체되었고, 나를 변호하던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안당 등도 언제 파직될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물론 ‘반정’세력 쪽으로 줄을 잘 섰다는 이유만으로 ‘공신’ 행세 하는 자들을 몰아내고, 공자의 가르침을 아는 ‘사림들’을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끗을 노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소인배들에게 관직을 맡겨두고서 이 나라 정치가 어떻게 잘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형은 형다워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위로는 나라의 법도를 함부로 고치고, 가운데로는 전하의 조정을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야 할 도리를 무너뜨렸다”는 생원 황이옥 등의 상소다(‘중종실록’ 14/12/14).
도대체 저들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기나 한단 말인가? 세조와 연산군이 흐트러뜨린 법도를 바로 세우고(단종 생모의 능(소릉) 복권, 1616.3), 조정을 ‘반정공신’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 공론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게 만들었고, 전하로 하여금 경연석상에서 요순의 정치를 함께 궁구(窮究)하게 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그릇된 습속”이자 “이단”행위인(‘중종실록’ 13/8/21) 소격서에 제사지내는 관례를 혁파함으로써 모두들 “눈을 비비고 발돋움하여” “순수하게 다스려지는 나라”(‘중종실록’ 13/8/1)를 바라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인가(소격서 폐지, 1518.9).
저들은 우리가 길을 갈 때면 도성의 남녀노소가 모두 말 앞에 늘어서 절하며 “우리의 상전(上典)이 오셨다”고(이이, ‘율곡전서’ 경연일기) 기뻐하던 모습을 보지도 못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