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서 ‘150일 전투’가 벌어진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운의 후계작업과 맞물린 것이다. 150일 전투엔 ‘시장’을 제한하고 ‘계획’을 되살리겠다는 북한 당국의 의지가 담겨있다. 시장 통제와 노력 동원을 통해 경제행위를 ‘계획’에 의해 조직하겠다는 것이다. ‘속도전’은 북한식 ‘계획’의 진수(眞髓)다.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경제는 국가재정에 의존한다. 1990년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북한의 재정은 붕괴했다. 북한은 줄어든 재정으로 중공업, 군수공업을 관리하면서 기업, 기관, 주민에겐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요구했다. 시장을 허용한 2002년 7월의 7·1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재정난을 덜겠다는 궁여지책(窮餘之策).

노동시장
북한경제를 폐쇄경제, 사회주의경제로 보는 건 잘못된 통념이다. 소비재와 생산재를 사고파는 시장은 물론이고 노동시장, 자본시장도 등장했다. 자본가가 나타났으며 임노동자와 소작농이 경제행위를 한다. 노동력의 상품화, 즉 노동시장의 등장은 시장화가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진행됐다는 뜻이다.
탈북자 B씨는 함경북도에서 소작농으로 땅을 부쳐 먹고살았다. 개인이 경작권을 소유한 소토지에 고용돼 일한 것이다. 낮은 수준에서 지주-소작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는 “기업소엔 일감이 없었다. 밥을 먹으려면 소토지에서 일해야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먹고살 만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재정난은 심각했다. 돈이 바닥나 국가는 기업소에 자본과 자재를 대줄 수 없었다. 국가 ‘계획’만으로는 경제를 운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국은 개인에게 돈을 받고 경작권을 나눠줬다. 국가는 주민들에게 받은 돈을 ‘계획’의 영역인 중공업과 군수공업을 유지하는 데 썼다.
제조업에선 ‘가공주’가 등장하면서 자본가-임노동자 관계가 나타났다. 가공주는 개인수공업자를 가리킨다. 가공주는 생산수단, 생산물을 사적으로 소유하면서 임노동자에게 급여를 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노동력을 사고파는 노동시장을 착취의 도구라면서 경멸했다.
함북 청진시 출신의 탈북자 C씨는 재봉일을 하면서 가공주에게 급여를 받았다. 기업소에 돈을 내고 출근을 면제받은 뒤 옷을 만들었다. 기업소에 납부금을 내고 개인사업을 하거나 다른 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8·3노동자’라고 부른다.
시장화의 결과로 인플레이션도 거셌다. “국가에는 돈이 없지만 개인에게 국가의 2년분 예산이 깔려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A씨는 “국가에서 받는 돈은 월 1500원에 불과했다. 그 돈으로는 쌀 1kg밖에 못 샀다”고 말했다. ‘계획’의 영역에서 일하면 소득이 물가상승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계층은 교수, 교사, 의사, 간호사처럼 ‘많이 배운’ 전문직이라고 한다. 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은 “김일성대 교수가 국가에서 주는 월급으로는 먹고살 수 없어서 부업으로 호구한다는 얘기를 평양의 지인한테 들었다”고 전했다.
가공주와 임노동자
북한에선 자본가를 ‘돈주’라고 부른다. 재산이 1만달러가 넘어야 돈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수십만달러를 가진 돈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중국과의 무역 혹은 되넘기장사(물건을 사서 곧바로 다른 곳으로 넘겨 파는 장사)로 부를 쌓은 돈주는 중간상인을 고용하고, 가공주를 거느리기도 한다. 명목상 국가가 소유한 외화벌이 회사의 실제 주인이 돈주인 예도 많다.
돈주에 고용된 중간상인은 일용직노동자인 삯바리, 뻘뻘이를 고용해서 물건을 운반해 소매상에 넘긴다. 고용-재고용 관계도 나타난 것이다. 중간상인들은 중국 상품의 가격과 동향을 점검해 재화의 수요, 공급에 따라 시장가격을 정한다. 국가가 가격을 정하는 경제시스템은 더 이상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 식당 목욕탕 노래방 같은 서비스업도 운영권이 개인에게 넘어갔다. 하도급과 분업도 이뤄진다. 큰 가공주가 작은 가공주에게 일감을 나눠주는 것이다.
돈주와 간부의 유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자력갱생을 선서한 사람이 버글대는 곳. 국가가 관료에게 돈을 주며 일을 시키지 않고, 돈을 독립적으로 벌어서 살고, 정해진 돈을 국가와 상부에 입금해야 하는 곳. 그래서 영웅이 되고 이런저런 훈장을 받는 곳이 평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