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6월25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골목상가를 방문해 민생탐방을 하던 중 길에서 마주친 대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야당의 시각은 청와대의 설명과 사뭇 다르다. 김대중 정부 때 핵심인물이었던 야권 인사는 “권력 초기, 위기에 빠진 이 대통령이 국면전환을 위해 새로운 어젠다를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그는 “지금 상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5년 7월 한나라당에 제안한 대연정(大聯政)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던진 화두를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담판과 연결한 이 인사의 분석은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정치쇼에 불과하다”고 일갈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여권은 중도, 실용, 서민, 소통을 국정의 키워드로 잡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진다. 6월8일 오후 청와대에서 정정길 대통령실장, 맹형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이명규 의원(한나라당 전략기획본부장)이 만났다. 이 의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서류 한 묶음을 꺼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정국을 분석하고 대처 방안을 담은 당 차원의 보고서였다. 이 의원이 설명하던 중 청와대 측과 가벼운 언쟁이 오갔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국민들이 이 대통령에 대해 강한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은 노 전 대통령과 이 대통령의 이미지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서민 대통령’, 이 대통령은 ‘부자 대통령’ 이미지가 고착돼 있다. 이 대통령은 이미지부터 바꿔야 한다.”(이명규 의원)
“무슨 소리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부가 추진해온 정책의 70%가 친(親)서민 정책이다.”(청와대 측)
“그건 청와대 생각이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이명규 의원)
전략기획본부의 보고서엔 구체적인 현실 인식과 대응 방안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의원은 “보고서를 보여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그건 안 된다”고 거절했다.
“박희태 대표와 안상수 원내대표에게도 같은 내용을 보고했지만 보고서는 보여만 주고 다시 가져갔다. 자아비판이 담겨 있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A4용지로 10쪽 분량인 이 보고서는 냉철한 자아비판으로 시작한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 추모 물결이 전국을 뒤덮은 이유가 뭐냐. 노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잘해서가 아니다. 이 대통령에 대해 쌓인 불만과 실망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좋아하지 않지만 정권교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이 후보에게 표를 던진 국민이 적지 않은데, 이후 그들을 전혀 껴안지 못했을뿐더러 기존 지지층도 다 놓쳤다. 이 대통령의 이미지를 ‘서민 대통령’으로 바꾸는 것이 국민 속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국민은 정치적으로 이성보다 감성, 포퓰리즘에 익숙하다. 따라서 이미지화할 정책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서민이 모르면 아무런 소용없다. 여러 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민정책이다.”
한나라당 전략기획본부는 지난해 9월 촛불집회 사태가 마무리됐을 때도 청와대에 보고서를 냈다. 당시 보고서에서도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를 강조했다. 당시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종합부동산세 인하는 국민의 눈높이에 전혀 맞지 않다. 그런데도 정부 출범 초 종부세 인하를 시도했다. 그것이 결정타였다. 완전히 한 방 먹었다. ‘부자 정당’ ‘부자 대통령’ ‘친기업’ 이미지가 굳어졌다. 경제논리만으로 모든 문제에 접근해선 안 된다.”
이 의원은 “1차 보고서는 묵살되다시피 했으나 비슷한 내용의 2차 보고서는 청와대가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 실장은 2차 보고서를 받은 이튿날 이 대통령에게 이 보고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고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 직후 이 대통령은 친서민 행보에 나섰다. 이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는 곧바로 청와대와 한나라당에 영향을 미쳤다.
7월10일 윤진식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청와대 정책소식지에 ‘서민 여러분의 생활, 이렇게 달라집니다’라는 글을 올려 정책 방향을 설명했다. 한나라당에서도 친서민 정책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중산층을 두껍게, 서민을 따뜻하게
이 대통령이 최근 강조하는 키워드가 한나라당의 아이디어라는 이 의원의 주장과 관련해 이 대통령과 자주 독대하는 정부의 한 고위인사는 “당에서도 기획했겠지만 그것은 이 대통령의 오래된 지론”이라고 말했다. 이동관 대변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
“보고서야 당에서도 올라오고 홍보기획관실이나 정무수석실에서도 내고 그러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종합해서 대통령께서 결정을 내리신 거고요. 원래 대선 때 우리 구호가 중도실용 아니었습니까. 친서민도 있었고요. 기본 콘셉트는 ‘MB다움’으로 돌아가자는 거였습니다. 두 개의 축이 있는데, 한 축은 친서민, 소통 강화입니다. 다른 한 축은 원칙을 지키는 대통령이고요. 그래서 ‘MB다움’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선 것이고,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신 거예요. 누가 아이디어를 냈다기보다는 전적으로 대통령께서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철학이고 고유브랜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