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총리 후보자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프린스턴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를 마쳤다. 2002년 7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총리급’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최고의 뉴스메이커
그는 △대선 때마다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온 충청 출신이라는 점 △경제·교육 전문가라는 점 △가난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생 스토리 △전두환 정권에 맞서 서울대 교수들의 대통령직선제 개헌 서명을 주도한 개혁성 △비교적 젊고 준수한 용모 등이 더해져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 때 그는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는 대항마로 대선 출마 직전까지 갔다 4월30일 기자회견을 열고 포기한 적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정운찬 국무총리’ 구도는 정국에 다섯 가지 중요 쟁점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중도성향 총리 임명으로 이명박 정권의 ‘중도실용-친서민’ 기조에 대한 지지가 상승할지 여부다.

9월3일 서울대 강의실에서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마지막 경제학 수업을 하고 있다.
셋째, 정 후보자가 여권의 경쟁력 있는 차기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할지 여부다. 현재 여권 주류인 친이(親李)계는 정 후보자가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가 될 재목인지 눈여겨보고 있다.
넷째, 이명박 정권과 정 후보자가 서로 윈-윈 하는 화학적 결합을 이뤄낼지 여부다. 정 후보자가 ‘의전 총리’에 머물면 그의 정치적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그러나 대통령과 대립각을 안 세워도 문제, 세워도 문제가 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국정의 거의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현 시스템에서 단기필마로 들어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총리상(像)을 구현해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섯째, 이런 이유로 정 후보자는 특정 정책에서 특화된 총리 역할을 찾으려 할 가능성이 있다. 그가 자신의 지론인 ‘교육 개혁’이나 ‘세종시 수정’에 총대를 메고 올인할 경우 정운찬발(發) 드라이브는 정치권과 사회의 중심 이슈로 떠오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당분간 정 후보자는 모든 오피니언 리더의 주목을 받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뉴스메이커 중 한 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권한 행사에 현실적 제약이 따르기는 하지만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매우 중요한 공직이다. 그러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정운찬’에 대한 정보는 공중(公衆)의 궁금증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양적으로 빈약하고 내용에서도 표피적 현상만 주로 다뤄졌다.
예를 들어 ‘가슴으로 생각하라’라는 그의 자서전 외에 본인의 육성(인터뷰 등)은 적은 편이고 그의 삶을 소개하는 대다수 보도도 비슷한 에피소드의 반복이거나 정운찬 개인을 피알(PR)해주는 성격이었다.
거물로 만들어준 ‘이변’
‘신동아’는 정 후보자의 지인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정 후보자의 알려지지 않은 인생스토리’의 일단을 비교적 ‘두껍게’ 취재할 수 있었다. 사생활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이 일부 포함되었는데 이 점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국가 2인자인 총리가 되면 개인의 사소한 성향이나 언행, 습성이라도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통합 등 다양한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먼저 정 후보자가 서울대 총장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알아봤다. 사실 정 후보자를 지금의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거물급으로 만들어준 것은 ‘서울대 총장 역임’ 경력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과 ‘서울대 교수 정운찬’의 차이는 크다. 서울대 총장이 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사회적 저명성을 안겨주었고 ‘정치인 정운찬’의 상품가치를 크게 끌어올렸다.
정운찬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2002년 2월 사회과학대학 학장이 됐다. 5월8일 사외이사 겸직 등으로 논란을 빚은 이기준 당시 서울대 총장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퇴임했다. 1991년부터 전임강사 이상 교수들에 의한 총장직선제를 시행해오던 서울대는 새로운 총장 선출에 들어갔다. 비교적 젊은 56세의 정운찬 교수는 학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총장선거에 출마했다.
서울대 총장 선출은 5월28일 단과대별 교수들로 구성된 후보선정위원회에서 총장후보 8명 선정, 6월3일 후보선정위원회에서 총장후보 5명 선정, 6월20일 전체교수투표에서 다득표 순으로 최종후보 2명 선정, 교육부에 후보자 2명 보고, 국무회의에서 총장 선출 순으로 진행됐다.
정운찬 교수는 8명 후보군, 5명 후보군에 잇따라 선정된 뒤 교수 1210명이 참여한 전체교수투표(투표율 87%)에서 667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송상현(61) 법대 교수(전직 학장)는 574표를 얻어 2위에 올랐다. 한 후보 측에서 선거운동에 불공정 행위가 있었다며 이의를 제기해 개표가 2시간 미뤄졌으나 이 후보 측이 결과 승복 의사를 밝힘에 따라 개표가 이뤄지는 소동이 있었다.(‘국민일보’ 2002년 6월21일 보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7월16일 국무회의에서 최다득표자인 정운찬 교수를 서울대 총장에 임명했다.
당시 정운찬 교수가 선거에서 1위를 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5명의 후보 가운데 최연소이며 개혁적 성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정 교수가 예상을 깨고 최다득표…”(‘한겨레’ 2002년 6월21일 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신동아’ 2007년 6월호). 정 교수는 학교 행정경험 부족이 선거과정에서 약점으로 지적됐었다(‘경향신문’ 2002년 6월21일 보도). 후보들의 소견 발표에서도 차이점이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국민일보’ 2002년 6월19일).
정 후보자가 이렇게 서울대 총장이 된 것과 관련해 정 후보자와 두산그룹 오너일가 간의 특별한 인연설이 나왔다. 정치권과도 교분이 깊은 재계 인사 A씨는 “정운찬 교수가 직선 서울대 총장이 된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두산그룹 오너 일가 쪽에서 정운찬 교수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어 A씨는 “정운찬 총리 후보자와 가까운 사이인 김종인 전 의원,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정 후보자와 두산 오너 측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