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체사상탑
1960년 4·19혁명이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지 못한 상황을 지켜본 김일성은 1961년 조선노동당 4차 대회의 사업 총화에서 “남조선에서 혁명적 당을 내올 것”을 역설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과거 남로당 활동을 했던 좌익 인물 가운데 김종태를 포섭해 월북시킨 후 노동당에 입당시키고 자금 등 활동 내용을 지원했다. 남한으로 귀환한 김종태는 1964년 6월 중순경 조카 김질락과 김진환·이문규 등을 포섭해 월간지 ‘청맥’을 창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65년 11월 김질락·이문규 등과 함께 통일혁명당(통혁당)을 창당했다.
통혁당 내란예비음모 처벌
1968년 중앙정보부가 이들을 적발했고, 사법부는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하고 관련 피고인들도 중형에 처했다. 통혁당 사건 이후 북한은 관련자들을 영웅으로 대우하면서 대남 공세를 전면적으로 진행했고 이후에도 통혁당이 재건됐다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통혁당은 나중에 ‘한국민족민주전선’, 2005년 이후에는 ‘반제민전’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대남 선전기관 노릇을 했다.
북한이 남파간첩을 통해 통혁당을 준비하던 시점에 일군의 인텔리들은 별도로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하는 지하조직 건설을 준비한다. 김배영, 도예종 등이 발기한 인민혁명당(인혁당)이 그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1차 인혁당 사건’이라고 불렀다. 일부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북한과 연계를 시도한 정황은 있으나, 이들은 통혁당과 달리 상당한 자생성을 가졌다.
인혁당 사건을 둘러싸고 조작 논란이 있었지만, 훗날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조직은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중한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반국가단체조직 혐의로 중앙상무위원장인 도예종이 징역 3년형을 받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1974년 발표된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인 인혁당재건위원회 관련자들은 대규모 봉기를 준비하고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당시 재판부로부터 중형이 선고됐다.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다음 날 새벽에 사형이 집행됐다. 2007년 이후 이뤄진 재심에서는 원심 재판부가 인정한 국가변란 도모 혐의에 대해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위험성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며 관련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통일혁명당은 1965년 결성돼 1968년 적발됐다.

1980년 1월 열린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재판.
남민전은 투쟁자금 조달을 위해 ‘혜성대’라는 이름의 무장행동대를 조직해 종로1가 소재 금은방과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자택 등에 침입해 상해를 가하고 금품을 절취하는 등 강도 행각을 벌였다. 또한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왔을 때를 대비한 무장봉기를 위해 총기와 탄약을 은밀히 탈취해 보관했다. 이외에도 TNT와 뇌관 등을 불법 입수해 보관하는 등 무장 게릴라 방식 봉기를 차근히 준비하고 있었다. 또 남한에서 혁명이 성공할 경우 중앙청에 게시하기 위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기(旗)를 제작해 보관했다.
치안본부는 1979년 10월 4일부터 17일까지 84명을 검거해 79명을 구속했다. 검거 당시부터 치안본부와 검찰은 일관되게 북한과 연계된 간첩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남민전 재판기록에 따르면 조직원을 일본에 보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접선하고 그를 월북시켜 북한과의 구체적인 연계 방안을 도모했으나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이전에 조직이 검거됐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1980년대 이후 대학가에 자생한 이른바 ‘주사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김영환이 북한과 연계된 이후 결성했다. 구(舊)좌익과 단절된 최초의 대규모 신(新)좌익 지하당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권을 장악했고, 나아가 사회운동에서 주류가 된 NL(민족해방) 계열 운동의 사상·이론·조직적 지도부를 맡았다고 볼 수 있다.
민혁당은 중앙위원회 산하에 도당 격인 수도권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 등의 지역조직을 두고 당원만 100명에 달하는 대형 조직이었다. 또한 민혁당에는 RO(혁명 조직) 18개 조직, 400명의 조직원이 있었고, 산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관철할 수 있었던 사람만 3000~4000명에 달하는, 말 그대로 정전(停戰) 이후 남한 최대의 지하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