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6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채널A가 공개한 동영상이 청와대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다. ‘유쾌한 삼남매’ 제목의 동영상에는 박근혜 대통령 삼남매의 50년 전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1964년 청와대에 들어온 첫해에 찍은 동영상에는 당시 13세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녹지원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모습과 7세이던 막내 지만 씨가 누나 위에 걸터앉거나 누나를 따라 팔굽혀펴기를 따라 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대통령 남매가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 담긴 50년 전 동영상은 올 추석을 제각각 보낼 처지에 놓인 삼남매의 현재와 비교되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유쾌한 삼남매
1979년 11월 21일 오전 9시 30분. 흐린 하늘에서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한 이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 지 한 달도 안 돼 박근혜 대통령과 동생 근령, 지만 씨는 함께 청와대를 나와 서울 신당동 집으로 향해야 했다. 당시 청와대 조리사였던 손성실 한식협회 고문은 ‘청와대를 떠나는 당일 아침, 박 대통령 삼남매는 밥상을 앞에 두고 누구도 수저를 뜨지 못했다’고 전했다. 청와대를 떠나며 근령 씨는 언니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도 했다고 한다.
27세에 부모를 모두 잃고 가장이 된 박 대통령과 두 동생의 이후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근령 씨는 1982년 풍산그룹 창업자의 아들과 결혼했다가 6개월 만에 이혼하고, 198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90년 귀국했다. 지만 씨는 1989년부터 히로뽕을 상습 복용한 혐의로 여러 차례 구속됐다.
삼남매의 관계도 격랑에 휘말렸다. 고(故) 육영수 여사가 1969년 설립한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싸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1982년 박 대통령이 재단이사장을 맡은 이후 동생 근령, 지만 씨는 ‘최태민 목사가 재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망친다’고 여겼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근령, 지만 두 남매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 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철저하게 속은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라는 탄원서를 보냈다. 박 대통령은 “최 목사는 나를 도와준 사람으로 기념사업회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내 나이가 몇 살인가”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결국 재단이사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근령 씨가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이번에는 근령 씨와 지만 씨 간에 분란이 생겼다.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2000년대 들어 근령-지만 씨 양측은 법적 분쟁을 넘어 폭력까지 동원하며 육영재단의 경영권을 두고 다퉜다. 삼남매가 육영재단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면서 이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나빠졌다.
대통령의 ‘보물 1호’
육영재단 운영을 둘러싼 삼남매 갈등에도 박 대통령은 두 동생을 각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근령 씨는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하던 2000년대 중반 당사까지 찾아와 박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두 남매의 관계는 근령 씨가 2008년 13세 연하인 신동욱 씨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엉클어진다. 박 대통령은 두 사람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박 대통령 측근에 따르면, 2007년 초 근령 씨가 신씨와 약혼한 이후 계속해서 반대의 뜻을 전달했음에도 결국 혼인을 강행하자 박 대통령은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근령 씨도 언니에게 섭섭한 마음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신씨는 2009년 2월부터 박 대통령의 미니홈피에 “동생 근령 씨가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해임되는 데 박 대통령이 배후 역할을 했다”는 비방 글을 40여 차례 게시했고, 박 대통령은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신씨는 지만 씨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삼남매 분란의 중심에 섰다. 이후 근령 씨는 박 대통령은 물론 지만 씨와도 소원해졌다.
이에 반해 박 대통령은 지만 씨가 2004년 16세 연하인 서향희 변호사와 결혼할 때에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지만 씨 결혼식장에서 “이 자리에 돌아가신 부모님은 참석하실 수 없지만 저 하늘나라에서 더없이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나타냈다. 이듬해 조카 세현 군이 태어나면서 박 대통령과 지만 씨 부부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본인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근령 씨도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을 조카가 태어났기 때문. 박 대통령은 이후 늘 보물 1호로 세현 군을 꼽았다.
2011년 민주당에서는 지만 씨의 삼화저축은행 비리 연루 의혹을 끈질기게 제기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본인(동생)이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밝혔으면, 그걸로 다 정리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유력 대권 후보가 검찰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라는 또 다른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만큼 동생을 옹호하고 신뢰했다.
박 대통령은 대선 내내 동생 지만 씨 부부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2011년 서씨가 30대의 나이에 변호사 30명을 고용할 정도로 법무법인 ‘새빛’의 규모를 키우자 여러 얘기가 나왔다. ‘만사올통’(모든 일은 올케를 통하면 된다)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박 대통령의 후광 없이 저렇게 로펌 규모를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차기 대선 행보에 본격 시동을 걸던 박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로펌 운영 과정에 서씨가 많은 빚을 지자 지만 씨조차 주변에 걱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즈음 한 측근이 박 대통령에게 “서 변호사에 대해 주변에서 걱정이 많다”고 얘기하자 박 대통령은 “아직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나요? 제가 이야기를 했는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박 대통령도 올케가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 결국 서 변호사는 로펌을 접고 대선 기간에는 아들과 함께 해외에 나가 있는 등 조용히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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