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어디서 어느 정상 만나든 “통일 지지 성명 부탁해요!”

朴대통령 외교행보 맥락 읽기

  • 동정민 │채널A 청와대 출입기자 ditto@donga.com

    입력2014-10-22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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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어느 정상 만나든 “통일 지지 성명 부탁해요!”

    박근혜 대통령이 9월 24일 제69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국회가 국정감사와 예산국회로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는 9~12월. 대통령은 해외 순방으로 바쁘다. 매년 이 시기에는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을 비롯해 G20(주요 20개국),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 등 다자회의가 이어지고, 올해처럼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주요 일정 가운데 절반 이상을 외교 관련 업무에 할애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7~9월엔 캐나다와 미국 순방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보낸 49일 중 20일을 외교 일정을 소화하는 데 썼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접견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니발 카바쿠 실바 포르투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도쿄도지사, 미국 하원의원 등도 청와대를 예방했다. 중국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과 같은 주요국 경제인도 만난다. 새로 부임한 주한 대사들에게 신임장을 수여하는 것도 대통령의 몫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박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가운데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도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이다. 순방과 각종 외교 일정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대통령의 외교는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귀국의 이익에도 부합”

    “분단 70년을 돌아보면 굴곡의 역사였습니다. 이산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고,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대치 상태의 숨 막히는 긴장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고통과 긴장의 역사를 더 이상 후손들에게 물려줘선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는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10월 13일 2차 통일준비위원회 회의에서 통일을 위해 진격하자는 출정식처럼 비장한 발언을 쏟아냈다. 통일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통일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김정은 건강 이상설이나 평양 쿠데타설과 같은 북한 관련 소문은 신뢰하지 않는다. 폐쇄성이 강한 북한의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기에 설익은 정보에 따라 판단하면 오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북한 급변사태로 인한 것이든 북한이 우리 영토를 침략할 경우 그 반격 과정에서든 통일이 갑자기 닥쳐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생각지 못한 때 찾아올 통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크게 세 가지에 공을 들이고 있다. 첫째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 일이다. 갑자기 통일이 닥쳤을 때 국제사회가 한국 주도의 통일을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대선 전부터 고민해온 ‘통일 기반 구축’의 핵심이다. 9월 24일 뉴욕 유엔 총회연설장에 선 박 대통령은 15분짜리 연설의 3분의 1을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 썼다.

    “통일된 한반도는 핵무기 없는 세계의 출발점이자, 인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며, 안정 속에 협력하는 동북아를 구현하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그 자체로 유엔의 설립 목표와 가치를 구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이같은 통일 대비 행보에 대해 “각국 정상들과 회담할 때도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는 기록을 공동성명서에 꼭 첨부해서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으로 안다. 갑작스럽게 통일의 순간이 왔을 때 이것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통일을 어젠다로 제시한 것은 집권 2년차인 올해부터다. 하지만 취임 후 모든 정상회담에서 상대 정상의 한반도 평화통일 지지 의사를 확보했다. 아프리카와 남미 등 북한과 별 이해관계가 없는 국가들과의 정상회담 때도 꼭 언급한다.

    박 대통령이 통일 문제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나라는 역시 중국이다. 시진핑 국가주석과는 통일과 관련해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베트남, 라오스 같은 공산국가와의 회담에도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다.

    어디서 어느 정상 만나든 “통일 지지 성명 부탁해요!”

    박 대통령이 7월 3일 청와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 맨앞)과 정상회담을 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외국 정상에게 한반도 통일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때는 “한반도 통일이 귀국의 경제적 이익과 안보적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중국 동북 3성, 러시아 극동 지역 등은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큰 저개발 지역이다. 박 대통령은 중국, 러시아 정상들에게 “통일이 되면 북한과 인접한 이들 지역이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가령 부산에서 유럽까지 철도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먼 미래의 비전이기도 하지만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는 유인책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이 공을 들이는 두 번째는 통일이 닥쳤을 때 남한 내 갈등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통일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젊은 세대들이 통일에 대해 반감이 큰 것을 우려한다. 통일의 ‘대박’ 효과를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는 세대가 그들이지만, 정작 젊은 세대들은 통일이 되면 자신들이 치러야 할 비용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통일 헌장을 제정할 때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라”고 주문했다.

    세 번째는 통일 독일보다 큰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통일 준비를 미리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만든 기구가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다. 박 대통령은 통일준비위에 통일 이후 연금 문제, 고속도로를 포함한 국토개발 문제, 복지 문제 등 구체적인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9월 미국 순방 때 뉴욕 연구기관 간담회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출국 시간에 쫓겨 기자들에게 미리 배포한 대통령 발언을 실제로는 대통령이 하지 않으면서 이를 취소하는 해프닝이 발생한 것. 일각에서는 중국이 상당히 불쾌해할 만한 내용이었다는 분석도 있지만, 대통령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한중관계와 미중관계도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상·투자, 북핵·통일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중국의 기여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굳건한 한미동맹을 전제로 한중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가고자 하며 중국도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각에서 한국이 중국에 경도됐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한미동맹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는 이제 한국이 미국과 중국 중 한 나라를 선택하는 식의 냉전적 발상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대중 무역액이 대미, 대일 무역액을 합친 것보다 많고, 한중 FTA가 체결되면 한중 간 무역 의존도는 더 커진다. 안보 측면에서도 박 대통령은 지난해 시진핑 주석과의 첫 만남에서 최고위급 안보 대화체 신설에 합의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양제츠 중국 국무위원이 논의를 시작했다. 향후 남북관계를 협의하는 데도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시 주석은 박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북한에 우리나라가 주도하는 DMZ(비무장지대) 세계평화공원 구성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개성공단 국제화도 중국이 들어오면 속도가 붙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본 안보 축은 한미동맹이다. 대통령 당선 이후 일부 참모들은 첫 순방지로 중국을 건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미국을 택했다. 취임 첫해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접견한 인사도 미국 인사 14건으로 중국 인사(5건)보다 훨씬 많다. 한미동맹이 두터울수록, 한중관계가 발전할수록 중국과 미국에 우리나라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게 청와대의 생각이다.

    박 대통령은 미중관계가 좋아야만 남북 문제도 잘 풀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대선 전부터 내비쳤다. 대통령이 쓴 2011년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의 개혁을 유도하고자 하는 중국의 노력은 미중관계가 얼마나 협력적이냐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다. 미중관계가 발전할수록 북한의 비정상적 행태는 미국과의 관계 증진을 희망하는 중국의 입장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반대로 미중관계의 긴장은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외교게임을 시도하게 만들어 결국 북한의 비타협적 태도만 강화시킬 것이다.”

    앞길 험난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박 대통령은 미중 간은 물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도 중재 역할을 하고자 했다. 나아가 한중일 3국이 유럽처럼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통합하는 방안도 꿈꿨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역사와 영토 문제라고 봤다. 이 때문에 원자력, 사이버 안보 등 나라 간에 이견이 없는 연성 이슈부터 함께 논의해서 신뢰를 쌓은 뒤 역사, 경제, 안보 등 어려운 의제까지 논의하자고 생각했다. 이른바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이다.

    청와대는 여기에 북한까지 참여시키면 북핵 문제 해결에 별로 기여하지 못한 6자회담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북핵 문제만 논의하는 협력체가 아니라 다양한 이슈를 함께 논의하다보면 신뢰가 쌓여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였다.

    그러나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로 이런 구상은 틀어졌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중국으로 무게추가 쏠렸다. 취임 이후 한중 정상회담은 5차례나 열렸지만 한일 정상회담은 미국의 요청으로 이뤄진 한미일 정상회담이 유일하다.

    더 암울한 것은 내년 가을 총선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재집권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아베 총리의 임기는 2018년까지로 박 대통령보다 더 길어진다. 박 대통령이 자칫 한일 정상회담 한 번 못하고 임기를 마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나 안보,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한일 간 교류는 계속돼야 하지만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 정상회담은 어렵다는 박 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하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은 일본이 참여하지 않을 경우 한걸음도 나아가기 어렵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의 외교 정책 중 가장 험난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혐한(嫌韓) 기류가 거세지고, 우리 국민의 반일 감정도 그에 못지않게 커졌다. 일본 우익 ‘산케이신문’ 기사로 촉발된 갈등은 이런 양국 간 불신이 쌓인 결과다.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는 내년에도 한일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을 재점화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북한은 한국보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한다 △일본은 한국, 중국과 멀어지는 것에 대비해 북한과 손을 잡을 것이다 △북한이 남북관계 경색으로 돈줄이 끊기자 중국에 자원을 팔아넘기고 있고, 중국은 돈이 될 만한 북한 사업을 모두 끌어들이고 있다.

    절반의 성공

    이런 가설들은 남북관계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우리가 손을 놓고 있으면 북한이 미국, 일본, 중국과 가까워지고 한국은 소외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을 하지 않고서 미·중·일과 가까워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미국은 북한의 도발-보상 악순환 고리를 끊고 싶어한다.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 본토에도 위협이 된다. 일본은 그런 미국의 반대에도 북한을 선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별로 없다. 북한의 핵개발에 반대하는 중국도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을 어기며 북한에 대규모 현금을 지원하거나 투자할 수 없다는 게 대통령 참모들의 판단이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개성공단 국제화, 영유아 모자보건 지원, 비료 지원, 산림과 하천 공동 관리 등 많은 대북제안을 했다. 5·24조치와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북한이 반길 만한 것들만 골랐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고, 남북관계 개선 없이는 어느 나라도 북한과 적극 손잡기 어렵다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이다.

    박 대통령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미들파워(중견국) 외교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부산부터 북한,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유럽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 등을 연결해 잇는 제2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는 이 프로젝트에 상당히 적극적이지만 결국 북한의 참여가 핵심이다.

    미들파워 외교는 우리의 외교 위상이 경제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됐다. 공적개발원조(ODA)를 늘리고 저개발 국가에 새마을운동을 전수하는 등의 노력을 쏟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 등을 놓고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간 이해가 대립될 때 중재 역할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큰 힘이 된다.

    1970년대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외교의 중요성을 체감한 박 대통령은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고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등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일본 아베 총리는 더 막 나가고, 미국과 중국의 G2 경쟁이 심화하면서 박 대통령의 남은 3년 외교 환경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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