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도피중 검거된 최성규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총경)이 최근 정치망명을 추진중이란 설이 흘러나왔다. 그의 망명은 곧 그를 둘러싼 모든 미스터리의 진실이 묻히게 됨을 뜻한다. ‘도망자’가 ‘망명자’로 ‘신분상승’을 꾀하는 진의는 무엇인가.
‘조기귀국’에서 ‘시간 벌기’로 급선회한 최성규 전 총경과 I-589 양식
알려진 대로, 최 전 총경은 ‘최규선 게이트’의 핵심 인물. 명목상 범죄혐의는 사기(2001년 3~4월 강남 C병원의 의약 리베이트에 대한 경찰 내사 무마 대가로 최규선씨를 통해 1억2000만원 상당의 금품 수수)지만, 그는 최규선씨에 대한 청와대의 밀항 권유설과 자신의 도피과정 배후세력 등 핵심 의혹의 실체를 속속들이 아는 장본인이다. 만일 최 전 총경이 망명에 성공한다면 의혹의 실체는 영영 물거품으로 스러질 게 뻔하다. 따라서 그의 망명설은 비상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의문은 대략 세 가지. 최 전 총경이 정말 망명을 결심했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과연 망명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등이 그것이다.
국선변호인 대신 사선변호인 선임
결론부터 말하면 최 전 총경의 망명이 성공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망명신청서를 제출하더라도 사실상 망명이 허가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2002년 4월 미국으로 도피한 지 10개월 만인 지난 2월25일 LA 현지에서 LA경찰국(LAPD) 및 연방보안관 합동수사팀에 의해 체포됐던 최 전 총경은 현재 LA연방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그는 검거 당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가족에게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이 와병중인 데다 자신도 고혈압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조기귀국 가능성을 한층 뒷받침했다. 그랬던 그가 갑작스럽게 망명신청으로 선회한 까닭은 무엇일까.
최 전 총경의 변호인은 스콧 가와무라(Scott Kawamura) 변호사. 일본계 미국인으로 알려진 그는 LA의 ‘Perliss& Gross’ 법률사무소 소속이다. 한국 법무부에 따르면 당초 최 전 총경의 변호를 국선변호인이 맡았지만, 6월10일 열린 송환청문회 때부터는 최 전 총경이 직접 선임한 사선(私選)변호인인 가와무라씨로 대체됐다.
‘Perliss&Gross’는 1987년 설립돼 상사법 및 일반 민사소송, 이민 관련소송 등을 전문으로 하는 로펌. LA본사 외에 서던 캘리포니아에 지점을, 중국 청두(成都)에 현지사무소를 두고 있다. ‘Perliss&Gross’ 홈페이지에 따르면 가와무라 변호사는 1992년 캘리포니아주립대(샌디에이고)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이후 1995년까지 LA 로욜라법대(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같은해부터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이민법 전문가다.
현 시점에서 최 전 총경의 근황을 꿰뚫고 있는 이는 당연히 가와무라 변호사다. 기자는 그에게 최 전 총경 망명설의 진위 여부 등을 묻는 영문 이메일을 수차례 띄웠지만, 끝내 답신은 오지 않았다.
LA연방구치소에서 고혈압 투병
다른 한편으로, 최 전 총경의 가족을 통해 그의 심경 변화를 알아보려 7월3일 그의 집인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H아파트 101동 ○○○호를 찾았지만, 그곳에 거주중인 부인 정모(51)씨와도 연락이 전혀 닿지 않았다. 편지를 남겼지만 역시 응답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최 전 총경에 대한 퇴직금(9800여 만원) 지급이 ‘신동아’가 그의 소재를 한창 쫓고 있던 지난해 11월29일 이뤄졌고, 정씨의 미국 출국(12월19일) 역시 ‘최규선 게이트 최성규 전 총경, 어디 있나’(‘신동아’ 2003년 1월호) 제하의 기사가 나간 날(12월18일)과 단 하루의 시차밖에 나지 않는다. 정씨는 출국 후 LA 코리아타운에서 5∼6km쯤 떨어진 파크 라브레아(Park La Brea) 아파트에서 최 전 총경이 검거될 때까지 그와 함께 지낸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기자와 정씨와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양 묘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최 전 총경 집의 도시가스 검침표를 보면 1∼4월은 검침이 전혀 안 됐고, 5월은 16일에 검침이 이뤄졌으며, 6월에도 검침이 완료돼 있다. 이로 미뤄보면 정씨가 5월경 귀국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는 지난 4월 LA에서 남편을 면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전 총경 관련수사의 주체는 서울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채동욱). 검찰 입장에선 최 전 총경의 신병이 인도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그에 대한 추가수사를 하려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서울지검의 한 관계자는 “현재 ‘굿모닝시티’ 비리 수사로 최 전 총경의 망명설에까지 눈돌릴 여력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최 전 총경 검거 당시와 이후 법정에서 그와 접촉한 적이 있는 강성공 LA총영사관 경찰주재관(총경)은 7월4일 기자와의 국제통화에서 “송환청문회 심리가 재개되는 9월11일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굳게 입을 닫았다. 다만 그는 현재 고혈압을 앓고 있는 최 전 총경이 구치소 소속 의사가 처방해주는 치료약을 복용중이라 귀띔했다.
한국 법무부는 가와무라 변호사의 ‘고문 가능성’ 언급에 대해 한마디로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5월5일 한국정부의 송환요청서가 LA연방법원에 접수됐고, 한미범죄인인도협정을 근거로 현재 최 전 총경은 범죄인 인도재판을 받고 있는 단계다. 범죄인 인도재판은 단심(單審)으로 끝난다. 만일 도중에 피의자가 재판을 포기하고 송환에 동의하면 재판은 중지되며 바로 국무부장관이 인도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재판에서 송환결정이 나도 피의자가 송환에 불응, 일종의 불복절차인 인신보호영장제도를 활용해 구금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면 미국 대법원까지 3심의 재판을 거칠 수 있어 일명 ‘세풍(稅風)사건’ 주역인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의 경우처럼 송환까지 장기간이 걸릴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로선 최 전 총경의 정확한 송환시기를 가늠하기 힘든 상태다.
그렇다면 최 전 총경의 망명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이를 알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은 최 전 총경측이 미국 이민법원에 I-589 양식(Form I-589)을 접수시켰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I-589 양식의 정식 명칭은 ‘Application for Asylum and for Withholding of Removal.’ ‘송환 회피를 위한 망명신청서’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양식은 미국에 체류중인 외국인이 본국 송환시 받을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이유로 정치망명을 신청할 때 제출하는 서류다. I-589 양식이 이민법원에 접수되면 송환은 정치망명 가부를 심사하는 이민법원의 결정이 나온 뒤로 미뤄진다.
결국 관건은 최 전 총경이 I-589 양식을 이민법원에 접수시켰는가의 여부다. 취재 결과 I-589 양식은 아직 접수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기자는 6월26일 법무부에 최 전 총경의 I-589 양식 제출 여부와 조기귀국을 번복한 뒷배경에 대한 조사와 관련해 협조를 구했다.
그로부터 12일째인 7월7일 신경식(39) 법무부 검찰4과장은 “공식채널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가와무라 변호사가 망명 얘기를 꺼낸 것만은 분명하며, 오는 7월24일(현지시각) 망명에 관한 의견서를 이민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란 보고를 받았다”며 “하지만 한국 법무부는 법원에 제출된 의견서가 미국 연방검찰로 통보된 후에야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법무부의 답변은 한국 법무부 소속으로 주미한국대사관에 파견중인 법무협력관을 통해 미국 법무부에 공식적으로 사실확인을 요청한 결과물. 따라서 그릇된 정보로 볼 여지는 전혀 없다.
최 전 총경의 망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법무부에 따르면 망명신청은 법률적으로 범죄인 인도재판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인도재판은 그대로 진행된다. 다만 그가 ‘정치범’이라 주장하며 망명을 신청하면, 비록 연방법원의 송환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이민법원으로부터 망명신청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송환조치를 취할 수 없다. 즉 이민법원이 ‘정치범’ 결정을 내리면 미국법상 신병 인도를 할 수 없게 되는 것.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는 게 다수의 견해다.
전형적인 ‘시간 벌기’ 작전에 불과
미국 형사사법제도에 정통한 한 인사의 말이다. “미국 재판부가 예전에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의 ‘정치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감안할 때 최 전 총경도 망명허가를 받아내긴 힘들 것이다. 더욱이 이석희 전 차장은 정치자금 모집이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비해 최 전 총경의 공식적인 범죄혐의는 사기일 뿐이다. 최 전 총경이 어쨌든 시간을 벌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 수감생활을 했다고 해서 한국으로 송환된 뒤 수형기간이 경감되는 것도 아니므로 최 전 총경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민전문 변호사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유학·이민전문 홍영규 변호사(미국변호사)는 “최근 미국에선 I-589 양식 제출로 미국 영주권을 받으려는 시도(망명에 의한 영주권 신청)가 일종의 유행처럼 돼 있다. 주로 아프리카나 남미 출신 난민들이 많이 낸다. 얼마전 일단의 탈북자들이 I-589 양식을 제출해 정치망명을 허가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 국적의 범죄인에게 망명이 허가된 선례는 없다”며 “다만 망명신청을 할 경우 재판과정에서 최장 2년 가량의 시간을 벌 수는 있다”고 밝혔다.
강성공 LA총영사관 경찰주재관도 “누가 봐도 정치적 탄압이 분명하다면 모를까, 미국에서 타국의 범죄인이 망명에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며 “최 전 총경이 송환시기를 지연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며 이에 동의했다.
LA 한인사회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LA한인회 하기환 회장은 7월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오직 사건 의뢰인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미국 변호사들의 특성으로 미뤄볼 때 송환 지연을 위한 절차의 하나로 망명신청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한인사회에서 최 전 총경은 별 관심대상이 아니며, 그의 망명이 성공할 것이라 보는 이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최 전 총경에게 조기귀국 의사가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송환시기는 도피중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의 의사에 우선권이 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조기귀국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뿐이지 ‘송환당하지 않을 의사’와는 무관하다. 훗날을 기약하는 그에게 쥐어진 칼자루가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다는 것쯤은 그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