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전두환 집권과 미국의 ‘거리두기’

전두환 못마땅히 여기던 미국, 국보위 출범하자 파트너로 인정

  • 글: 이흥환 미국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09-22 1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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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광주의 피를 손에 묻힌 전두환의 집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집권을 막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신군부 집권과정의 약점을 움켜쥐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을 뿐이다. 전두환은 미국의 이런 ‘자제된 영향력’을 적절히 활용해 집권에 성공했다.
    전두환 집권과 미국의 ‘거리두기’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전두환 정권 탄생 과정에서 미국이 “얽혀 있기는 했지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은 전두환 정권 탄생의 주체세력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입김을 막아냈다는 의미가 된다. 결과를 봐도 그렇다.

    미국은 한국에게 무엇인가

    전두환 정권의 탄생 과정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관계의 기본틀이 어떤 얼개로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교본 노릇을 하고 있다.

    1980년대 내내 한국의 지식층은 좀체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질문을 끼고 살았다. ‘한국에게 미국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박정희의 죽음에서 12·12 군부 쿠데타, 광주의 비극,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탄생에 이르는 전 과정을 미국과 연결시켜 해석했고, 이 일련의 사태 전개에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관련돼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물론 관련설을 부인했다.

    미국은 한국에게 무엇인가? 이 오랜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미국이 박정희 죽음 이후 한국에 새로 등장한 정치세력을 어떤 시각에서 해석하고 상대했는지를 짚어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로 이어지는 향후 20년간 한국의 국가 형태와 사회모형을 결정짓는 첫 단추였고, 신군부와 미국이 이 첫 단추를 끼운 양손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한미 양국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한국에 미국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느냐를 먼저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전두환 정권 탄생과 미국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미국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과거형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미국이 지금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현재형 질문의 답을 얻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동맹국 안보가 인권에 우선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박정희 시해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이 탄생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워싱턴이 아닌 서울 현지에서 지켜봤다. 18년간 버텨온 박정희 정권의 붕괴, 권력의 순간적 공백과 그 공백을 채우려는 정치 세력의 부상, 군부의 하극상과 광주의 참극 등 글라이스틴은 불과 9개월 사이에 전개된 격변의 한국사를 몸소 체험했고 깊숙이 관여했다. 말 그대로 그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글라이스틴이 1999년에 이때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을 펴내면서 붙인 제목은 ‘뒤얽힌 관계, 영향력의 한계(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다. 매사에 신중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단어 선택에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이 제목이야말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액면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광주 유혈사태 직후인 1980년 6월16일 글라이스틴이 직접 작성해 미 국무부로 보낸 아래의 전문에서도 ‘뒤얽힌’ 한미 관계와 미국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이 전문은 당시의 한국 문제와 관련해 글라이스틴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국무부 내 3인 앞으로도 발송됐다. 동아태담당 리처드 홀부르크 차관보와 마이클 아마코스트 부차관보, 로버트 리치 한국과장 세 사람이다.

    [한국 국민과 이곳의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핵심 사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거나 왜곡되게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점을 국무부도 알아야 한다고 봄. 이런 상황이 빚어진 것은 언론에 대한 심한 검열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여론을 포함해 모든 것을 조작하기로 작정한 전두환 그룹의 집요한 노력 때문임.

    카터 대통령의 5월31일 유선방송 인터뷰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 빠지고 안보 이익의 지속성을 강조한 대목만 강조된 채 한국 국민에게 전달되었으며, 머스키 장관의 발언은 (미국이 한국을) 대체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으로 전달되었음.]

    게다가 신군부 일부에서는 위컴 장군과 본인을 우리 정부의 정책과는 궤를 달리하는 인물로 비치도록 일을 도모하고 있으며, 한 명 이상의 서울 주재 미 특파원이 이 게임에 관여하고 있음.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카터 대통령의 5월31일 유선방송 인터뷰는 CNN 인터뷰를 말한다. CNN 인터뷰에서 카터는 “빠른 시일 안에 한국이 민주정부를 수립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의 우방이 인권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정권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민주정부 수립도 중요하지만 안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었고, 때로는 동맹국의 안보가 인권에 우선한다는 말이었다.

    카터의 이 발언은 신군부를 고무시켰다. 불과 1년 전인 박정희 정권 때 카터의 입장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카터는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주문처럼 외고 다녔다. 박정희와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고, 그가 살해되기 직전까지도 박정희의 군부독재 정권을 끔찍이도 혐오했다. 그런 카터가 박정희 정권의 후계자이자 유신체제의 상속자인 신군부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나 카터의 태도는 광주사태 직후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이 확실시된 시점이다. 신군부는 광주를 재점령한 직후인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이하 국보위)를 발족시켰고, 전두환은 국보위 상임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최규하 대통령이 6월12일 텔레비전 담화를 통해 정치개혁 일정을 발표했지만 이미 권력의 축이 신군부로 넘어갔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글라이스틴은 1980년 5월말에서 6월 사이의 변화된 상황을 저서 ‘뒤얽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2·12 때는 신군부 실세와 접촉하기를 꺼렸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신군부의 고위급 실세와 접촉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을 명실상부한 국가 원수로 대하는 것도 이제는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1980년 6월부터 한미 양국 정부간의 기본적인 의견 교류는 최규하 대통령이 아닌 전두환 장군을 통해 이루어졌다.’

    글라이스틴은 국보위 출범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1980년 9월1일)하기까지 3개월 사이에 전두환을 세 차례 만났다. 세 차례 모두 국무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실세와 접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말에 걸맞게 글라이스틴은 연이은 회동을 통해 신군부와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거래’를 하게 된다. 워싱턴의 훈령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다.

    전두환-글라이스틴의 첫 번째 회동(6월4일)과 두 번째 회동(6월24일) 사이인 6월21일,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은 신군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거래의 목적과 전략을 글라이스틴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는 전문을 타전한다. 이 전문은 한국의 정치 발전과 민주화 등 기존에 강조했던 내용 외에 현실(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중시하는 부분이 곳곳에 삽입돼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지시 문건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발신: 국무부 장관수신: 주한 미대사 (즉각 전달)배포금지CHEROKEE

    제목: 한국 문제 쟁점-한국 지도자들에게 미 정책 전달 지시

    1. 전체 내용 2급 비밀

    2. 한국 외무장관과 전두환 장군과의 면담 약속을 잡아 아래 기술한 미 정부의 대(對)한국 정책을 전달할 것. 6월4일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이후 변화된 상황에 대한 추가 평가보고서 제출 요망. 아래 내용은 기존의 우리 정책을 재확인하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은 아님.

    이 전문은 국방부 및 국가안보회의와 상의해 작성된 것이며 모두 동의한 내용임을 참고할 것.]

    “실질적 차원에서 그와 거래해야”

    [3. 우리의 목적과 전략:전두환 장군과 그의 동료들이 군을 동원해 한국정부를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고 단합된 군부가 이런 조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우리는 현재로서는 다음 사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결정했음. 즉 현 체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수용하기 힘든 행동을 완화시키고, 헌법에 기초한 합법적인 정부가 되도록 하며, 정치와 행정에 대한 군의 관여를 감소시키고, 분별 있는 경제정책들을 시행토록 하며, 야당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을 억제시키는 것임.

    동시에 우리가 한국의 현 정권과 지나치게 동일시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현 정권의 행동이 완전하고 정상적인 한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행동인지를 지켜보겠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지적해주어야 함.

    4. 시나리오(A) 수감돼 있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포함해 아래 적시된 모든 지시사항을 전두환 장군에게 전달해야 함. 우리는 6월4일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때 전 장군이 언급한 내용이 이행되는지를 주시해왔으며, 최근의 일들이 양국간의 중요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해왔음.

    (B) 전두환 장군을 만나기 전 6월23일 월요일에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날 필요가 있음. 화요일 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이 실시할 대한국 차관 제공 여부 투표에서 우리가 기권하리라는 점을 월요일 한국 정부에 통보해야 하며, 통보할 내용은 추후 지시할 것임.

    5.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이번 회동의 구체적인 목적은 실질적인 차원에서 그와 거래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인정했음을 그에게 전달하는 것이며, 아울러 그의 행동 여하에 따라 관계가 규정된다는 점을 그에게 이해시키는 것임.

    전두환 집권과 미국의 ‘거리두기’

    1979년 6월29일 방한한 지미 카터 미 대통령. 박정희의 군부독재를 끔찍이도 혐오했던 카터는 박 정권의 후계자인 전두환을 곱게 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평이한 내용인 듯 보이는 이 전문은 그러나 구석구석에 미국의 변화된 입장이 뚜렷하게 반영돼 있다. 우선 크리스토퍼는 이 지시 전문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 장악에 성공했음을 인정하면서, 미국이 전두환과 ‘실질적인 차원에서의 거래’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크리스토퍼는 또 머지않아 가시화될 새 정권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았다.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에 반대는 하지 않겠으나 다섯 가지 조건은 충족시켜야 한다는, 미국의 희망사항 목록인 셈이다. 이 희망사항이 위 전문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라는 말로 표현돼 있다.

    첫째는 ‘수용하기 힘든 행동의 완화’다. 제멋대로 하는 행동은 이제 자제하기를 바란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둘째는 ‘헌법에 기초한 합법적인 정부’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는 최소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인데, 미국이 신정권 출범을 인정한 이상 법의 테두리를 벗어남으로써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셋째, ‘정치와 행정에 대한 군의 관여 감소’다. 군이 정치와 행정에 손대서는 안 된다는 말은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차선책으로 군이 최소한만 관여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분별 있는 경제정책 시행’이다. 신정권이 자유시장 체제에서 벗어나는 경제체제를 택할 경우 한국이라는 시장에서 미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다섯째로 제시된 것이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 억제’다. 정치권의 권력투쟁마저 막을 수는 없으나 정치 자체는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쿠데타는 아니다”

    아시아개발은행 차관건(件)과 관련해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의 훈령대로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책에 ‘박 장관은 언짢아하는 기색이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의 대(對)한국 차관은 인천항의 제2부두 개발에 쓰일 5400만달러짜리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물러난 것은 8월16일이다. 6월초부터 8월16일까지 두 달 보름 남짓한 기간에 워싱턴과 전두환의 줄다리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워싱턴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전두환 정권의 출범을 전제로, 한국의 새 정권을 자국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권력 실세와의 접촉 횟수를 늘렸고, 신군부는 수구적인 자세이긴 했지만 이미 다져놓은 발판을 더욱 확고히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최규하 하야 이틀 전인 8월14일 워싱턴 시각 밤 10시30분,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이 도쿄의 주일 미대사와 하와이 호놀룰루의 미 태평양사령관 앞으로 긴급 전문을 보낸다. 주한 미대사관과 백악관에도 이 긴급 전문이 두 곳에 타전되었음을 통보했다. 제목은 ‘최 대통령 하야’였다.

    [전두환 장군이 한국 대통령직에 오르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여러 조짐이 지난 몇 주 사이에 감지되었음. 대통령 권한을 이미 상당 부분 탈취했고, 4성 장군으로 진급할 것이며, 최 대통령을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리는 등 한국 언론을 통해 귀가 따갑도록 그런 얘기가 많이 들렸음.

    어제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최 대통령은 8월16일 하야할 예정이며, 통일주체국민회의가 8월18일 서울에서 소집돼 전두환을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될 것임.

    주미 일본대사관에도 통보했으며 추가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전달할 것임. 이 긴급한 사태 진전에 미국이 어떻게 적절하게 대처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음.

    서울은 태평양사령관과 태평양사령부 정치국에도 한국의 정치 진척 상황에 대한 보고와 분석 자료를 전달할 것. - 크리스토퍼]

    글라이스틴은 이때 워싱턴에 있었다. 한 달 전인 7월15일에 휴가차 귀국한 그는 한 달 보름 남짓 미국에 머물다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사흘 전인 8월28일에 서울로 귀임했다. 최규하가 하야하고 전두환이 4성 장군으로 진급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글라이스틴은 미국에서 지켜보았다. 이 기간에 주한 미대사관 업무는 부대사였던 존 몬조의 책임하에 있었다.

    합법정부 요구는 체면치레용

    몬조 부대사가 최규하 하야 직전인 8월14일, ‘한국의 대통령직 변동’이라는 제목을 붙여 국무부에 타전한 4장짜리 비밀 전문은 당시의 한국 상황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여러 통로를 통해 보고한 바 있듯이, 최 대통령이 8월16일에 하야하고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8월21일에 새 대통령에 선출되리라는 것은 확실시됨. (마이크 킴(Mike Kim)이나 다른 사람을 임시 대리인으로 활용하는 것은 더는 의미가 없는 듯이 보임.) 현재 활용되고 있는 방법론은 헌법에 기초한 것이며 사태의 성격을 ‘쿠데타’로 규정할 수는 없음. 진전된 사태는 전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사료됨.

    헌법 개정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될 것으로 보이며, 9월말이나 10월초에 새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될 것이고, 새 헌법하의 대통령 선출은 1981년 1월초 또는 2월쯤에 시행될 것임.]

    몬조는 전두환 정권의 탄생을 ‘쿠데타’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워싱턴이 희망했던 대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길은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것이 가장 손쉽고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었다.

    미국이 이 절차를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광주사태 이후 국보위가 출범한 직후부터 미국은 전두환을 파트너로 인정했고, 이때부터 전두환은 평탄한 길에 들어섰다. 미국이 요구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한 정부 구성’이라는 조건은 체면치레용 형식이었던 셈이다.

    “다수 한국민은 전두환을 현실로 인정”

    하지만 미국은 한국 대통령의 이름이 바뀌는 순간까지 전두환에 대한 견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위 보고서에는 몬조 부대사의 분석이 이어진다. 역시 현실을 중시하는 시각에 무게가 실려 있다.

    [두 가지 사항을 지켜보아야 함. 한국 국민의 반응과 미 정부의 적절한 대응임. 본인의 판단으로는 대다수 한국 국민은 이 변화를 수동적인 자세에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 전두환의 대통령직 탈취를 현실로 인정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임.

    전두환과 화해를 추구해온 세력은 보다 현실적인 정부 구조가 갖춰지게 된 것을 환영할 수도 있으며, 전두환을 계속해서 반대하는 세력은 ‘마지막으로 바랐던 요행’이 사라지는 것으로 볼 것임. 정치권과 언론, 대학 등 군부정권을 전통적으로 반대해온 세력은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위축된 채 낙담하는 모습임. 이들이 이번에는 조직화돼 움직일 것 같지는 않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예를 들면 대학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힘을 과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님. 특히 예기치 않은 사태가 터지면(예를 들어 학생 희생 등) 힘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임.]

    ‘대다수의 한국 국민은 이 변화를 수동적인 자세에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몬조는 파악했다. 만약 대다수의 한국 국민이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였다면 미국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국무부 비밀문서를 통해 미국의 대 한국 외교정책의 기본 성격과 방향을 들여다보는 순간만큼은 이런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한국의 정치군인들이 군부라는 이름으로 정치 전면에 나섰을 때까지 미국은 최규하를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군부라는 신흥세력을 제거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미국은 관망했다. 단 우려 섞인 관망이었다. 최규하의 지도력을 안심할 수준으로 보지도 않았고 신군부를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규하에게 등을 돌리지도 않았고 전두환을 아주 외면하지도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공백을 메우려는, 최규하와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두 신흥 정치세력에 미국은 각각 한 손을 내밀 준비만 하고 있었던 셈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세력을 선택하는 현실주의는 미국 외교정책만의 특징도 아니고, 미국의 대한국 외교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현실주의 자체가 외교의 기본이고, 카터 행정부가 아무리 인권과 민주화의 가치를 부르짖었어도 이 외교의 기본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1980년 6월초까지의 7개월이 미국이 최규하의 지도력을 시험해보는 기간이었다면, 6월초부터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9월초까지의 90일은 전두환의 정치력을 지켜보는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10개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은 신군부의 성격을 파악했고, 미 국익에 도움이 될 세력인지 아닌지를 면밀히 검토했다. 한국에 새로 들어설 정권은 미국과 동맹이라는 이름의 한솥밥을 먹을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자격 요건은 갖추었다는 것이 미국의 최종 판단이었다.

    위컴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왜곡

    전두환의 손을 들어줌과 동시에 미국은 향후 대응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몬조의 보고서에도 그 대응책이 드러나 있다.

    [우리의 대응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음. (A)이제는 전두환과 같이 지내야 하며(We will have to live with Chun), 아마도 오랫동안 그래야 할 것임. (B)미 정부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정부 수립을 향해 한국 정치가 질서 있게 발전해나가는 것을 지지한다는 점을 한국 정치권 전체에 분명히 해두는 것이 우리의 장기적인 이익에 도움이 될 것임. (C)전두환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우리가 도구로 활용되지 않았다는 것, 특히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 미 정부의 승인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함.

    한국인들은 위컴 장군의 발언을 믿고 있으며(전두환이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위컴 장군의 발언을 기술적으로 활용했음), 우리가 기꺼이 전두환을 선택했고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 우리와 최종적으로 상의했다는 입증 자료로 간주되고 있음.

    일부에서는 이 사안을 과거 박정희가 처음 등장했을 때 미 정부가 마지못해 묵인했다는 시각과 대비시켜 보고 있음. 우리가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는 한 이런 잘못된 인식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분노로 확산될 우려가 있음.]

    위컴 장군의 발언이란, 위컴이 익명을 전제로 8월7일 AP통신 및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한 인터뷰를 지칭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한국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면 우리는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한 미군 고위 관계자’가 발언했다는 것이 인터뷰 기사였다. 미 정부의 내부 방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언론을 상대로 한 인터뷰치고는 표현이 거칠었다.

    그렇지 않아도 위컴의 발언이 주목되는 와중에 이튿날 전두환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군 고위 관계자’가 위컴이라는 점을 밝혔다. 누가 봐도 미국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꼴이 됐다.

    이때 글라이스틴은 뉴욕에서 휴가중이었고, 위컴은 호놀룰루의 태평양사령부를 거쳐 워싱턴에 가 있었다. 위컴 발언의 파문은 걷잡을 수 없었다. 몬조도 위 보고서에서 위컴 발언의 파문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위컴에게 한국 귀임 날짜를 연기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것은 본부에서도 잘 인식하고 있으리라 봄. (한국 전두환 그룹의) 시나리오가 막을 내리기 전엔 위컴이 한국에 귀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게 본인의 제안임. 만약 위컴이 최 대통령의 사임 발표 직전에 한국에 돌아온다면 그가 전두환에 대한 워싱턴의 최종 축하 메시지를 가지고 온 것으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임.

    위컴이 귀임을 연기하게 되면 전두환의 행동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경고를 전달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점을 본인도 깊이 인식하고 있으나, 최근의 언론 보도를 감안할 때 어쨌든 우리의 그런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으로 위컴이 적임자인지는 우려됨.]

    최규하의 사임 발표 하루 전인 8월15일 몬조 부대사는 짤막한 전문을 워싱턴으로 타전했다. 한국 정부로부터 최규하의 대통령직 사임을 공식 통보받았다는 내용이다.

    [1. 청와대의 최광수 비서실장으로부터 최 대통령의 사임을 통보받은 후 국무장관의 지시사항을 전달했음. 최 실장은 우리의 견해를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이해를 구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음.

    2.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약속을 추진중임.

    3.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로젠크랜스 장군이 주영복 한국 국방장관으로부터 8월16일 최 대통령의 하야 발표가 있을 때 군 비상 발령의 윗단계인 데프콘3을 발령했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았다고 통보해 왔음. 로젠크랜스 장군은 데프콘3가 불필요하다고 보고 있음(본인도 같은 생각임). 로젠크랜스 장군은 이 문제와 관련해 위컴 장군과 상의할 것이며, 최종 단계에서는 태평양사령부의 롱 제독 및 브라운 국방장관과도 상의할 것임.]

    최 대통령의 사임 소식에 워싱턴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몬조 부대사에게 보낸 8월15일자 크리스토퍼 차관의 전문은 워싱턴이 내린 결론을 세 가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미국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관련돼 있다는 인식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제시됐다.

    [1. 서울에서 제출된 아주 훌륭한 분석 보고를 바탕으로 오늘 아침 현상황과 향후 조치들에 대해 부처간 장시간 회의가 있었음. 우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음.

    - 서울에서 지적했듯이, 전두환 장군이 곧 대통령직에 오르리라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보임.

    - 그러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도록 우리가 뒤를 밀어주었다는 그 어떤 의구심도 배척해야 함(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컴 장군의 한국 귀임은 연기될 것이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것임).

    - 향후 보다 자유스러운 정권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을 강조해야 함. 또한 헌법 개정 및 국민투표 일정이 차질 없이 이행되길 바란다는 입장도 강조해야 함.

    2. 최광수 비서실장이나 박동진 외무장관과 면담시 아래 사항들을 우리와 상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하며, 국무장관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함.

    - 한국 지도부가 지난주 위컴 장군의 발언에 미국 정부가 전두환 장군을 승인하거나 지지한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되며, 한국 언론 보도든 성명 형태든 위컴 장군의 발언 내용을 곡해하려는 그 어떤 조작에도 우리는 단호히 대처해야 할 것임.

    3.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약속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에 잡아야 하며, 미 정부 정책과 관련된 최근의 언론 보도에서 야기된 그 어떤 잘못된 인식도 불식시켜야 한다는 점을 위에 언급한 정책 지침을 기준 삼아 명심하길 바람.]

    전두환은 9월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이틀 전 카터 대통령은 한국의 신임 대통령당선자 전두환에게 축하한다는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은 메시지 한 장을 달랑 보냈고(‘신동아’ 2004년 7월호 연재 기사③ 참고), 같은 날 이미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지 보름이 다 돼가는 전직 대통령 최규하에게도 편지 한 장을 발송했다.

    카터가 최규하 앞으로 보낸 친서는 최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카터에게 사임 통보 편지를 발송한 것에 대한 답신 형식이었다. 아무리 9개월의 단명 대통령이었다 해도 최규하는 한때 카터가 지지를 약속했던 지도자이다. 하지만 카터의 이 편지에는 외교 수사로 치장된 찬사만 그득할 뿐, 정상끼리 주고받을 법한 사적인 정감의 흔적이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축하사절로 아무도 안 보내

    [한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신다는 것을 통보해주신 8월16일자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는 지난 30년간 귀국의 여러 공직을 거치며 사심 없이 봉직해 오셨고, 최근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현대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수행하셨습니다. 막중한 업무를 맡으시는 동안 귀하가 보여주신 정신과 헌신적인 노력에 존경을 표하며, 귀하의 노력이 한국의 민주적인 정치 제도 발전에 밑거름이 될 것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이제 인생의 다른 무대에 들어서시게 될 귀하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지미 카터.]

    카터 행정부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사절로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취임식 사흘 전에 서울로 귀임해 있던 글라이스틴 대사만이 미국을 대표해 취임식장에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취임식에 참석한 다음날 글라이스틴은 취임식 광경을 워싱턴으로 이렇게 보고했다.

    [1. 9월1일 전두환이 한국의 제11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음. 취임식이 있던 날은 임시 공휴일이었으며, 취임식이 있은 후 한국 및 외국의 고위층들이 공식 취임연 만찬에 참석해 새 대통령을 축하했음.

    2. 전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기존에 언급했던 것과 다른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았음. 강력한 정부를 주장하는 간단한 논리가 제시되었고, 이미 제시되었던 목표를 추구하겠다는 약속이 담겼음.

    3. 개인 견해 : 취임식 날의 공식 행사는 매끄럽게 진행됐으나, 축제 분위기는 없었음. 국민들은 공휴일의 쾌청한 날씨를 만끽했고, 궁과 공원에 인파가 북적였음.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 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그저 평소 햇볕 좋은 일요일을 즐기는 것 같은 분위기였음.]

    강경파와 신중파의 대립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이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신군부를 상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라이스틴의 이런 견해는 워싱턴과 종종 충돌을 빚었다. 카터 대통령과 밴스에 이어 새로 국무장관에 앉은 머스키는 신군부를 강경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홀브룩 차관보와 글라이스틴은 새로 등장한 권력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살펴보자’는 입장이었다.

    신군부를 통제하는 한 방법으로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워싱턴의 강경한 입장이 서울로 전달되었을 때 글라이스틴은 ‘사임하겠다’면서 버텼다. 카터 행정부가 김대중 구명에 지나치게 집착하자 글라이스틴은 김대중 문제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신군부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충고했다. 머스키 장관이 끝까지 김대중 구명건을 물고 늘어졌을 때 말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도 바로 글라이스틴이었다.

    글라이스틴의 말처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 한계는 미국이 스스로 설정한 한계이기도 하다. 글라이스틴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미국이 과격한 조치를 취한 적은 없다’고 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제된 영향력은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이 뒷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며, 신군부가 정권 장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이런 ‘자제된 영향력의 한계’를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집권기의 한미 관계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이란 인질 사태였다. 카터 행정부는 이 인질 사태에 외교의 총력을 기울였고, 한국의 사태 변화에 정신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서울의 사태는 빠르게 진척됐다. 신군부는 정권 장악 시간표에 미국의 이런 한계를 충분히 감안했다.

    또 미국 대통령선거 기간이었다. 재선을 노리던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등 민감한 외교 현안을 맵시있게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물론 민주당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카터는 이미 정치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은 뒤였다.

    정치적으로 절름발이가 돼 있던 카터. 주한미군 철수가 이미 물 건너갔다는 판단. 미국 내부의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전두환의 신군부는 충분히 활용했다. 게다가 카터 행정부는 끝까지 한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에 집착했고, 글라이스틴의 지적대로 김대중 구명 건은 오히려 미국에 대한 전두환의 저항력을 키워주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과정에서는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를 상대했고, 집권 이후에는 레이건의 공화당을 상대했다. 그리고 미국에 등 돌리지 않았다. 신군부의 이름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이미 이 신흥 정치세력은 민주당 정권이든 공화당 정권이든 미국에 칼을 들이댈 정치세력이 아니었다.

    나중에 신군부라는 이름을 얻긴 했지만, 전두환 등 한국 군부내 정치 군인들의 이름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주요 관리대상 명단에 들어 있었다. 미국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이 세력권의 인맥은 미국의 잠재적인 동반자들이었다.

    미국은 신군부의 존재를 부인하지도 않았고, 정권 장악 기도를 꺾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미국이 신경 썼던 것은 신군부가 입을 옷차림새였다. 남의 피를 묻혀가며 빼앗아 입었다는 남의 옷을, 더구나 다른 옷도 아닌 군복을 입고 나타난 사람에게 공개된 자리에서 버젓이 악수를 청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미국의 기본 입장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6개월 동안 새로 옷을 해 입었고, 1981년 2월2일 레이건의 초청을 받아내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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