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의대 25학번, 7500명 콩나물교실 파행 불가피”

[작심토로] 강대희 미래의료혁신연구회장·서울대 의대 교수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4-08-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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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학년도 의대 입학정원 원점에서 재논의해야

    • 전공의 파업 아니라 사직, ‘4연당’ ‘5연당’ 의사도 떠난다

    • 4년 전 의·정 합의 내팽개친 정부에 배신감

    • 저가 양질 서비스, ‘병원 문턱’ 낮은 한국의 딜레마

    • 초고령사회엔 진료보다 돌봄, 치료보다 예방

    • 의사 수 늘리기 전에 질병 패턴 파악부터

    강대희 미래의료혁신연구회장 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어떻게든 전공의들을 설득해 논의의 장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박해윤 기자]

    강대희 미래의료혁신연구회장 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어떻게든 전공의들을 설득해 논의의 장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박해윤 기자]

    “정부는 부족하나마 1만5000명 수요 가운데 2035년까지 1만 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2025학년도부터 의과대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하여, 현재 3058명에서 5058명으로 확대합니다. 2025학년도부터 2000명이 추가로 입학하면 2031년부터 배출되어, 2035년까지 최대 1만 명의 의사 인력이 확충될 것입니다.”

    2월 6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사인력 확대 방안’을 발표하고 6개월이 지났다. 이에 반발한 전공의 1만3000여 명이 집단 사직을 하고, 의대생 1만8000여 명이 수업 거부에 들어간 지도 6개월이 넘었다.

    7월 22일 기준 의대생 출석률은 2.7%, 7월 26일 마감한 의사 국가고시 응시율은 11.4%, 8월 8일 기준 211개 수련병원의 전공의 출근율은 8.9%, 하반기 전공의 모집 지원율도 1.4%에 불과했다. 정부의 진료 유지 명령, 업무 개시 명령,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 면허정지 처분, 유급과 휴학 불허 등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수련과 학업을 포기한 전공의와 의대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당장 내년부터 신규 의사 배출이 중단되고, 신규 전공의 선발이 중단되며, 안 그래도 부족한 기피 과목(응급의학과, 소아과, 산부인과)을 맡을 의사는 더욱 부족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수의료 지원을 위한 의대 정원 확대가 오히려 필수의료 붕괴를 앞당기는 꼴이 됐다.

    그사이 정부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위원장 노연홍 제약바이오협회 회장)를 출범하고 4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의료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를 발표했다. 아울러 의대 증원 규모를 2000명에서 1509명으로 줄여 2025학년도 40개 의과대학의 모집 인원을 총 4567명으로 확정했다.

    한편 해묵은 의·정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올해 3월, 의료계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인 ‘한국미래의료혁신연구회(이하 한미연)’가 출범했다. 전 서울대 의대 학장인 강대희 예방의학과 교수(서울대 지역의료혁신센터장 겸 한국원격의료학회장)와 전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이사장인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이사 겸 코리그룹 회장이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한미연은 한국의 의료 경쟁력과 미래가치 제고를 위해 미래 의료 혁신 정책을 연구하고 제안하는 싱크탱크를 표방했다. 이미 4월과 6월 두 차례 정기 세미나를 통해 디지털 헬스케어를 주제로 의료시스템과 의사과학자 양성 방안에 대한 정책 제안을 한 바 있다. 6월 세미나에는 의료개혁특별위원회 노연홍 위원장이 참석해 “한국의 미래 의료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한미연의 정책 제안에 귀기울이겠다”고 말했다.

    “타협이 불가능한 시점에 왔다”

    8월 5일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 의대 연구관 509호에서 만난 강대희 교수는 “전공의 대부분이 사직 처리됐고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 응시하지 않았다”며 “의·정 갈등 타협이 전공의와 의대생의 복귀를 전제로 한다면 이미 타협이 불가능한 시점에 왔다”고 우울한 전망을 하면서도 “그러나 의료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전공의와 의대생의 복귀 외에도 중요한 과제가 많다. 한국 의료의 미래를 위해 지금이라도 사회적인 협의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사직 전공의들이 속속 개원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일단 개원가로 들어간 전공의는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강 교수는 이처럼 전공의들이 강경 투쟁 일변도로 가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2020년 ‘9·4 의·정 합의(이하 9·4합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4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020년 7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돼 아우성인 와중에 문재인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방 첩약 급여화, 비대면 진료 추진 정책(의료계는 이를 4대 악법이라고 말한다)을 발표했다. 의대 정원과 관련해서는 매년 400명씩, 10년간 4000명을 증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반대하는 의사들이 총파업에 들어갔으나 코로나19가 재유행 단계에 돌입하자 여당과 정부, 대한의사협회가 긴급 봉합에 나선 것이 9·4합의였다. 핵심 내용은 ‘보건복지부는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의정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한의사협회와 협의한다’로 사실상 원점에서 재논의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에 따라 의사들은 곧바로 진료 현장으로 복귀했으나 의대생들의 동맹휴업과 본과 4학년 학생들의 의사국가시험 거부는 그로부터 각각 열흘과 스무 날을 더 이어갈 만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예상보다 길어진 코로나19가 안정화에 들어가자마자 2023년 1월 30일(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 해지 첫날) 열린 의협과 보건복지부의 의료현안협의체 회의에서 의사인력 문제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올라왔다. 적정 인력에 대한 양측의 의견 차이가 너무 커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자 정부는 이 안건을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로 넘겼다. 의료계는 정부가 논의의 장을 일방적으로 바꾼 것부터 9·4합의 위배라며 반발했지만 보건복지부는 더는 미룰 수 없다며 2000명 증원 계획을 발표해 버렸다.

    4년 전 9·4합의 휴지통 속으로, 무너진 신뢰

    “2020년이면 문재인 정부 시절이고 지금 전공의들이 의대생일 때다. 그들은 동맹휴업을 하거나 국시를 거부하며 정부와 의협 간 9·4합의가 이뤄지는 전 과정을 지켜봤다. 당시 정세균 국무총리와 이낙연 민주당 대표부터 한정애 정책위의장, 최대집 의협 회장, 대통령실까지 의료계와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당·정·청이 총동원됐다. 나도 ‘코로나19 환자들을 외면하면 국민 역적이 된다. 일단 들어와서 그다음에 해결하자’고 제자들을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보건의료 정책을 총괄할 보건복지부 제2차관직이 신설됐다. 어렵게 이룬 합의를 이제 와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을 보고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은 정부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고 말한다. 또 합의만 해놓고 지난 4년 동안 의료개혁은 손 놓고 있었던 선배들에 대한 실망도 컸다.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이 당장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진로까지 포기하면서 진료 현장이나 학교를 떠난 근본적 이유는 근거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강행에 대한 절망과 의협을 포함한 기성 의료계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계를 향한 국민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다. 첫째, 지난 1년간 논의할 시간이 충분했는데 그동안 무엇을 하다가 이제 와서 또 집단행동에 나서나. 보건복지부는 이와 관련해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의협과 28회 소통하고 대한병원협회, 종별병원협회 등 병원계와 전공의협의회 등 의료계와도 적극 소통했다고 해명하지만, 의료계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고 주장한다. 둘째, 정부가 의료계의 요구를 수용해 증원 인원을 2000명에서 1500명으로 줄였다면 다음은 의료계가 양보할 차례가 아닌가. 셋째, 시간이 흐를수록 환자의 생명은 내팽개치고 자기들 밥그릇 챙기기에만 관심 있는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고 있다.

    강대희 교수는 한미연 초대 회장으로서 의·정 갈등 장기화로 쌓인 오해를 풀고 타협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다시 나섰다.

    “의대 증원은 공익에 부합한다”는 판결과 증원 반대 이유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올해 3월 의료계가 정부를 상대로 의대 증원 처분 집행정지를 신청했지만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하면서 “의대 증원은 공익에 부합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더는 의대 증원을 반대할 명분이 없지 않나.‌

    “일단 의대 정원 증원 등을 일방적으로 강행하지 않겠다고 한 2020년 의·정 합의를 깨뜨린 처분이라는 점, 갑작스러운 증원으로 정상적인 교육과 수련이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 폭증하고 있는 의료비와 의료 수요의 증가를 오히려 악화하는 조치가 될 것이라는 예상 등이 의료계가 이번 증원을 반대하는 이유다. 만약 의대 정원 증원이 한국 사회와 국민의 건강에 필요하다는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의료계도 그 방향에 찬성할 것이다. 물론 상식적인 선에서의 증감과 이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의료계가 무조건 의대 정원 증원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의약분업 때 줄인 350명을 회복하는 데는 대체로 찬성했고, 500~800명까지 늘리는 것도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검토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2000명이라고 발표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다수가 의대 증원을 찬성하고 있지 않나.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의사가 더 필요한가’라고 물으면 누구나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의료서비스와 관련해 세계 국가를 3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비용을 많이 낸 만큼 의료서비스가 좋은 나라, 둘째 적게 내고 서비스 질도 나쁜 나라, 셋째 적게 내고 서비스 질까지 좋은 나라. 첫 번째가 미국이라면 한국은 세 번째에 가깝다. 그럼에도 더 좋은 서비스를 위해 의료인력을 늘리고자 한다면 그만큼 비용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국민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얼마나 더 낼 의사가 있는가.”

    정부안 어디에도 증원에 대한 과학적 근거 없어

    정부가 증원 계획을 매년 2000명에서 2025년은 일단 1509명으로 수정했음에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가.

    “2000명이라고 못 박았다가 1500명으로 줄인 것부터가 이 증원 계획이 주먹구구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의료정책은 과학에 근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해 왔지만 대학별로 수요조사를 했다는 것 외에 증원 인원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정부는 그동안 수십 차례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의대 정원 증원의 불가피성을 협의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에 제출된 자료 어디에도 2000명 증원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2025학년도 40개 의과대학의 총 모집 인원이 4567명으로 확정됐다. 내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나.

    “단순 계산으로도 내년엔 정상적인 교육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입생 4567명에 올해 유급된 학생들까지 합치면 한 학년이 7500명가량 된다. 당장 내년엔 신입생 선발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내가 81학번 졸업정원제 세대다. 선배 학년까지 정원이 160명이었던 의대가 갑자기 100명을 더 뽑아 260명이 됐다. 81학번들은 8명이 한 조로 하던 해부 실습을 14명이 해야 했다. 설 자리도 없어서 어깨 너머로 해부를 배웠다. 그처럼 열악한 여건에서 교육을 받고도 지금은 다들 훌륭한 의사가 됐으니 우리 교육에 불가능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40여 년 전 이야기다. MZ세대에게 그런 환경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나아가 1500명 증원 여파로 이공계 공동화 같은 입시 연쇄반응이 일어날 게 뻔한데 그에 대한 대책은 세우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제 와서 증원 문제를 원점으로 돌릴 수는 없지 않나.

    “내년도 입시 방향이 정해진 상태에서 변경은 쉽지 않다. 다만 정부도 2026년 이후에는 의료인력 추계 기관을 설립해 의료계와 논의하겠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의사 수는 모자라지 않다, 의료체계가 문제일 뿐

    정부는 국민 생명과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2006년부터 18년 동안 묶여 있던 의대 정원을 과감하게 확대하는 것이며 대규모 증원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갈등이 반복되나.

    “정부 발표와 달리 의료계는 의사 수가 모자라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의사 수가 부족한 근거로 1000명당 의사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을 든다. 그러나 한국 의사 수가 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른 증가율을 보인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국민이 의료 공급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불합리한 수가체계와 선진국의 수백 배에 달하는 의료소송으로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부 분야, 일부 지역에서는 의사 수가 너무 많아서 생기는 과도한 경쟁으로 꼭 필요치 않은 진료가 자행되고 있다. 그동안에도 몇 차례 의대 정원 증원 논의가 있었으나 별다른 진전 없이 끝났다. 진작에 일본이나 외국처럼 의료인력 추계를 위한 기구를 설치해 평소 의료계와 정부, 그리고 사회 각계가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2021년 기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한국이 2.6명으로 OECD 평균 3.7명에 못 미치지만 캐나다 2.8명, 미국 2.7명, 일본 2.6명과는 거의 차이가 없다. 물론 한의사를 제외하면 의사 수는 1000명당 2.2명으로 떨어진다.


    의대 정원 증원의 근거가 되는 기본 통계에서조차 의·정 간 합의가 안 된 것 같다.

    “단순히 의사 수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추이를 반영해야 한다. 한국에서 의사 수는 빠르게 늘어나는 반면, 출생률은 빠르게 감소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는 고령화로 의사 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출생률이 OECD 최저라는 것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내년도 의사 국시 응시율을 보면 신규 의사 배출 수는 3000명에서 364명으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의대 정원 증가폭(49%)보다 배출 의사 감소폭(88%)이 훨씬 크다.

    “신규 의사 배출이 줄어든다고 해서 당장 개원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피 과목과 지역에서 전문의 부족 문제는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다. 2025년 신입생들이 졸업해서 수련을 시작하는 2031년까지는 새로 배출되는 의사 수가 미미할 것을 각오하고 플랜B를 마련해야 한다.”


    의·정 갈등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처럼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 장기화는 불가피하다. 갈등 장기화는 결국 국민에게 불편을 초래하고, 의료계와 정부 모두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 거듭 강조하듯 2026년 이후 의대 정원 문제는 정부도 융통성을 가지고 논의해 보겠다고 했으니 하나씩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

    기대수명 길어질수록 예방 중요성 커져, 의사 역할도 달라져

    초고령사회를 맞아 궁극적으론 의사는 더 늘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과연 한국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판단인지 묻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면 첫째, 우리나라 의료의 올바른 모습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먼저 도출하고, 이에 따른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둘째, 이에 따라 의사 수가 언제까지 얼마나 필요하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이를 토대로 논의해야 한다. 셋째, 정책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넷째, 법적·재정적으로 보장되는 의·정 합의체를 구성해 의료계의 반발을 잠재우기 바란다. 이런 조치 없이는 새로운 전문의 배출은 2035년에나 가능할 것이다.”


    적정 의료인력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근거란 무엇인가.

    “초고령사회가 되면 수술하는 의사가 더 필요할까, ‘케어’할 사람이 더 필요할까. 진료보다 돌봄, 치료보다 예방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기대수명이 길어질수록 병이 생기기 전에 일찍 찾아내는 예방이 훨씬 중요하다. 그런 전반적인 질병 패턴을 고려해 과연 어떤 분야의 의사가 몇 명 더 필요한지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당뇨라고 하면 시력을 잃거나 발가락이 썩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당뇨 환자 700만 명 시대라고 하지만 과거 같은 후유증을 겪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환자들이 자가 혈당측정 장치를 이용해 수시로 점검하면서 조기 발견, 조기 치료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초고령화사회에선 의사 역할 자체가 바뀐다. 지역적 특성도 파악해야 한다. 전라남도는 전국에서 노령화지수(유소년 100명 당 노령인구)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실제로 아기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운 곳이 많은데 필수의료라 해서 무조건 소아과 의사를 늘리는 게 합리적인가. 농담 같은 진담으로, 지역으로 갈수록 의사가 없는 게 아니라 환자가 없다고 한다. 이런 지역은 의사 수를 늘리는 것보다 거점을 광역화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에 지역의료혁신센터를 만든 이유도 이런 지역별 의료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이미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시점에서 의대 정원 문제 외에 정부가 추진할 수 있는 의료개혁에는 무엇이 있나.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에 있는 젊은 의사 세 명이 곧 그만둔다고 들었다. 전공의들이 떠난 뒤 이들은 4연당(4일 연속 당직), 5연당(5일 연속 당직)을 밥 먹듯 해오다 이제는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소위 ‘응급실 뺑뺑이’를 막는다며 중증환자를 거부하지 못하는 법을 만든다. 한마디로 응급의학과 의사가 환자를 안 보면 잡아넣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하기 싫은데 보상은 적고 처벌만 있는 이 일을 누가 하겠나. 건강보험을 기본으로 하는 의료체계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 30~40년간 누적돼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상급종합병원이 중증환자 치료에 집중하도록 체계를 바꾸는 것, 환자들을 위해 어려운 치료를 감당하는 의사들이 합당한 경제적·사회적 대우를 받도록 하는 것, 지역의료와 전달체계를 살리는 것, 전공의들의 수련 과정을 개선하는 것, 환자와 의사들을 위한 의료사고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 등이 시급한 과제다. 지금까지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뒤로한 채 단기간에 의사 인력 확대로 의료개혁을 하려고 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을 갖춘 의료 소비 국가라고 한다. 최고 의료 수준을 유지하면서 의료 과잉 소비를 줄이는 것이 가능한가.

    “한국은 기대수명이 전 세계에게 가장 빨리 80대에 진입한 나라다. 일단 오래 산다. 의료의 목표가 생존율을 높이는 것이다. 암 수술 생존율 전 세계 1위도 한국이다. 의료 분야 각종 랭킹에서도 전 세계 톱 수준이다. 그에 비해 돈은 적게 낸다. 전체 GDP(국내총생산)에서 의료비 지출은 미국이 20%, 일본이 12%, 한국이 8%에 불과하다. 문제는 의료비가 너무 빨리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돌아가시기 전 6개월 사이에 의료비의 60%를 지출한다. 불필요한 연명치료에 너무 많은 비용을 쓰고 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 의료가 접근성이 좋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의사 수는 적다고 하면서도 실제 의료소비는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전 세계적으로 후유증 없는 천식 입원율 1위, 당뇨 환자 입원율 1위인 나라다. 의료 접근성이 너무 좋으면 경증 환자 진료에 많은 재원을 사용하게 되고,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병원 문턱이 낮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수준 높은 의료, 의료행위에 대한 가격, 의료인 대우 등이 균형을 갖추도록 해야 최고 수준을 유지하면서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값싸고 질 좋은 서비스가 불러온 의료 과잉 소비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의개특위)가 이런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나.

    “그렇다. 이런 문제를 하나씩 논의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플랫폼은 현재로서는 의개특위가 유일하다. 다만 정부 쪽 사람들로만 구성돼 있어 국회와 의료 전문가 그룹의 참여를 늘려야 한다. 특히 어떻게든 전공의들을 설득해서 논의의 장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한국개발연구원(KDI)처럼 가칭 한국의료정책연구원 같은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민간 의료 싱크탱크인 한미연에서도 이런 문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정책 제안을 해나갈 예정이다. 디지털 헬스케어를 주제로 두 번의 세미나를 했고 세 번째는 지역의료를 다룰 예정이다. 지역의료와 수도권 의료 간 격차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원격협진’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서울대병원과 지방 국립대병원이 원격협진을 하면 굳이 서울까지 진료를 받으러 올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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