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잡지에서 확장된 ‘보는’ 잡지
30전으로 사 보는 ‘가성비’ 좋은 ‘신동아’
문맹률 84.6% 시대…만화로 이끈 해학과 판타지
‘신동아’ 창간호(왼쪽)와 창간사. [동아DB]
신동아 창간호에 실린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창간사와 편집 제작을 총괄한 설의식(호 小梧)의 편집후기를 보면 신동아의 탄생 이유를 알 수 있다. 송진우는 ‘어느 일당(一黨) 일파의 선전기관이나 개인의 전유기관이 아니며 명실이 다 같은 조선민족의 공기(公器)’라고 명시했다. 설의식은 편집후기에서 ‘우리의 지식과 문견(聞見)을 넓히고 실익과 취미를 도울 만한 것이면 모두 취하는 망라주의’를 편집 방침으로 규정했다. 새로운 세계 사조와 식민 지배의 조선 현실을 고민하면서 ‘망라주의’를 택한 것이다.
‘읽는’ 잡지에서 확장된 ‘보는’ 잡지
‘망라(網羅)’는 물고기나 새를 잡는 그물이다. 어떤 사실이나 일 모두를 널리 포함하자는 입장이나 태도를 말한다. 신동아는 태생부터 기존의 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서 단순히 결합하는 ‘종합지’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창간사에서 ‘조선민족의 미래를 제시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전람회, 토의장’이 되기를 자처한 신동아는 더 많은 독자와 친밀하게 접촉해야 했다. 지면과 마감의 한계로 일간지 보도엔 미처 담지 못한 기사를 심도 있게 다루는 방향타로서 조선을 선도하려면 일제의 검열이라는 난관부터 뚫어야 했다.
1931년 9월 15일, 동아일보사 2층 응접실에선 신동아 창간의 중추적 역할을 할 기자들의 간략한 대담이 있었다(신동아 창간호 48페이지).
이날 신동아 기자들은 기자와 편집자 각자의 지혜를 발휘해 ‘암시성(暗示性)’을 최고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제의 경무국 검열관이 트집을 잡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시선을 흩트리려면 정공법보다는 뜻하는 바를 묵시적으로 내포하는 은유적 테크닉이 필요했다. 이는 신동아가 문자 기호가 아닌 사진과 만화 같은 이미지 기호를 적극 활용한 이유였다. 신동아는 목차 다음으로 ‘사진’과 ‘만화’ 코너가 가장 먼저 보이도록 편집했고, 편집 구성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란(欄)’이라는 섹션을 만들었다. 본문(과학란-연예란-스포츠란 - 문예란-매호특별부록)을 묶었다. 앞서 다른 잡지들도 만화나 사진을 게재했지만 신동아처럼 사진과 만화를 아예 독립된 코너로 따로 항목을 만들지는 않았다.
‘사진’ 코너에는 4개의 타이틀(조선명화, 시사화보, 지상견학, 조선의 자랑) 안에 각기 다른 사진들을 게재해 조선의 현실을 시사했고, ‘만화’ 코너는 3개의 타이틀(조선의 표정, 만화로 본 세계시사, 만화로 본 인정세태) 안에 식민지 사회의 결함과 모순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했다.
‘사진과 만화’ 코너는 독자와의 만남을 가로막았던 ‘문맹률’이라는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193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조선국세조사’에 따르면, 조선인의 한글 문맹률은 84.6%였다. 이렇듯 시각성과 시사성을 도모하는 시각적 콘텐츠를 보강한 신동아는 검열이라는 줄을 타면서 많은 조선인의 사랑을 받았다. 창간호는 2만 부 발행됐고, 22호는 3판까지 찍을 정도였다. 당시 잡지 출판 부수는 호당 평균 5000~6000부였으니 신동아에 대한 조선 독자들의 호응을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