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주지한 파시스트 정권이나 사회주의 국가는 19세기 말에 탄생한 이 새로운 예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덩샤오핑은 1978년 집권 이후 그간의 통제 정책을 완화하고 경제 분야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파리, 모기가 들어오더라도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했지만 영화를 통해 유입되는 반동적 사상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1980년대 중국에서 제작된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정치와 예술의 변증법적 관계를 살펴보자.
[Gettyimage]
모든 것은 한 장의 그림으로부터
5세대의 관심사는 ‘중국적인 것’이었다. 10년간 지속된 혁명 기간은 반문화(反文化), 반지성, 경제적 고립, 전체주의로 요약 가능하며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억압적 시기였다. 5세대 감독들은 사회주의자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 미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농민’ 포스터를 청소년기 내내 보고 자랐다. 판화나 포스터에 기반을 둔 이 형식은 주로 첨단 농업기계, 가로등, 전화가 있는 마을을 그리면서 이상화된 사회주의를 재현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한 후, 마오(毛澤東) 시대의 이념과 결별하면서 예술 분야에는 어느 정도 자유가 허용되고 자신들의 뿌리를 찾으려는 심근문학(尋根文學)이 주류를 형성했다. 심근문학은 향토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풍습, 전통, 제의를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시장경제로 전환, 서양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중국적인 것이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발생한 일종의 국수주의적 예술 양식이었다.
5세대는 이상화된 사회주의자 리얼리즘에 대한 반감과 심근문학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세계를 그렸다. 문화혁명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은 이 세대는 천카이거(陳凱歌)의 ‘황토지(黃土地)’(1984)로 개화했고 ‘황토지’는 한 장의 그림에서 기원했다.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뤄중리의 작품 ‘아버지’. [베이징 중국미술관]
1982년 베이징영화학교를 졸업한 동기 중에 장이머우(張藝謀)는 매우 특별했다. 장이머우는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있던 스튜디오 대신 선배들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고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던 광시 영화 스튜디오로 갈 길을 정했다. 당시 광시 스튜디오에서는 황토고원(黃土高原)의 일부분이자 산시(陝西)의 북쪽에 자리한 산베이(陝北) 고원에서 민요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은 팔로군(八路軍) 병사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커란(珂蘭)의 소설 ‘깊은 골짜기의 메아리(深谷回聲)’를 접한 광시성 고위 간부가 이를 각색해 영화로 제작하길 원하자, 장이머우는 촬영 전공인 자신을 대신해 연출할 수 있는 동기 천카이거를 급하게 호출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끝없이 펼쳐진 황토색 대지, 야요동(窯洞)이라 불린 황토로 지은 토굴집, 그 지역 민요를 일컫는 신텐요(信天游) 그리고 무엇보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이 고원에 사는 모든 나이 든 남자들의 얼굴은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뤄중리의 작품 ‘아버지’를 현실로 불러낸 듯했다. 천카이거가 영화학교를 졸업한 이후 마주한 그림 한 장으로 인해 중국 영화의 신기원을 이끈 5세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검열로 영화를 탄압하다_‘황토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지그재그 3부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포스터(왼쪽부터). [IMDB]
그러나 ‘황토지’를 보고 난 후 고원에 대한 물컹한 생각을 깡그리 지워야 했다.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불모의 땅, 그 땅에서 남매를 키우는 마흔여덟 살의 아버지는 칠순 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추이차오는 민요를 수집하러 이곳에 온 팔로군 병사 구칭과 교류하면서 세상에 눈을 뜬다. 추이차오는 그로부터 “여자도 글을 배울 수 있고 머리를 기르지 않아도 되며 남자들과 똑같이 대우받는” 군대(팔로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이 꿈을 실현해줄 사람은 구칭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듬해 봄이면 계약 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다. 곧 돌아온다던 구칭은 소식이 없고 결혼식을 치른 추이자오는 그날 밤 신방을 뛰쳐나와 황하의 거친 물살에 조각배를 띄운다. 이때 화면에는 황토지에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이 부르는 서글픈 신텐요가 배경으로 깔린다. 과연 추이차오는 무사히 황하를 건넜을까. 모든 서사에서 불행은 늦게 나타난 정인(情人) 때문에 벌어진다. 구칭 역시 소녀의 연정과 꿈이 자신을 통해 발화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그는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고원에 도착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무심하게 늦은 ‘오빠’가 밉고 혹시나 거친 황하에 추이차오가 수장된 것이 아닌지 염려하며 하릴없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데 덩샤오핑(1904~1997) 당시 중국 주석은 이 영화에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렸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은표범상까지 받아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 아름답고 눈물 나는 작품을 도대체 왜 상영을 금지했을까. 덩 주석은 심지어 팔로군에서 정치위원까지 지낸 인물이 아니던가. 어떤 점이 영화가 금지되도록 만들었을까. 이유는 단 하나, 고원 지방의 풍습, 즉 매매혼과 남녀차별이 사회주의 이념과 배치되는데, 영화가 이를 너무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데 있었다.
이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가 ‘어느 가족(万引き家族)’(2018)으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일본의 치부를 그렸다면서 축전도 보내지 않았다. 천카이거가 전근대적 풍습을 옹호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영화는 그로 인해 파멸한 인간에 초점을 맞췄지만 실권자가 느낀 ‘수치심’을 이길 수는 없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이런 사태는 반복됐다. 6세대의 선두주자 지아장커(賈樟柯)는 똑같은 이유로 ‘산하고인(山河故人)’(2015) 이전의 모든 영화 상영을 금지당했다.
영화로 마오주의와 타협하다_‘부용진’
셰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부용진’ 스틸컷. 1989년 7월 8일 호암아트홀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한·중 수교를 위해 암암리에 전령 역할을 담당했다. [IMDB]
혁명 이전 쌀두부 장사로 많은 돈을 번 호유인은 국영 상점을 운영하던 리궈샹의 모략으로 전 재산과 집을 압수당한다. 유인의 남편은 리궈샹에게 복수하려다 투옥되고 분에 못 이겨 자살하고 만다. 혁명기에 접어들면서 부용진의 주민들은 당의 통제로 인해 더 힘든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반동분자 진서천은 호유인을 돌봐주면서 사랑이 싹트게 되고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겨 결혼하려 한다. 하지만 당 간부가 된 리궈샹은 그들의 거처에 ‘한 쌍의 개 부부’라고 써 붙이라고 명령한다. 규율을 어기고 결혼한 것을 괘씸하게 여긴 당은 남편 진서천에게 10년형을, 아내 호유인에겐 임신한 것을 감안해 집안 칩거형 3년을 선고한다.
혁명이 끝난 어느 날, 힘들게 홀로 아들을 키우던 호유인에게 부용진의 당 서기가 찾아와 집과 압수했던 돈을 돌려준다. 형기를 마친 남편도 돌아와 호유인의 쌀두부 장사를 돕는다. 혁명 기간 리궈샹의 보호 아래,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한 왕추샤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미쳐버린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동네를 돌면서 혁명을 부르짖는 그를 보면서 진서천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왕추샤 저자의 말이 맞았겠죠”라고, 자신에게 당직을 제안하는 리궈샹에게 말한다.
‘부용진’은 문화혁명이 인민을 삶을 어떤 식으로 유린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중국 정부 처지에서는 허용하기 힘든 영화였다. 두 해 전 제작된 ‘황토지’에 상영 금지 처분을 내린 광전총국(廣電總局)의 검열 지침에 그동안 변화가 생긴 것일까.
덩사오핑은 마오쩌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 ‘4인방’을 처단한 후, 서구식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그는 신앙처럼 굳건한 ‘마오이즘’에 완벽하게 등을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우회로를 선택했다. 여전히 혁명을 부르짖는 왕추샤를 광인으로 설정하고 가장 피해를 본 진서천의 입을 통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왕추샤 저자의 말이 맞았겠죠”라는 대사는 흑묘백묘를 설파한 덩샤오핑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 하지만 마오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어서, 문화혁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리궈샹을 제재하지 않는 선택 역시 탁월하다고 여겼다. 영화를 통한 적당한 타협, ‘부용진’은 덩샤오핑 정부가 골머리를 앓던 딜레마를 단번에 해결해 줬다.
영화로 사회주의 이상을 구현하다_‘붉은 수수밭’
노벨상 수상 작가 모옌의 원작을 각색한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 스틸 컷. [IMDB]
주인을 잃은 양조장 일꾼들이 뿔뿔이 흩어지려는 순간, 추알은 모든 이익을 공평하게 나눌 것을 선언하면서 그들을 붙잡는다. 추알을 성심성의껏 돕던 집사 라오한은 위진아오가 본격적으로 추알의 남편 행세를 하자,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다. 평안한 세월을 보내던 마을에 중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들이닥쳐 도로 건설에 주민들을 동원한다. 반항하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처형하는데, 이들 중에 양조장 집사 라오한이 있다. 그는 살갗이 벗겨지는 고문 끝에 눈을 감는다.
추알은 9년 전 라오한이 양조장을 떠날 당시 제조한 술을 제주(祭酒) 삼아 일꾼들과 나눠 마시며 복수를 다짐한다. 남자들은 수수밭에 고량주와 폭탄을 묻어두고 일본군 트럭이 지나기만을 기다린다. 식사를 나르던 추알은 일본군에게 발각되고 총에 맞아 허무하게 죽고 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위진아오와 일꾼들은 화약을 터뜨리고 고량주에 불을 붙여 트럭에 불을 지른다. 하지만 일본군의 총알 세례 속에 일꾼들은 모두 죽고, 위진아오와 아들만 살아남는다. 때마침 일식이 시작되면서 수수밭은 온통 새빨갛게 물들고 추알의 극락왕생을 비는 아들의 노래 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붉은 수수밭’은 천카이거의 ‘황토지’와 달리, 서사가 분명하며 흥겨운 춤과 재담으로 관객의 시선을 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황토지’처럼 매매혼으로 팔려가지만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 추알을 그린다. 그녀는 남편이 전근대적으로 운영하던 양조장을 ‘사회주의’식으로 바꿔 놓는다. 추알은 자신이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익을 공평하게 나눌 것이라고 천명한다. 추알로 인해 십팔리의 양조장은 사회주의 이념이 재현되는 이상적 공간으로 변한다.
후반부는 그들의 천국이 일제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서사가 주를 이룬다. 자신을 돈 몇 푼에 팔아치운 전근대적 악습에 대한 추알의 분노는 어느 순간 제국주의로 향한다. 일제의 총칼 앞에 추알이 장렬히 산화하는 와중에도 인민을 상징하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수수밭은 일식의 기운을 밭아 이 세상에서 가장 찬연한 빛을 발산한다.
‘붉은 수수밭’은 중화권에서 출시된 영화 중에 사회주의 강령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부자가 스스로 책임감을 느껴 가난한 자들의 손을 잡는 전반부의 서사는 예술이 혁명에 복무하는 최선의 예를 제공한다. 이와 달리 후반부 항일 서사는 고량주, 붉은 수수밭, 일식을 동원해 영화 속 시공간을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광란의 제의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붉은 수수밭’은 중국 영화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다. 이뿐만 아니라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원시적이면서 아름답게 재현함으로써 인민에게 혁명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