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이후 당원과 국민 동시 지지받은 대권주자
전당대회 거치며 윤 대통령과 차별화 성공
중도층·청년층 낮은 지지세 극복은 과제
경제민주화 시즌2로 민생 우선 가치 선점해야
1월 10일 부산을 찾은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주변에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뉴시스]
야권은 한동훈 당시 위원장이 “부산과 인연이 있음을 강조하려고 있지도 않은 롯데자이언츠 팬심을 드러낸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한 위원장은 2008년 부산에서 검사로 근무하던 시절 사직구장을 찾은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그는 2007∼2009년에 이어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던 2020년 상반기에도 좌천성 인사로 부산에서 근무했다.
그가 롯데자이언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사자가 “부산에서 좋은 추억이 많다”는 데 딴지를 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원래 정치인이란 서울에서 태어났어도 영남 가면 “엄마 고향”, 호남 가면 “부인 고향”이라고 하는 사람들 아닌가. 설령 진심이 아니라고 한들 그걸 판단하는 건 그 지역 유권자의 몫이다.
1월 10일 부산을 찾은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992’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다. [뉴스1]
현장에 있던 관계자들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한나라당 시절부터 보수정당에서 20년 넘게 일한 한 당직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 이후 이 정도 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또 다른 당직자는 “시민들의 환호가 지난 대선이나 황교안 대표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며 “한 위원장과 악수 한번 해보고 싶어 다가오는 분이 너무 많아 현장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한동훈 위원장이 이끄는 국민의힘이 전국적으로 대패하는 와중에도 부산에서는 표 결집에 성공했고, 그 기세가 7월 전당대회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보수의 아이돌’ 한동훈
윤석열 정부 초반부터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긴 했지만,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앞에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20년을 함께 일한 윤석열 대통령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 또 다른 하나는 언제 정치권에 등판할 것인지였다.
먼저 차별화. 윤 대통령이 임기 후반부에 높은 지지를 얻을 거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은 차기 대권 주자에게 큰 부담이다. 더군다나 한 대표는 윤 대통령과 한식구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시점도 문제다. 한참 잘 지내다가 막판에 대선 나간답시고 선을 긋는다 한들 유권자들이 믿어줄 리 없다. 그런데 이 어려운 문제가 얼떨결에 해결됐다. 김경율 비대위원의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이 계기가 됐으리라. 1월만 해도 ‘약속 대련’ 의혹이 불거져 나왔지만 이제 윤 대통령과 한 대표 사이 갈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그는 누구보다 선명한 ‘반윤’ 인사가 됐다.
그리고 정치권 등판 시점. 지금에야 별거 아닌 일이 됐지만 지난해 12월 초까지만 해도 ‘언제 전면에 나서느냐’는 법무부장관 한동훈에게는 큰 고민거리였다. 너무 일찍 등장하면 자칫 신선함을 잃을 수 있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 등장했다간 실기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이 난제도 반강제적으로 풀렸다. 국민의힘이 12월 말, 총선 구원 투수로 법무부장관 한동훈을 호출했다. 당은 정치 경력이 하나도 없던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더불어민주당에 비하면 공천 잡음도 거의 없었다. 그는 정치 신인이었지만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다. 최소한 선거에서 참패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의 한동훈을 두고 ‘황교안 시즌2’가 될 거라는 전망이 나돌았다.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력에, 보수 핵심 지지층이 열광하는 인물이라는 점도 비슷했다. 결과적으로 그 전망은 틀렸다. 2020년 제21대 총선 참패 이후 빠르게 잊힌 황교안 전 대표와 달리 한동훈은 선거 참패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세를 유지했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보인 압도적 승리는 보수의 패권이 그에게로 넘어갔다는 걸 선언하는 일종의 대관식이었다.
한동훈이 ‘중도’로 보인 마법
현역 정치인 중 지금까지 ‘자기 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 명밖에 없다. 이재명, 조국, 이준석이다. 이들은 자신의 발언으로 여론을 움직일 수 있고, 당을 새로 만들면 일정 규모 이상 따를 사람들이 있다.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한동훈도 그 반열에 올라선 걸로 보인다. 그는 대통령과 친윤(親尹) 의원들의 온갖 견제에도 불구하고 큰 승리를 따냄으로써 ‘보수의 아이돌’이 됐음을 입증했다. 그런 점에서 한동훈 대표 체제는 ‘황교안 시즌2’보단 ‘박근혜 시즌2’에 가깝다.
한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당심에서도, 민심에서도 모두 크게 이겼다. 공교롭게 선거인단 투표(62.65%)와 여론조사 환산득표(63.46%) 수치도 거의 비슷했다. 언뜻 보면 그는 대통령과 선을 그으면서 당심과 민심을 모두 사로잡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착시가 있다. 상대가 모두 친윤으로 수렴했다는 점 때문이다. 만일 당대표 선거에 유승민 전 의원이 출마했다면 당심은 한동훈으로, 민심은 유승민으로 쏠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준석 의원이 국민의힘에 남아 있어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어도 비슷했을 것이다. 원희룡 전 국토부장관이 막무가내로 대통령을 옹호했기에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 한 대표도 윤 대통령과 대립한 걸 빼면 딱히 중도적 어젠다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끝나고 공개된 한국갤럽 정기조사(데일리 오피니언 제592호)에 따르면, 중도층에서 ‘장래 대통령감’으로 한동훈을 꼽은 사람은 13%에 불과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1%였다. 반면 상대 진영의 비호감도는 높았다. 진보라고 응답한 사람의 6%만이 그를 ‘장래 대통령감’으로 꼽았다. 보수층이 이 대표를 선택한 비율(10%)보다도 낮았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한 대표의 핵심 지지층은 보수의 핵심 지지층과 거의 일치한다. 이념적으로는 보수, 나이는 60대 이상, 직업적으로는 자영업자·블루칼라·주부 등이다. 성별은 어느 한쪽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모양새다.
이재명의 ‘개딸’에 이어 한동훈의 ‘한딸’이 등장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은 그의 탄탄한 당내 입지를 방증한다. 따라서 그에게 당 내부적 이유로 위기가 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표 선출 직후 정책위의장 거취나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 문제로 그가 당대표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런 우려도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이미 보수의 패권 자체가 한 대표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 외부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 중도층·청년층에서 한 대표 지지율이 너무 낮다. 그는 줄곧 자신이 X세대임을 어필했지만 동 세대는 물론 그 아래 세대인 MZ세대에서도 민주당 이 대표에 밀리는 형국이다. ‘86 운동권 청산’ 이미지는 ‘비명횡사’ 공천을 단행한 이 대표에 의해 상쇄됐다. 게다가 이 대표는 자신의 오랜 브랜드인 ‘기본사회’와 더불어 먹고사는 문제를 뜻하는 ‘먹사니즘’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데 반해, 한 대표는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반대편에 서는 것만으로 중도·수도권·청년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지난 총선이 명확히 보여줬다. 그렇다면 그와 그의 측근들은 어떤 어젠다를 내놓을 것인가. 청년 표심 잡겠다고 ‘청년정책 패키지’를 내놓는 식이라면 대권은 요원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10년 전에 했던 방식이다. 앞으로 2년 반, 이 부분을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한 대표 본인의 대권은 물론 보수 진영의 운명도 결정지을 것이다.
중도로 외연 확장할 어젠다는 준비됐나
7월 23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한동훈 신임 대표가 당기를 흔들고 있다. [뉴시스]
윤 대통령이 대주주 아니었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윤 대통령의 당내 입지란 머물렀다가 떠나는 정거장과도 같았다. 보수 진영에서 그가 진짜 ‘자기 표’라고 할 수 있는 표는 많지 않다. 자력으로 거머쥔 대권이 아닌 이유에서다. 국민의힘 입당부터 대통령 당선까지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이 윤 대통령을 지지하게 했던 원동력은 그의 매력이 아니라 반(反)문재인, 반이재명 정서였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많은 유권자가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로 ‘상대방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 ‘정권 심판을 위해서’라고 응답했다. 상대방이 싫어서 행하는 투표로 얻은 권력은 사상누각이다. 윤 대통령은 그 사실을 망각했고, 결국 돌아선 후배의 당권 장악을 허무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7월 전당대회에서 한 대표가 당심과 민심 모두 63%에 달하는 지지를 얻은 건 그 의미가 적지 않다. 비록 약간의 착시가 있긴 하더라도, 국민의힘으로선 박 전 대통령 이후 오랜만에 당심과 민심을 모두 얻은 인물이 등장했다. 이로써 한 대표에게는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 그동안 국민의힘은 민심을 얻은 후보는 당심을 얻지 못하고, 당심을 얻은 후보는 민심을 얻지 못하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이는 박근혜 이후 누구도 당심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 결과 보수정당의 리더들은 하나같이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에 휘둘렸다. 중도 행보를 걸었다간 자칫 지지기반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렇게 보수정당의 시선은 지난 몇 년 동안 탄핵 무효, 부정선거, 운동권 청산 같은 구시대적 담론에 머물렀다. 이준석 전 대표가 그나마 예외적 사례인데, 그 역시 보수 지지층을 장악한 건 아니었다. 그보단 2030 남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보수 진영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고 보는 게 맞다.
보수 지지층의 열렬한 성원을 등에 업은 한 대표 앞에는 새로운 과제가 놓였다. 외연 확장이다. 총선 때처럼 운동권 청산이나 이재명·조국 심판에 연연한다면 외연 확장은 요원하다. 장담컨대 그 과제들이 여권의 주요 의제가 돼야 한다는 데 동의할 중도층이나 청년은 1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를 내걸어 중도층에 소구했듯, 지금까지 보수정당이 외면해 온 가치들을 선점해 나가야 한다. 전례는 있다. 그는 이미 법무부장관 시절 촉법소년 연령 하향, 사형제 부활, 이민 확대 등의 어젠다를 공론장에 띄웠다. 어떤 의제를 어느 정도 수준에서 제시할 수 있을지는 그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물론 그걸 평가하는 건 국민의 몫이다.
신동아 9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