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창간호에 실린 ‘신동아’ 만평(아래)에서 영감을 얻어 약간의 그림 수정과 색채를 더했다. ⓒ정승혜
가수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는 요릿집에 들른 신사가 돈이 없어 뒷문으로 도망치다가 겪는 에피소드를 해학적으로 담았다. 아버지가 모아준 전 재산을 털어먹고 차비도 없이 덜렁덜렁거린다는 가사는 당시 시대상을 잘 표현한다.
1931년 고급 요릿집은 단순히 조선·궁중 음식을 먹는 식당이 아니다. 시, 서화, 음률을 갖춘 기생들의 가무를 향유하는 공연장이자 무도회장이었다. 음식값에다가 기생과 악사들 일당까지 치면 요릿집 한 번 다녀가는 비용은 가정집 한 달 생활비보다 많았다. ‘천향원’을 연 기생 출신 김옥교는 오늘날 돈으로 시가 6억 원 상당의 자동차를 운전해 화제가 됐고, 당대 최고 요릿집 ‘명월관’ 본점에는 직원 120여 명이 연 20만 원(260억 원) 매출을 올렸다. “땅을 팔아서라도 요릿집 기생 노래 들으며 취해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은 당시의 인기를 대변한다.
1931년 ‘신동아’ 창간호에 실린 만평(아래)은 오늘날 의대 입시를 위해 등골이 휘는 ‘에듀 푸어’ 부모와 닮은꼴이다(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 입시반이 생긴 지도 오래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3040 직장인들도 의대 입시학원으로 줄을 선다. 하긴 정부와 ‘맞짱’ 뜨는 직업군이 의사 외에 또 있을까. 93년 전 요릿집이나 오늘날 의대 입시학원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31년 ‘신동아’ 11월호(창간호)에 실린 ‘조선의 표정’ 풍경 2제 중 한 컷. [동아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