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당원 가입 도입 후 ‘천만 당원 시대’ 열려
‘이재명의 민주당’ 시대에 권리당원 두 배 증가
대권 향배 가를 중도층 정서, 민주당 강성 당원과 달라
8월 1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 KSPO돔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이 이재명 대표 후보를 박수로 맞이하고 있다. [동아DB]
여당 대선 주자들은 보통 대통령 지지율이 높으면 거기에 편승하고 낮으면 선을 긋는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인기가 많다고 보기도, 그렇다고 없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의 당내 입지가 탄탄하다는 점도 문제였다. 문 대통령의 팬덤 ‘문빠’는 건재했고, 원내에서도 친문 의원들이 전례 없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7년 대선 경선 때의 갈등을 생각하면 여당 대선 주자가 된 이재명 후보로선 대단히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이재명 후보가 선택한 건 개인기를 통한 정면 돌파였다. 그는 ‘이재명의 민주당’을 내걸고 당이 아닌 자신을 전면에 앞세웠다. 복지부동하는 친문 의원들을 건너뛴 채 대중과 직접 소통했다. 라이브 방송,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시기 그를 따르는 대중이 대거 민주당으로 유입됐다. 훗날 ‘개딸’로 명명된 이들이다. 이들의 존재 덕분에 그는 대선에서 패배했음에도 온갖 책임론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반발하는 의원들 등쌀에 못 이겨 자의 반 타의 반 은퇴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연고도 없던 인천 계양을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고, 압도적 표차로 당대표 자리에 올랐다.
모든 언론이 ‘개딸 현상’에 주목했던 대선 전후는 더불어민주당 체질이 바뀌는 시기였다. 요즘 그들의 표현대로 하면 ‘당원 주권 시대’가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2023년 8월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오늘날 민주당 권리당원은 약 245만 명(2023년 6월 30일 기준). 그중 절반이 제20대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된 2021년 이후 입당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한 번이라도 당비를 납부한 적 있는 권리당원이 ‘이재명의 민주당’ 시대에 들어 두 배나 증가한 셈이다.
‘팬덤 정치’ 기반 마련한 노무현과 문재인
민주당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종종 “요즘처럼 정치효능감이 높은 때가 없었다”는 말이 나온다. 당원들 목소리에 정치인들이 즉각 피드백을 주고, 당원들의 공간(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찾아와 지지를 호소하고, 당원들의 요청이 국회 운영에 곧잘 반영되는 시기가 요즘 말고 또 언제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한국 정치에서 오랜 기간 당원은 객체에 머물러 있었다. 선거 때 지역에서 표를 모아 오거나 당 행사에 동원되는 존재에 그쳤다. 정당은 ‘차떼기’(?) 등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당원을 매집했다. 유권자들이 ‘돈 받고 당원이 돼주는’ 시대였다.영화 ‘노무현과 바보들’ 포스터.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당시 ‘노사모’는 적극적 선거유세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이크콘텐츠]
노무현 대통령은 ‘3김 시대’라는 묵은 정치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새 시대를 열고자 했다. 집권하자마자 정치개혁의 방아쇠를 당겼다. 후보 시절부터 발목을 잡아온 호남 세력과 결별하고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그들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참여’가 정치개혁의 핵심이라고 봤다. 그 일환으로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제를 본뜬 기간당원제를 도입했다. 기간당원은 오늘날의 권리당원으로 일반 당원과 달리 6개월 이상 당비를 납부하고 일정 횟수 이상 당 연수·행사에 참석해야 한다. 반대급부로 경선 투표권 등 당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다. 당원들의 적극적 참여를 정치 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은 한때 55만여 명까지 증가했다. 2000년대 중반 우리나라 전체 당원 수가 당비를 내지 않는 일반 당원을 포함해도 200만~300만 명에 그쳤던 걸 감안하면 대단히 많은 숫자였다.
민주당계 정당의 국민참여경선 흥행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당원을 바라본 한나라당 역시 2005년 비슷한 의미의 책임당원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소장파 그룹 ‘수요모임’ 대표였던 정병국 의원이 “우리 한나라당에서 책임당원을 모집하게 된다면 당비 대납, 동원 당원으로 넘쳐나 과거 구태 정치를 재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지도부의 눈에 들어온 건 그런 미래의 리스크가 아닌 눈앞의 흥행이었다. 양당이 경쟁적으로 당원을 모집한 결과, 2011년 우리나라 당원 숫자는 500만 명을 넘어섰다.
2016년 9월 3일 충남 서산시 서해안청소년수련원에서 열린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팬클럽 ‘문팬’ 창립행사에서 문 전 대표가 회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지역구 당원 중 95%가 유령 당원
당원 수의 폭발적 증가가 한국 정치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정당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보스’에서 ‘당원’으로 이전됐다는 점이다. 보스에 줄을 서고 조직을 물려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당원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면 당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노무현이든, 문재인이든, 이재명이든 누구 한 명에 의해 급작스럽게 생겨난 게 아니다. 정치개혁, 정당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2000년대부터 꾸준히 진행돼 온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새천년민주당이 2002년 국민참여경선으로 큰 재미를 본 이래 주요 정당들은 대부분 경선 흥행을 위해 국민이나 당원의 참여를 적극 유도했다. 이는 대선은 물론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의원 선거 같은 낮은 단위에도 적용됐다. 일반 국민의 참여를 늘리기 위해 당원의 경선 참여 문턱을 대폭 낮추기도 했다. 2000년대에 월 2000원이던 최소 납부 당비가 오늘날 1000원인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정당의 대사(大事)에 참여하는 당원이 는다는 건 언뜻 시민의 정치적 소양이나 사회참여가 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선거가 다가오면 각 정당의 시·도당에는 입당원서가 쏟아진다. 경선에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예비 후보자들에 의해 동원되는 ‘경선용 당원들’이다. 이들은 권리당원(책임당원)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간, 최소한의 금액만큼 당비를 납부하고 경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한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면 당마다 당원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촌극이 빚어진다. 이들은 전통적 의미의 당원이라기보다는 ‘슈퍼스타K’ ‘프로듀스101’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을 우승시키기 위해 문자 투표하는 시청자에 가깝다.
같은 맥락에서 ‘유령 당원’도 횡행한다. 지인의 부탁으로 개인정보를 넘겨주고 당원 가입을 위임하는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자신도 모르는 새 당원으로 가입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정 정당이 독보적 입지를 차지해 본선보다 경선이 더 치열한 지역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일례로 2023년 민주당 광주광역시당이 정체가 미심쩍은 당원 6만 명을 조사했는데, 지역별로 많게는 95%가 ‘유령 당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150만 인구에 ‘39만 민주 당원’(2023년 기준)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다. 모르긴 몰라도 대구·경북 지역 국민의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원조 친명’도 내치는 ‘개딸’들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정당 체계를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으로 구분했다. 간부정당은 의원과 사회 엘리트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정당, 대중정당은 다수 당원의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되는 정당이다. 언뜻 간부정당보다는 대중정당의 형태가 민주주의 원칙에 더 부합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늘 이상을 배반한다. 때로는 다수 대중의 참여가 지도자의 권위적 지배를 위장한다. 민주당의 8·18 전당대회에서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이재명 대표 한마디에 김민석 의원에게 표가 쏠린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리더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당원들의 표를 몰고 다니지만, 의사결정에 따르는 책임은 지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당원들이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원들의 참여가 본격화한 문재인 정부 이후 민주당에서는 비례 위성정당 창당(2020), 서울시장·부산시장 후보 배출(2021) 등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결정을 당원들의 선택에 위임하는 일이 반복됐다. 거센 비판이 있었지만 그 결정에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당원들의 참여가 ‘알리바이’를 제공해 줬기 때문이다.
당원들의 참여가 늘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국회미래연구원이 2023년 5월 발간한 보고서 ‘만들어진 당원 : 우리는 어떻게 1000만 당원을 가진 나라가 되었나’는 당원 수가 대폭 늘어난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분열이 잦고, 풀뿌리 지역 조직에 참여하는 당원은 늘지 않았으며, 정당 간 증오와 적대를 주고받는 양극화 정치는 심화됐다”고 분석했다.
강성 당원에 의한 팬덤 정치의 폐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그 배타성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선거 당시 추미애 의원이 우원식 의원에게 패배하자 2만 명 넘는 당원이 집단 탈당한 사실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 의장은 20대 대선 경선 시절부터 이재명을 도왔던 ‘친명 중의 친명’이다. 이재명 대표에게 쓴소리했다가 수박으로 낙인찍힌 ‘7인회(원조 친명 그룹)’ 김영진 의원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이런 이들마저 품지 못할 정도로 오늘날 민주당 일부 당원들의 배타성은 극단을 향해 가고 있다.
‘당원 주권 시대’를 천명한 이재명 대표는 앞으로도 자신의 열성 지지층에게 정치참여의 문호를 개방할 걸로 보인다. 이미 민주당은 국회의장과 원내대표 선거에서 권리당원 투표를 20%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국회의장부터 기초의원까지, 민주당에서는 적극적으로 투표하는 ‘깨어 있는 시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치인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사이다같이 시원한 정치를 원하는 이들에게 정치인들이 어떤 정치를 보여줄 건지는 자명하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기본 작동 원리는 점점 더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자신을 위해’ 당원들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머지않아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당심을 완전히 장악한 그로서는 민심을 잡아야 하는 과제만 남겨두고 있는데, 우리가 민심이라고 표현하는 중도층의 정서는 강성 당원들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호지세(騎虎之勢), 달리는 호랑이 등에 한번 올라타면 중간에 내리기 어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신동아 10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