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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과학 논쟁 좀더 치열하게 붙어라

新과학 논쟁 좀더 치열하게 붙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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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신과학을 둘러싼 과학계의 논쟁은 그 자체가 좋은 논쟁을 위해서 필수적인 격렬성과 진지성을 충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하다.》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한지 반세기도 더 지난 현시점에 누가 필자에게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사회적인 논의 또는 논쟁이 부족하다”고 답하겠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는 어떤 사안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또는 어느 의견이 다른 의견보다 낫다는 식의 상대적인 평가를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라면 온 국민의 중지를 모으느라 몇 년 혹은 10년도 더 걸리는 일이 한국에서는 하루 아침에 결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요즘에는 IMF 사태의 영향으로 그래도 국가적 대사라고 부를 만한 일을 새로 추진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지금도 공사가 진행중인 영종도 신공항이라든지 경부고속철도, 새만금 간척사업 등은 공사 경비가 몇 조원씩 소요되고, 또 환경이나 지역 주민의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대공사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업들이 처음 제안돼 공식적으로 추진이 결정되기까지는 불과 몇 달, 기껏해야 1년 미만의 짧은 기간이 소요된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사업을 결정하는 과정에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다거나 관련 분야 사람들의 의사를 묻는 일은 애당초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서둘러서 추진했던 일의 결과는 지금 어떠한가? 그런 사업들은 대부분 공사비가 원래 계획보다 몇 배씩 더 들어가고, 공사 기간이 몇 년씩 더 연장되는 것은 물론 공사가 진행중인데도 벌써 사업의 경제성마저 의심받는 일이 흔하다.

중요한 사회적 제도나 정책들도 충분한 검토 없이 진행되기는 마찬가지다. 대학입시 제도나 의료보험 제도 등은 물론 그린벨트 해제나 의약분업, 사법 개혁, 선거법 개선 등의 문제들은 일단 정책이 결정되면 그 영향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거의 전국민에게 미친다. 각각의 사안이 이렇게 중요한 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심각한 논의와 논쟁이 미약한 형편이다.



과학계도 토론문화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우리 나라의 토론문화는 척박하기 짝이 없다. 언론은 주요 사안을 토론 주제로 다루기를 아예 회피하거나 설령 다뤄도 핵심을 잘못 짚기가 일쑤고, 그런가 하면 토론과 논쟁에 나서는 관련 당사자들은 물론 해당 분야 전문가들조차 합리적이고 공정한 논리의 제시보다는 아전인수식의 자기합리화나 막무가내식 억지 논리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봐왔다.

이런 세태 탓이겠지만 과학 분야에서도 때로는 사회적 논의와 논쟁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리둥절할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논쟁이라면 어느 한 편이 옳고 상대편은 틀렸다고 무 자르듯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사안들에 대해서나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인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과학은 모든 것이 마치 수학 문제처럼 절대적인 해답이 분명한 세계로 여겨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과학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나 학문보다 엄밀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과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리 공방이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논쟁이야말로 과거의 낡은 이론이 무너지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과학의 어떤 분야에서 더 이상 논의와 논쟁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이제 발전 가능성이 없는 학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또 이렇게 논의와 논쟁이 없는 과학자 집단이라면 그 집단의 발전 가능성도 그만큼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만약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활발함 정도를 그 집단의 발전 가능성의 지표로 삼는다면, 우리 나라 과학계의 현실은 자못 심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과학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와 논쟁의 질과 양을 따져볼 때 우리 과학계의 실정 역시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선진국 수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과학계에 논쟁과 논의가 그토록 빈약한 것을 크게 우려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최근 우리 과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한 주제에 대해서 그 논쟁의 전말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계에서의 작은 논쟁 하나를 굳이 독자 여러분에게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런 작은 논쟁을 통해서 우리 과학계가 자기 발전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어보기 때문이다.

대학에는 왜 그렇게 학과가 많나

과학의 분야는 대단히 넓다. 물리학, 수학, 화학, 생물학 등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과목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종합대학교의 자연과학대학에는 천문학, 지질학, 해양학, 기상학 등 다양한 학과가 보통 10개 이상씩 개설돼 있다. 또 이런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을 이용해서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주력하는 응용과학 대학들, 예컨대 공과대학이나 농과대학(최근에는 농업생명과학대학 등으로 명칭이 바뀌고 있다), 의과대학, 가정대학들에 개설되어 있는 학과목은 또 얼마나 많은가. 물리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역학, 광학, 전자기학, 이론물리학, 양자역학, 통계물리학, 우주론 등등 그 수효가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에 달할지도 모르겠다.

일반인이 과학을 가장 친밀하게 접할 수 있는 현장이라면 아마도 병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이뤄지는 모든 진료행위가 바로 현대과학에 기초하고 있고, 또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식 종합병원에 개설돼 있는 진료과목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가. 외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과거 20∼30년 전만 해도 그 수가 기껏해야 열 개를 넘지 못했던 진료과목이 요즘에는 100개를 훌쩍 뛰어넘어 이제는 아무도 그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의 학과와 학과목이 세분돼 있고, 병원의 진료과목이 다양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과학의 세분화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과학이 세분화하는 만큼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또 그만큼 우리 생활이 편리하고 윤택해지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병원의 진료과목이 다양해질수록 질병 치료와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런 진료과목의 다양화가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더욱 불편하게 하고 진료비 증가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전체적으로 진료과목의 다양화가 불러올 수 있는 장단점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 이익이 될까 아니면 손해가 될까?

먼저, 현대에 이르러 과학 분야가 그처럼 세분되고 있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과학 혁명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와 뉴턴으로, 이들은 모두 17세기 인물이다. 데카르트는 이 세상이 시계처럼 정확히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라고 선언했으며, 과학은 그 기계를 움직이는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가르쳤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에 따르면 천체의 운행에서 풀잎이 자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현상들은 모두 정확한 수학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고, 그렇게 수학으로 나타내려면 주어진 현상을 일일이 점검하는 분석적 방법론이 필요해진다.

데카르트의 연구 방법론은 이런 식이다. 우리가 데카르트 시대로 돌아가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라고 가정해보자. 당시 천문학자들은 데카르트보다 한 세대 먼저 태어났던 케플러나 갈릴레오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천체의 움직임을 매일매일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관찰기록이 충분히 축적됐을 때 그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우리는 어떤 별이 지구처럼 태양의 둘레를 도는 행성이고 또 어떤 별이 태양과 같은 항성(恒星)이면서 그것들이 지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즉 별 하나하나 또는 별자리 하나하나에 대해서 세심한 관찰을 먼저 수행하고, 그 자료들을 일일이 검토해서 각 별들 또는 별자리들의 특성을 밝힌다면 궁극적으로는 그런 지식들이 모두 모여 전체 태양계와 우주의 운행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의 분석적 연구방법론이란 이처럼 연구의 대상을 분해해서 그 각각을 연구해 결국은 연구대상 전체에 대한 지식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환원주의

데카르트는 이 세상을 신이 만든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단언했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존재도 당연히 기계로 이해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기계는 감성을 느끼지 못하고 정신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기계로서 인간 육체는 정신과 분리된 존재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은 물질과 정신은 분리된 존재이고, 물질은 기계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자연법칙에 따라 설명이 가능하지만 신의 영역인 정신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처럼 정신과 육체가 서로 분리된 존재라는 사상을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라고 하는데, 이는 물질기계론 및 분석적 연구방법론과 함께 과학사에 남은 데카르트의 3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분석적 연구방법론은 과학적 용어로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한다.

데카르트가 남긴 물질기계론, 심신이원론, 환원주의적 연구방식은 현대 과학의 기반이자 또한 과학을 수행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은 지난 300년 동안 과학 발전을 이끌어왔고, 또 현재도 과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학에 왜 그렇게 많은 학과가 개설돼 있는지, 그리고 과학이 발전할수록 대학의 학과 수와 학과목은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을 비롯한 모든 세상사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구하려면 각각의 대상들을 더 작은 단위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조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들은 과학계는 그렇다고 해도 왜 대학의 인문사회 계열과 예술 계열조차 학과가 세분되어 있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답은 이렇다. 현대에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과학계 밖에까지도 깊숙이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예술계에서도 그런 경향을 따르는 것이다.

의사들이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은 완벽히 데카르트적이다. 먼저 의사들은 환자의 몸을 하나의 기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마치 시계의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듯 환자의 아픈 부분을 살펴서 그 부분을 수술하거나 내복약을 복용시켜서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것을 임무로 여긴다.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에게 있어서 환자의 몸이 아픈 것과 환자의 마음이 아픈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서 질병의 심리적 차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으며 정신병을 치료하는 데에 신체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질병 치료에 있어서 의사들은 그 병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치료의 성공률도 높아진다고 확신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이제는 관절염만 해도 병세에 따라 수십 가지로 나뉘고, 치료 방법도 달라진다. 그렇다 보니 병원의 진료 과목은 점점 더 세분되고, 그 결과 의사들은 만물박사가 될 수 없는 나머지 자기가 전공하는 질병에만 매달리는 전문의 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전문의 제도는 의사들로 하여금 그들을 점점 더 좁은 전문 영역으로 몰아넣는 경향을 낳았다. 그래서 이제는 소아과가 아예 아동병원으로 분리돼 그 속에 소아내과니 소아외과니 하는 무수히 많은 진료과목들이 포진하게 됐으며, 어떤 의사는 오직 어린이 환자의 위(胃)만 들여다보는가 하면 또 어떤 의사는 항문만 다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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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환경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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