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부 - 남한보다 우월한 북한 자연의학 ]
“김일성은 음악명상을 즐겼다. 그는 인민들이 현장에서 녹음해 보내주는 솔바람 소리, 파도 소리 등을 틀어놓고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을 했는데, 특히 백두산 밀림의 눈보라 소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가 사용하는 만년필에서 이렇게 녹음된 음악이 흘러나오도록 했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음악명상 요법을 가리켜 ‘김일성 수령이 원대한 구상을 펼쳤다’고 말한다. ‘구상’이라는 말은 오로지 김일성만이 쓸 수 있는 단어지 인민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연구하는 ‘장수연구소’는 이외에도 과학적으로 효능이 입증된 갖가지 자연요법을 개발해냈다. 연구소에는 김일성과 비슷한 키와 몸무게와 체질을 갖고 있는 인간 모르모트가 여럿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 김일성과 똑같이 먹고 자는 등 항상 김일성과 비슷한 신체상태를 유지하도록 관리됐다. 연구소 연구원들은 중국 등지에서 귀한 약재들을 이용한 신약을 개발하면, 그들에게 먼저 투약하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효과를 면밀하게 검토해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 비로소 김일성에게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 개인을 위해 장수연구소에서 개발한 자연요법은 현대인들의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김일성은 32가지 한약재가 들어 있는 특수 베개를 자고 잤는데, 이는 ‘의방유취’(조선 세종 때 편찬된 의학 백과사전)에 나오는 ‘신침(神枕;신선이 베는 베개)요법’으로 두통·혈압·불면증 등 머리 병을 없애주고 풍증을 예방하며 장수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검증됐다.
또 김일성은 각종 질병 예방 및 치료 효과가 있는 ‘오목수(五沐水;한약재를 이용한 목욕법) 요법’를 즐겼으며 당 고급간부들도 몰래 따라할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김일성은 양 손바닥을 뜨겁게 마찰하여 열을 낸 뒤 얼굴을 비롯해 온 몸을 마사지하는 ‘건욕’요법도 자주 했다. 건욕요법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는 누구나 하는 양생비법인데, 손바닥 마찰로 생체전기를 활성화시켜 인체의 자연 치유력을 높여주는 방법이다….”
북한 의학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평양의대 출신으로,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위해 만들어진‘장수연구소’연구원들을 감시 감독하는 공작원이자 북한 고위층 주치의로 활동하다가 92년 귀순한 김소연씨(52)의 증언이다. 국가안전기획부의 ‘비공개 귀순자’로 분류된 김씨는 한국에서 오랜 세월 ‘잠수’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서야 북한의 자연요법을 세상에 전격 공개한 것이다.
기자는 지난 1월초 북한 자연의학요법, 특히 김일성 건강비법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그녀의 사무실인 ‘보궁(保宮)자연요법연구소’(서울 신당동 소재)를 찾았다. 김씨는 북한식 자연요법과 식이요법을 일반인에게 보급한다는 취지에 호응한 몇몇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보궁자연요법연구소를 최근에 설립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귀순한 이후 97년 동국대 한의대 대학원에 진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올해에 학위 논문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씨는 92년 귀순한 이후 이제껏 침묵을 지키다가 말문을 연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1956년 당 대회 이후 옛 문헌에 나타난 선조들의 고려의학(한의학의 북한식 이름)과 민간요법을 과학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김일성 독재체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연요법을 의학적, 약리학적으로 분석 연구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주체의학’이라는 사상적 측면에서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 김일성의 무병 장수라는 큰 목표 아래서 맺힌 열매였다. 문제는 이런 열매를 인민에게 골고루 나누지 않고 김일성과 당 고급간부들만 향유했다는 것이었지만….
그런데 귀순해서 보니까 남한의 자연의학요법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반면 북한은 훨씬 앞질러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남한에서는 병 아닌 것을 병이라고 하고, 치료해야 할 병은 거꾸로 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북쪽에서 김일성, 김정일 단 두사람만을 위해 연구했던 고려의학과 민간 자연요법을 남쪽 사람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게끔 공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제는 남한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해도 적응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경락실체 밝힌 김봉한 교수를 만나
남한에 귀순하여 북한에 김일성, 김정일을 기쁘게 하기 위한 ‘기쁨조’ 존재 사실을 처음 알린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고 밝히는 김소연씨는 누구인가. 김씨가 밝히는 자신의 이력은 대략 이렇다.
그녀는 49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 전쟁 때 대학교수인 어머니를 따라 평양의 외가로 갔다. 그러다가 1960년 평양제10중학교 3학년 시절 어머니가 중앙당 지도검열에 걸려 숙청당하게 되자 어머니와 절친하게 지내던 한 ‘전사자 가족(혁명가 집안)’에 위장 입적된다. 당시만 해도 어수선해서 호적 정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던 때라서 얼마든지 친딸로 위장 입적이 가능했다고 한다.
확실한 공산당원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자란 그녀는 의사의 꿈을 키우게 된다. 64년 북한에서 명문으로 꼽힌다는 남포고등의학전문학교에서 ‘준의(準醫; 임상을 할 수 있는 준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곧바로 평양의학대학 본과에 입학했다. 그녀는 살을 꿰매는 수술 능력이 탁월해 외과에 배치받았다.
그런데 김씨는 평양의대에서 세계 최초로 경락(經絡)의 실체를 발견, ‘봉한학설’로 유명했던 김봉한교수를 만나게 된다. 북한 당국은 62년 평양의학대학에 동의학부를 설치한 후 산하에 경락연구소를 두어 김봉한교수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때 외과 집도 능력을 인정받아 김교수 밑으로 들어가 일하게 됐던 것. 여기서 그녀는 인체의 경락과 경혈을 비롯해 동의학 이론을 배워나갔다.
그러던 67년 김봉한교수의 유력한 후원자이던 박금철이 실각하게 되자 김교수 역시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을 당하고 만다. 여기에는 소련과 동독의 서양의학자들이 경락의 존재 및 ‘봉한 학설’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한몫했다. 소련을 위시한 선진 공산권으로부터 과학 및 기술 지원을 받고 있던 북한으로서는 난처한 상황을 면하기 위해 ‘봉한학설’을 매장시켜버렸던 것이다. 그때 김봉한교수의 제자였던 김소연씨는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봉한학설에 대한 숙청 작업이 한창일 때 나는 4차 당대회 선전선동 일 관계로 차출돼 10개월 간 경락연구소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나는 원래 남포의전 때부터 선전선동에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뽑혀나가곤 했다. 행사를 끝내고 돌아와 보니까 김교수를 비롯해 경락연구소 연구원들이 숙청돼 버린 상태였다. 나는 69년에 학교에서 테마로 지정해준 산부인과학 논문을 제출하고 의대를 졸업했다.”
이후 김씨는 인민군11호 종합병원에서 실습과정(인턴 과정과 비슷함)을 마치고 바로 그 병원에 배치됐다. 그러다 25살이 되던 74년에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는 군의(軍醫)가 되기 위해 인민군 군의대학에 들어갔는데, 실제로는 평양시 용성구역의 국가정치보위부 산하 정보원 양성소인 정치보위대학으로 배치돼버렸다.
거기서 김씨는 자신의 표현대로 당이 바라는 ‘가공인물’로 가꾸어졌고 출신성분 배경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 ‘쉬리’에 나오는 북한 특수부대 훈련 장면은 실제에 비하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혹독한 특수교육 훈련을 받았으며, 탁월한 사격 솜씨를 발휘해 저격수로 선정됐다고 한다.
아무튼 김씨는 79년에 정치보위부 산하의 비밀 정보원으로 재탄생, ‘비로봉’ ‘노메르(넘버의 러시아어) 08’이라는 암호명을 부여받는다. 그녀는 이후에 해외반탐국 대남공작부 소속으로 여러 가지 비밀 공작을 하는 등 ‘혁명과업’을 성실히 수행했다고 밝힌다.
잠재능력 키워주는 촛불 훈련
김씨가 다시 동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82년의 일. 보위부 명령을 받아 국가 직속 동의연구소 특설학부에 근무하면서부터다. ‘특설학부’는 질병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잠재능력 등 인체에 대한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특수 기관이라고 한다. 김소연씨의 설명.
“예를 들어 촛불훈련 또는 정신집중훈련이라는 게 있다. 여기 와서 보니까 이것을 ‘촛불기공’이라고 하던데, 아무튼 앉은 자리에서 촛불이 뚜렷하게 보이는 지점(사람에 따라 1.2m~3m 거리가 됨)에 초를 켜놓고 15초에서 30초 동안 눈을 깜빡거리지 않고 촛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훈련 방법이다. 그렇게 보고 있다가 귀에서 소리가 나는 듯한 현상을 느끼게 되면 그때 눈을 감는다. 이때 눈물이 나와야 제대로 한 것이다. 이를 20~40분 하다보면 촛불이 심장 안에 꽉 들어차는 느낌이 들고, 촛불이 커지면서 내 존재를 다 덮는 느낌도 든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촛불이 작게 보이면 초를 더 멀리 놓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렇게 하고 나면 처음엔 시신경에 자극을 주니까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나오지만, 시력이 무척 밝아지고 안구건조증 치료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남한에 와서 안구건조증 환자들에게 이 요법을 권해봤는데 무척 효과가 좋다고 하면서 나한테 고마워했다. 게다가 촛불훈련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분산된 정신이 한곳에 모이이므로 마음이 안정되고 기억력도 몰라보게 향상됨을 알 수 있다.”
김소연씨는 이외에도 남한에서는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수상학(手相學)도 심리학의 한 분야로 터득했다고 한다. 사람은 손바닥에 그 운명이 나와 있으며 천성적으로 타고난 운명은 못 버린다는 게 수상학의 이론. 극단적으로 무척 선량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런 운명을 손바닥에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것인데, 실제로 북조선에서는 혐의는 있으나 증거가 없이 붙잡혀온 사람들의 경우 손바닥을 들여다봄으로써 성격 유형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확대경을 대고 손바닥의 털구멍까지 샅샅이 살펴보면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 심보가 나쁜 사람, 마음은 천사인데 겉으로만 억센 듯 보이려고 하는 사람 등 성격 유형이 다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김소연씨가 몸담은 동의연구소는 북한 당국이 각별히 신경을 쓰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동의연구소가 곧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의연구소 내 핵심 부서는 내부에서 김일성 장수연구소로 불렸다고 한다. 동의연구소 곧 장수연구소에 대한 김씨의 설명.
“동의학 연구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봉한교수의 봉한학설이 정치적인 이유로 매장된 후, 봉한학설 청산 작업이 완전히 끝나갈 즈음인 76년 경에 북한에서는 다시 동의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 연구소에서는 독창적으로 연구 과업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비밀문서고에 보관해 두었던 과거 봉한학파의 연구 성과를 하나씩 꺼내 사용해 먹기도 했다. 또 동의연구소 연구원 가운데는 봉학학설과 관계있던 사람도 여럿 있었는데 탄로날까봐 모두 쉬쉬하는 형편이었다. 나도 사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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