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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과학 논쟁 좀더 치열하게 붙어라

新과학 논쟁 좀더 치열하게 붙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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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식의 자연관과 연구방법론이 그동안 과학 발전에 엄청나게 이바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인류가 무수히 많은 발명과 발견을 이룩하고 그 결과 찬란한 물질문명의 시대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 거의 전적으로 그의 영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여러분이 혹시 데카르트에게 보내는 이런 찬사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동안 자신이 학교에서 받았던 교육을 생각해 보라. 현대식 교육과정이란 바로 데카르트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데카르트식 관점만이 과학 탐구의 유일한 방법론이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시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혹시 데카르트적 관념에 어떤 한계는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대학에서 학과가 세분되고 의사들의 진료 과목이 세분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하는 의문에 직결된다.

데카르트식의 환원주의적 사고는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하고자 할 때 전체를 몇 개의 단순한 요소로 분해해서 그 구성요소들의 개별적인 성질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생물학을 논하면서 생물체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이라고 쉽게 간주해버리면 그야말로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심장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세포를 살펴보자. 근육세포는 심장의 일부분이지만 근육세포 자체로 독립된 기능을 갖는다. 즉 근육세포는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 나름대로 물질대사를 수행하고 분열하는 등 단위 생물체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독립된 기능을 갖는 세포들이 모여서 형성된 심장은 그 각각의 세포들이 살아서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근육세포에 대해서 제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우리 몸에서 심장이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심장 같은 우리 몸의 각 기관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데에는 역부족일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생물에게 부분이란 각기 독립적으로 고유 기능을 가진 전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물의 특성은 생물체를 손목시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손목시계의 톱니바퀴는 전체의 한 부분이지만 결코 생물체를 구성하는 세포처럼 독립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톱니바퀴가 독자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서 나름대로 기능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이미 톱니바퀴가 아니고 시계는 시계가 아니다. 그러나 생물에게는 부분품인 세포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생물체는 생물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생물을 부분의 독자적 기능을 가지고서 단순한 기계처럼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신과학의 전일주의

이렇게 환원주의는 부분은 부분으로서 중요하고, 또 부분들의 합인 전체는 전체로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에 대응해서 전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전일주의(holism)라고 부른다.

전일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과학의 세계는 우리가 여태까지 과학시간에 배운 세계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모든 물질세계가 원자나 분자들로 구성되고, 그 원자나 분자는 다시 소립자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따로 떨어져 기계적으로 구성되는 그런 체계가 아니라 여러 가지 상호관계가 서로 얽히고 설켜 아주 복잡한 그물처럼 이룩된 체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소립자를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독립된 단위로 보지 않으며, 그 각자가 큰 그물의 코에 해당하는 위치를 느긋이 지키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끊임없이 요동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물질세계의 최소 단위에 해당하는 양자는 구조적으로 한 곳에 고정돼 있지도 않고 그 하나하나를 분간해내기도 곤란하다. 모든 소립자는 우주의 차원에서 마치 춤을 추듯히 끊임없이 요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환원주의적 견해에서 볼 때 소립자들은 물질의 최소 단위에 해당하지만 그것들은 물질적인 재료로 이루어진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이들은 일정한 부피를 가지지만 이 부피는 특정한 물질의 부피가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로 표현된다. 따라서 아원자 입자는 에너지의 다발에 불과하고 그것들이 모여서 원자로, 다시 분자로,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를 구성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에서도 전일주의적 관점이 적용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카오스 이론은 자연계의 운행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계는 아주 정교한 기계장치일 뿐이다. 그래서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현상은 세밀한 관찰로 그 작동원리를 밝힐 수 있으며, 그 규칙성을 수식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이제까지 과학자들의 신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현상의 초기 조건만 주어진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현상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에서는 자연의 질서가 그렇게 기계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밝혔다. 오늘 베이징에서 나비 한 마리가 하는 날갯짓이 다음달에는 태평양 건너 뉴욕에 폭풍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의 규칙적이라고 이해했던 자연계의 제반 현상은 이제 혼돈스러운 현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대기의 무질서한 운동, 하천 흐름에서의 소용돌이, 심장병 환자에게서 관찰되는 심장박동의 불규칙성, 고속도로상에서 정체와 풀림의 기이한 반복, 주식 가격의 갑작스러운 혼란 등은 더 이상 수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혼돈 고유의 현상으로 남게 되었다.

다른 한편, 과학자들은 자연계의 무질서(혼돈) 속에 내재하는 또 다른 질서를 찾아내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자면, 장기적인 일기예보에는 실패하는 대신 폭풍우가 일어날 수 있는 단기적 조건들을 파악하는 데에는 혼돈 이론이 유효적절했던 것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차이

신과학(new science 또는 new age science)이란 바로 이런 전일주의적 관점에서 연구되는 연구 분야나 연구 업적을 두루 일컫는 용어다. 따라서 신과학의 범주는 대단히 넓다.

카오스 이론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과학계에 등장한 주요 연구 분야 대부분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일정 부분 전일주의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양자역학이 그러하고 시스템 이론이 그러하며 게임이론이나 인공두뇌학, 인지과학 등이 그러하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종 사이의 경쟁 대신 공생관계를 진화의 주요 동인으로 삼는 공생진화이론이나 범지구적 차원에서 생태계 문제를 다루는 시스템 생태학 등의 분야에서 전일주의적 접근법이 채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과학 분야들이 신과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순수 학문적인 분야 대신에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신과학의 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만약 필자에게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신과학 분야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한의학을 꼽겠다. 서양의학이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현재까지도 인체를 하나의 복잡한 기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한 데에 반해서 한의학에서는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따라서 서양의학에서는 환자의 아픈 부위에 국한해서 환부를 치료하는 것으로 진료가 끝나지만 한의학에서는 환자가 아프게 된 원인을 몸 전체에서 찾는다. 신체의 각 부분은 서로 연결돼 상호 작용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쪽 부위의 불편함이 저쪽 부위의 고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한의학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수지침 요법은 손가락의 경혈을 자극해서 신체 모든 부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손가락이 곧 인체의 축소판이라는 독특한 관점은 언제나 필자를 매료시킨다).

서양의학에서는 또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분리시키고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 반해서 한의학에서는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을 악화시킬 수 있고, 육체의 병 또한 마음의 병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의학은 그야말로 전일주의적 관점에 충실한 의학체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서양의학과 우리 한의학은 기존 과학과 신과학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서양의학과 한의학 중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서 일률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서양의학의 치료가 한의학보다 효과를 나타내는 질병이 있는가 하면 한의사의 처방이 양의사의 처방보다 더 효과적인 질병도 있다.

마찬가지로 환원주의적 관점과 전일주의적 관점에 대해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환원주의와 전일주의는 모두 나름의 장점이 있으며 서로 상대방 관점의 미흡한 점을 보충해줄 수 있는 과학의 연구방법론에 불과한 것이다. 필자는 신과학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부정하는 사람 모두가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나라의 신과학 논쟁

앞에서 필자는 신과학이란 종래의 환원주의적 사고가 아닌 전일주의적 사고에 입각해서 연구하는 연구 분야나 연구 업적을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신과학에 대한 이런 정의는 그 연구 분야나 연구 업적이 적어도 현대 과학의 범주에 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적용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만약 어떤 연구 분야나 연구 대상이 겉보기에는 제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과학적 연구의 주제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신과학이 아니라 의사과학(pseudo-science) 또는 반과학(antiscience)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 2~3년 동안 신과학을 지지하면서 신과학 연구에 국가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과학자들과, 그들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신과학이란 의사과학 또는 반과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일고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신과학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해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우리 나라에서는 그 찬반 논쟁이 어떻게 확대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920년대에 처음 양자역학의 혁명에서 비롯된 신과학은 현재까지 그 연구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왔으며 그 결과 우수한 과학적 업적을 무수히 배출했다. 요즘 크게 각광받고 있는 카오스 이론이나 시스템 이론을 제외하고도 생명의 존재를 유기체로 인식하는 유기체설, 지구의 모든 생명을 하나의 살아 있는 초생명체로 간주하는 가이아 이론, 생물의 진화는 미생물들의 공생 덕분이라는 공생진화설, 시공간을 넘나드는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는 학설 등 무수한 이론이 제안되고 검토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론들은 모두 저명한 과학자들에 의해 제안되고 연구됐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사조인 신과학은 과학계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이렇게 순수과학의 차원에 머무는 범주의 신과학을 편의상 A형 신과학이라고 부르자).

그런데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신과학은 이른바 ‘신과학 운동’으로 자리잡게 됐다. 이 기간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 유행했던 갖가지 시민운동, 예컨대 생태학 운동, 여성 운동, 자연건강 운동, 신비주의 운동, 반핵 운동, 소수민족 해방 운동, 인간성 개발 운동, 소박한 생활 운동, 리사이클 운동 등의 지도자들이 이런 시민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자연스레 신과학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과학’이 ‘신과학 운동’으로 불린 것은 이런 시민운동가들이 신과학 이론을 차용하면서 일반인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지 과학계 내부에서 신과학을 열렬히 주장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민운동 주창자들은 신과학에서 어떤 이론을 선호했을까? 환경보호주의자들은 이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고 현재 그 생명체가 갖가지 오염과 훼손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가이아 이론에 근거해서 자연보존 운동과 리사이클링 운동을 주창했다. 요가나 기(氣) 운동 등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시민단체들은 마음을 다스리면 육체의 건강도 다스릴 수 있다는 이론이 신과학에서 다뤄진다는 사실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물질주의와 과소비만이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박한 생활을 찾고자 하는 시민단체들은 시스템에서의 엔트로피 증가는 궁극적으로 자멸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엔트로피 이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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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환경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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