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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 OK, 곱슬머리는 안돼”

“의대생 OK, 곱슬머리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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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식이 누군지 알려 하지 말라.’ ‘자식에 대한 양육권을 행사하려 하지 말라.’ ‘절대 10명 이상의 자녀를 갖지 말라.’ 영하 196도의 정자은행(精子銀行)에서 꽁꽁 언 채 6개월 이상을 견딘 뒤 누군지도 모를 여인의 뱃속에 주입돼 신비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정자의 주인이 꼭 지켜야 할 수칙이다. 정자은행은 더 나은 씨를 사기 위한 사치인가 아니면 아이를 얻기 위한 불임부부의 최후 선택인가?》
지난 2월1일 오후 4시. 서울대병원 1층 비뇨기과에는 ‘정자은행(精子銀行)’이라는 현판이 막 걸리고 있었다. 1993년 이후 중단됐던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위한 정자은행의 설치 및 운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정자은행이란 정자를 채취한 뒤 냉동보존액과 혼합해 용기에 넣고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 탱크에 냉동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녹여 인공수정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보관시설과 시술기관.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 등으로 인해 정자생성 기능에 장애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남자나 정관수술 전 만일에 대비해 정자를 보관하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익명의 남성에게 정자를 얻으려는 불임부부도 이용할 수 있다.

정자를 얼려서 보존하는 기술은 1776년 스팔란차니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눈속에서도 사람의 정자가 살아 있음을 관찰해 연구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 후 약 1세기가 지난 뒤 종우(種牛)를 보존하려는 목적과 전쟁에서 사망한 남편의 아이를 수태하기 위해 정자은행의 필요성이 처음 소개됐다. 하지만 당시 동결된 정자의 생존율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6년 글리세롤이라는 물질이 냉동으로 인한 손상에 대해 괄목할 만한 보호효과가 있다는 것이 확인된 뒤로 글리세롤을 이용한 정자의 동결이 처음 시도됐다. 그리고 1953년, 인간의 동결정자를 이용한 최초의 임신이 보고됐다.

정자은행의 탄생

일반적으로 정자은행의 목적은 나중에 배우자와 수정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자를 보관해 두는 자가 정자동결과 비배우자와 수정하기 위한 공여자 정자동결로 대별할 수 있다. 자가 정자동결은 정관수술과 같은 불임시술 전에 자신의 정자를 얼려서 보관하는 경우 등이 있다. 항암치료에 이용되는 몇몇 항암제들, 콜치신 등의 화학요법, 그릭 방사선 요법 등은 고환의 정자생산기능에 치명적인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젊은 연령층에서도 암환자가 증가하고 있어 항암요법, 방사선요법, 골수이식술 등이 많이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암 치료 시작 전 자신의 정자를 보존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동결보존한 정자는 나중에 수정이 필요한 경우 녹여서 사용하면 된다. 정자를 녹여 처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기본적인 원리는 동결보존액을 제거하고 비교적 운동성이 좋은 정자를 선택하여 배란기에 접어든 배우자의 자궁 내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다. 임신율은 50∼60%에 이른다.

이에 비해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위한 공여 정자동결은 고환의 정자생산 기능이 완전 파괴된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치료법이다. 최근 세포질내 정자주입법(ICSI)이라는 진보된 보조생식술은 남성불임증의 상당부분을 해결했지만 고환의 정자생산 기능이 완전히 파괴된 환자에게는 아직도 비배우자 인공수정과 입양이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은 건강한 공여자의 정자를 이용하여 수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입양에 비해 모계의 유전적 특성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간정자의 동결보존은 1970년대부터 널리 이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정관수술에 앞서 수정능력을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상업적 정자은행이 발달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몇몇 대학병원에서도 정자은행이 설립되어 현재 150개 이상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에는 정부가 관리하는 15개의 정자은행이 있으며 이들을 중앙정자은행에서 총괄한다. 유럽에서는 주로 정부기관에 의한 정자은행이, 미국에서는 상업적 정자은행 혹은 대학 등의 연구기관내에 정자은행이 설립,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동양권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의 혈통을 유지하려는 전통적 관념이나 AIDS와 같이 성교를 통해 전파되는 질환의 위험 때문에 비배우자 인공수정은 제한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구미에서는 정자은행 운영에 미국 불임학회가 제정한 정자의 선별, 동결보존과 이용 그리고 비배우자 인공수정에 관한 지침을 따르고 있다. 이 지침은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의 빈도가 증가하고 성교전파성 질환 중 AIDS의 중요성이 점차 증가하면서 1896년과 1993년 사이에 네 차례나 개정된 바 있다.

법적 부부만 이용 가능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산부인과에서 냉동보존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배우자간 인공수정을 위하여 남편의 정자를 제한된 기간만 냉동보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1993년 초 경희대병원이 AIDS 선별검사가 시행되지 않은 신선정액(Fresh Sperm)을 이용한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을 하다가 적발돼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대학의 중견교수들이 해직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자극받아 대한의학협회는 1993년 5월 6일 ‘인공수태 윤리에 관한 선언’을 제정, 선포했다.

이 선언은 98년 11월5일 대한산부인과학회 인공수태 시술의료기관 심사소위원회에서 정한 ‘대한산부인과학회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으로 나타났다.

이 지침에 따르면 비배우자 인공수정은 ▲이것 이외의 의료행위에 의해서는 임신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 한하여 시술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 ▲남편의 적극적 동의하에 시행 ▲동일 공여자의 정액은 10회 이하 임신에 한해 사용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액공여자의 신분은 비밀을 보장해야 하며 정액공여자에 대해서도 시술결과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규정을 두고 있다.

대한의학협회가 이와 같은 기준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법적인 제약이 없는 탓에 국내 정자은행의 운영은 병원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국내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정자은행을 표방하며 운영을 시작한 것은 부산대학병원이다. 1997년 4월 부산대병원 신관3층에 문을 연 정자은행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박남철(朴南喆) 교수. 1993년 경희대 사건의 여파로 같은 대학의 김모교수가 면직처분을 받은 뒤 미국 등 해외에서 정자은행을 집중 연구한 뒤 ‘제대로 된’ 정자은행을 만든 것. 박교수의 노하우는 2월에 문을 연 서울대 정자은행에 영향을 주었고 개원을 준비중인 전남대 정자은행도 부산대를 벤치마킹하고 있을 정도. 부산대 병원은 97년 11월부터 정자를 팔기 시작해 156쌍의 불임부부를 상대로 186번의 불임시술을 해줬다. 성공률은 약 45%. 다른 사람의 정자를 사서 시술을 받을 경우 시술비는 50만~60만원이다.

부산대의 자랑은 정자은행을 찾는 고객이 원하는 정자를 자동으로 고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산화 프로그램. 불임부부가 비배우자의 정자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체형 및 유전학적 특성인 혈액형, 신장, 체중, 체형, 홍채, 모발색, 모발형, 피부색 이외에도 학력, 취미 등이 입력된 프로그램에 자신이 적당한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원하는 정자를 찾아준다.

부산대 정자은행에 정자를 의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산의대생이다. 정자은행규정에는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를 정자제공 가능자로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의대생이 주요 공급원이라는 것. 정자은행장이기도 한 박남철 교수는 의대생들의 수강과목인 남성불임에 대해 강의할 때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홍보하면서 정자를 제공하라고 적극 권유한다. 수술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임부부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정자를 기꺼이 제공할 줄 아는 용기도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설득하면 적지 않은 학생들이 정자제공 의사를 밝힌다는 것. 현재 보유중인 정자수는 328개로 54명에게서 받은 것이며 학생 이외에 제약회사직원의 정자도 일부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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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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