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新과학 논쟁 좀더 치열하게 붙어라

  •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환경학박사

    입력2006-12-27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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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신과학을 둘러싼 과학계의 논쟁은 그 자체가 좋은 논쟁을 위해서 필수적인 격렬성과 진지성을 충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하다.》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한지 반세기도 더 지난 현시점에 누가 필자에게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사회적인 논의 또는 논쟁이 부족하다”고 답하겠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는 어떤 사안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또는 어느 의견이 다른 의견보다 낫다는 식의 상대적인 평가를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라면 온 국민의 중지를 모으느라 몇 년 혹은 10년도 더 걸리는 일이 한국에서는 하루 아침에 결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요즘에는 IMF 사태의 영향으로 그래도 국가적 대사라고 부를 만한 일을 새로 추진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지금도 공사가 진행중인 영종도 신공항이라든지 경부고속철도, 새만금 간척사업 등은 공사 경비가 몇 조원씩 소요되고, 또 환경이나 지역 주민의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대공사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업들이 처음 제안돼 공식적으로 추진이 결정되기까지는 불과 몇 달, 기껏해야 1년 미만의 짧은 기간이 소요된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사업을 결정하는 과정에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다거나 관련 분야 사람들의 의사를 묻는 일은 애당초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서둘러서 추진했던 일의 결과는 지금 어떠한가? 그런 사업들은 대부분 공사비가 원래 계획보다 몇 배씩 더 들어가고, 공사 기간이 몇 년씩 더 연장되는 것은 물론 공사가 진행중인데도 벌써 사업의 경제성마저 의심받는 일이 흔하다.

    중요한 사회적 제도나 정책들도 충분한 검토 없이 진행되기는 마찬가지다. 대학입시 제도나 의료보험 제도 등은 물론 그린벨트 해제나 의약분업, 사법 개혁, 선거법 개선 등의 문제들은 일단 정책이 결정되면 그 영향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거의 전국민에게 미친다. 각각의 사안이 이렇게 중요한 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심각한 논의와 논쟁이 미약한 형편이다.



    과학계도 토론문화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우리 나라의 토론문화는 척박하기 짝이 없다. 언론은 주요 사안을 토론 주제로 다루기를 아예 회피하거나 설령 다뤄도 핵심을 잘못 짚기가 일쑤고, 그런가 하면 토론과 논쟁에 나서는 관련 당사자들은 물론 해당 분야 전문가들조차 합리적이고 공정한 논리의 제시보다는 아전인수식의 자기합리화나 막무가내식 억지 논리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봐왔다.

    이런 세태 탓이겠지만 과학 분야에서도 때로는 사회적 논의와 논쟁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리둥절할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논쟁이라면 어느 한 편이 옳고 상대편은 틀렸다고 무 자르듯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사안들에 대해서나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인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과학은 모든 것이 마치 수학 문제처럼 절대적인 해답이 분명한 세계로 여겨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과학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나 학문보다 엄밀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과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리 공방이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논쟁이야말로 과거의 낡은 이론이 무너지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과학의 어떤 분야에서 더 이상 논의와 논쟁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이제 발전 가능성이 없는 학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또 이렇게 논의와 논쟁이 없는 과학자 집단이라면 그 집단의 발전 가능성도 그만큼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만약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활발함 정도를 그 집단의 발전 가능성의 지표로 삼는다면, 우리 나라 과학계의 현실은 자못 심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과학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와 논쟁의 질과 양을 따져볼 때 우리 과학계의 실정 역시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선진국 수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과학계에 논쟁과 논의가 그토록 빈약한 것을 크게 우려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최근 우리 과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한 주제에 대해서 그 논쟁의 전말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계에서의 작은 논쟁 하나를 굳이 독자 여러분에게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런 작은 논쟁을 통해서 우리 과학계가 자기 발전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어보기 때문이다.

    대학에는 왜 그렇게 학과가 많나

    과학의 분야는 대단히 넓다. 물리학, 수학, 화학, 생물학 등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과목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종합대학교의 자연과학대학에는 천문학, 지질학, 해양학, 기상학 등 다양한 학과가 보통 10개 이상씩 개설돼 있다. 또 이런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을 이용해서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주력하는 응용과학 대학들, 예컨대 공과대학이나 농과대학(최근에는 농업생명과학대학 등으로 명칭이 바뀌고 있다), 의과대학, 가정대학들에 개설되어 있는 학과목은 또 얼마나 많은가. 물리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역학, 광학, 전자기학, 이론물리학, 양자역학, 통계물리학, 우주론 등등 그 수효가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에 달할지도 모르겠다.

    일반인이 과학을 가장 친밀하게 접할 수 있는 현장이라면 아마도 병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이뤄지는 모든 진료행위가 바로 현대과학에 기초하고 있고, 또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식 종합병원에 개설돼 있는 진료과목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가. 외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과거 20∼30년 전만 해도 그 수가 기껏해야 열 개를 넘지 못했던 진료과목이 요즘에는 100개를 훌쩍 뛰어넘어 이제는 아무도 그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의 학과와 학과목이 세분돼 있고, 병원의 진료과목이 다양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과학의 세분화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과학이 세분화하는 만큼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또 그만큼 우리 생활이 편리하고 윤택해지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병원의 진료과목이 다양해질수록 질병 치료와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런 진료과목의 다양화가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더욱 불편하게 하고 진료비 증가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전체적으로 진료과목의 다양화가 불러올 수 있는 장단점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 이익이 될까 아니면 손해가 될까?

    먼저, 현대에 이르러 과학 분야가 그처럼 세분되고 있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과학 혁명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와 뉴턴으로, 이들은 모두 17세기 인물이다. 데카르트는 이 세상이 시계처럼 정확히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라고 선언했으며, 과학은 그 기계를 움직이는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가르쳤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에 따르면 천체의 운행에서 풀잎이 자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현상들은 모두 정확한 수학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고, 그렇게 수학으로 나타내려면 주어진 현상을 일일이 점검하는 분석적 방법론이 필요해진다.

    데카르트의 연구 방법론은 이런 식이다. 우리가 데카르트 시대로 돌아가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라고 가정해보자. 당시 천문학자들은 데카르트보다 한 세대 먼저 태어났던 케플러나 갈릴레오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천체의 움직임을 매일매일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관찰기록이 충분히 축적됐을 때 그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우리는 어떤 별이 지구처럼 태양의 둘레를 도는 행성이고 또 어떤 별이 태양과 같은 항성(恒星)이면서 그것들이 지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즉 별 하나하나 또는 별자리 하나하나에 대해서 세심한 관찰을 먼저 수행하고, 그 자료들을 일일이 검토해서 각 별들 또는 별자리들의 특성을 밝힌다면 궁극적으로는 그런 지식들이 모두 모여 전체 태양계와 우주의 운행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의 분석적 연구방법론이란 이처럼 연구의 대상을 분해해서 그 각각을 연구해 결국은 연구대상 전체에 대한 지식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환원주의

    데카르트는 이 세상을 신이 만든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단언했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존재도 당연히 기계로 이해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기계는 감성을 느끼지 못하고 정신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기계로서 인간 육체는 정신과 분리된 존재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은 물질과 정신은 분리된 존재이고, 물질은 기계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자연법칙에 따라 설명이 가능하지만 신의 영역인 정신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처럼 정신과 육체가 서로 분리된 존재라는 사상을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라고 하는데, 이는 물질기계론 및 분석적 연구방법론과 함께 과학사에 남은 데카르트의 3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분석적 연구방법론은 과학적 용어로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한다.

    데카르트가 남긴 물질기계론, 심신이원론, 환원주의적 연구방식은 현대 과학의 기반이자 또한 과학을 수행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은 지난 300년 동안 과학 발전을 이끌어왔고, 또 현재도 과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학에 왜 그렇게 많은 학과가 개설돼 있는지, 그리고 과학이 발전할수록 대학의 학과 수와 학과목은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을 비롯한 모든 세상사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구하려면 각각의 대상들을 더 작은 단위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조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들은 과학계는 그렇다고 해도 왜 대학의 인문사회 계열과 예술 계열조차 학과가 세분되어 있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답은 이렇다. 현대에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과학계 밖에까지도 깊숙이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예술계에서도 그런 경향을 따르는 것이다.

    의사들이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은 완벽히 데카르트적이다. 먼저 의사들은 환자의 몸을 하나의 기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마치 시계의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듯 환자의 아픈 부분을 살펴서 그 부분을 수술하거나 내복약을 복용시켜서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것을 임무로 여긴다.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에게 있어서 환자의 몸이 아픈 것과 환자의 마음이 아픈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서 질병의 심리적 차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으며 정신병을 치료하는 데에 신체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질병 치료에 있어서 의사들은 그 병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치료의 성공률도 높아진다고 확신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이제는 관절염만 해도 병세에 따라 수십 가지로 나뉘고, 치료 방법도 달라진다. 그렇다 보니 병원의 진료 과목은 점점 더 세분되고, 그 결과 의사들은 만물박사가 될 수 없는 나머지 자기가 전공하는 질병에만 매달리는 전문의 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전문의 제도는 의사들로 하여금 그들을 점점 더 좁은 전문 영역으로 몰아넣는 경향을 낳았다. 그래서 이제는 소아과가 아예 아동병원으로 분리돼 그 속에 소아내과니 소아외과니 하는 무수히 많은 진료과목들이 포진하게 됐으며, 어떤 의사는 오직 어린이 환자의 위(胃)만 들여다보는가 하면 또 어떤 의사는 항문만 다루게 됐다.

    데카르트식의 자연관과 연구방법론이 그동안 과학 발전에 엄청나게 이바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인류가 무수히 많은 발명과 발견을 이룩하고 그 결과 찬란한 물질문명의 시대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 거의 전적으로 그의 영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여러분이 혹시 데카르트에게 보내는 이런 찬사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동안 자신이 학교에서 받았던 교육을 생각해 보라. 현대식 교육과정이란 바로 데카르트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데카르트식 관점만이 과학 탐구의 유일한 방법론이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시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혹시 데카르트적 관념에 어떤 한계는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대학에서 학과가 세분되고 의사들의 진료 과목이 세분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하는 의문에 직결된다.

    데카르트식의 환원주의적 사고는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하고자 할 때 전체를 몇 개의 단순한 요소로 분해해서 그 구성요소들의 개별적인 성질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생물학을 논하면서 생물체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이라고 쉽게 간주해버리면 그야말로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심장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세포를 살펴보자. 근육세포는 심장의 일부분이지만 근육세포 자체로 독립된 기능을 갖는다. 즉 근육세포는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 나름대로 물질대사를 수행하고 분열하는 등 단위 생물체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독립된 기능을 갖는 세포들이 모여서 형성된 심장은 그 각각의 세포들이 살아서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근육세포에 대해서 제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우리 몸에서 심장이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심장 같은 우리 몸의 각 기관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데에는 역부족일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생물에게 부분이란 각기 독립적으로 고유 기능을 가진 전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물의 특성은 생물체를 손목시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손목시계의 톱니바퀴는 전체의 한 부분이지만 결코 생물체를 구성하는 세포처럼 독립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톱니바퀴가 독자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서 나름대로 기능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이미 톱니바퀴가 아니고 시계는 시계가 아니다. 그러나 생물에게는 부분품인 세포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생물체는 생물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생물을 부분의 독자적 기능을 가지고서 단순한 기계처럼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신과학의 전일주의

    이렇게 환원주의는 부분은 부분으로서 중요하고, 또 부분들의 합인 전체는 전체로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에 대응해서 전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전일주의(holism)라고 부른다.

    전일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과학의 세계는 우리가 여태까지 과학시간에 배운 세계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모든 물질세계가 원자나 분자들로 구성되고, 그 원자나 분자는 다시 소립자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따로 떨어져 기계적으로 구성되는 그런 체계가 아니라 여러 가지 상호관계가 서로 얽히고 설켜 아주 복잡한 그물처럼 이룩된 체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소립자를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독립된 단위로 보지 않으며, 그 각자가 큰 그물의 코에 해당하는 위치를 느긋이 지키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끊임없이 요동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물질세계의 최소 단위에 해당하는 양자는 구조적으로 한 곳에 고정돼 있지도 않고 그 하나하나를 분간해내기도 곤란하다. 모든 소립자는 우주의 차원에서 마치 춤을 추듯히 끊임없이 요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환원주의적 견해에서 볼 때 소립자들은 물질의 최소 단위에 해당하지만 그것들은 물질적인 재료로 이루어진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이들은 일정한 부피를 가지지만 이 부피는 특정한 물질의 부피가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로 표현된다. 따라서 아원자 입자는 에너지의 다발에 불과하고 그것들이 모여서 원자로, 다시 분자로,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를 구성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에서도 전일주의적 관점이 적용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카오스 이론은 자연계의 운행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계는 아주 정교한 기계장치일 뿐이다. 그래서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현상은 세밀한 관찰로 그 작동원리를 밝힐 수 있으며, 그 규칙성을 수식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이제까지 과학자들의 신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현상의 초기 조건만 주어진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현상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에서는 자연의 질서가 그렇게 기계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밝혔다. 오늘 베이징에서 나비 한 마리가 하는 날갯짓이 다음달에는 태평양 건너 뉴욕에 폭풍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의 규칙적이라고 이해했던 자연계의 제반 현상은 이제 혼돈스러운 현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대기의 무질서한 운동, 하천 흐름에서의 소용돌이, 심장병 환자에게서 관찰되는 심장박동의 불규칙성, 고속도로상에서 정체와 풀림의 기이한 반복, 주식 가격의 갑작스러운 혼란 등은 더 이상 수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혼돈 고유의 현상으로 남게 되었다.

    다른 한편, 과학자들은 자연계의 무질서(혼돈) 속에 내재하는 또 다른 질서를 찾아내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자면, 장기적인 일기예보에는 실패하는 대신 폭풍우가 일어날 수 있는 단기적 조건들을 파악하는 데에는 혼돈 이론이 유효적절했던 것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차이

    신과학(new science 또는 new age science)이란 바로 이런 전일주의적 관점에서 연구되는 연구 분야나 연구 업적을 두루 일컫는 용어다. 따라서 신과학의 범주는 대단히 넓다.

    카오스 이론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과학계에 등장한 주요 연구 분야 대부분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일정 부분 전일주의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양자역학이 그러하고 시스템 이론이 그러하며 게임이론이나 인공두뇌학, 인지과학 등이 그러하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종 사이의 경쟁 대신 공생관계를 진화의 주요 동인으로 삼는 공생진화이론이나 범지구적 차원에서 생태계 문제를 다루는 시스템 생태학 등의 분야에서 전일주의적 접근법이 채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과학 분야들이 신과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순수 학문적인 분야 대신에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신과학의 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만약 필자에게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신과학 분야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한의학을 꼽겠다. 서양의학이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현재까지도 인체를 하나의 복잡한 기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한 데에 반해서 한의학에서는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따라서 서양의학에서는 환자의 아픈 부위에 국한해서 환부를 치료하는 것으로 진료가 끝나지만 한의학에서는 환자가 아프게 된 원인을 몸 전체에서 찾는다. 신체의 각 부분은 서로 연결돼 상호 작용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쪽 부위의 불편함이 저쪽 부위의 고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한의학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수지침 요법은 손가락의 경혈을 자극해서 신체 모든 부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손가락이 곧 인체의 축소판이라는 독특한 관점은 언제나 필자를 매료시킨다).

    서양의학에서는 또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분리시키고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 반해서 한의학에서는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을 악화시킬 수 있고, 육체의 병 또한 마음의 병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의학은 그야말로 전일주의적 관점에 충실한 의학체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서양의학과 우리 한의학은 기존 과학과 신과학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서양의학과 한의학 중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서 일률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서양의학의 치료가 한의학보다 효과를 나타내는 질병이 있는가 하면 한의사의 처방이 양의사의 처방보다 더 효과적인 질병도 있다.

    마찬가지로 환원주의적 관점과 전일주의적 관점에 대해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환원주의와 전일주의는 모두 나름의 장점이 있으며 서로 상대방 관점의 미흡한 점을 보충해줄 수 있는 과학의 연구방법론에 불과한 것이다. 필자는 신과학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부정하는 사람 모두가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나라의 신과학 논쟁

    앞에서 필자는 신과학이란 종래의 환원주의적 사고가 아닌 전일주의적 사고에 입각해서 연구하는 연구 분야나 연구 업적을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신과학에 대한 이런 정의는 그 연구 분야나 연구 업적이 적어도 현대 과학의 범주에 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적용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만약 어떤 연구 분야나 연구 대상이 겉보기에는 제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과학적 연구의 주제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신과학이 아니라 의사과학(pseudo-science) 또는 반과학(antiscience)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 2~3년 동안 신과학을 지지하면서 신과학 연구에 국가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과학자들과, 그들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신과학이란 의사과학 또는 반과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일고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신과학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해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우리 나라에서는 그 찬반 논쟁이 어떻게 확대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920년대에 처음 양자역학의 혁명에서 비롯된 신과학은 현재까지 그 연구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왔으며 그 결과 우수한 과학적 업적을 무수히 배출했다. 요즘 크게 각광받고 있는 카오스 이론이나 시스템 이론을 제외하고도 생명의 존재를 유기체로 인식하는 유기체설, 지구의 모든 생명을 하나의 살아 있는 초생명체로 간주하는 가이아 이론, 생물의 진화는 미생물들의 공생 덕분이라는 공생진화설, 시공간을 넘나드는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는 학설 등 무수한 이론이 제안되고 검토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론들은 모두 저명한 과학자들에 의해 제안되고 연구됐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사조인 신과학은 과학계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이렇게 순수과학의 차원에 머무는 범주의 신과학을 편의상 A형 신과학이라고 부르자).

    그런데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신과학은 이른바 ‘신과학 운동’으로 자리잡게 됐다. 이 기간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 유행했던 갖가지 시민운동, 예컨대 생태학 운동, 여성 운동, 자연건강 운동, 신비주의 운동, 반핵 운동, 소수민족 해방 운동, 인간성 개발 운동, 소박한 생활 운동, 리사이클 운동 등의 지도자들이 이런 시민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자연스레 신과학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과학’이 ‘신과학 운동’으로 불린 것은 이런 시민운동가들이 신과학 이론을 차용하면서 일반인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지 과학계 내부에서 신과학을 열렬히 주장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민운동 주창자들은 신과학에서 어떤 이론을 선호했을까? 환경보호주의자들은 이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고 현재 그 생명체가 갖가지 오염과 훼손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가이아 이론에 근거해서 자연보존 운동과 리사이클링 운동을 주창했다. 요가나 기(氣) 운동 등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시민단체들은 마음을 다스리면 육체의 건강도 다스릴 수 있다는 이론이 신과학에서 다뤄진다는 사실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물질주의와 과소비만이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박한 생활을 찾고자 하는 시민단체들은 시스템에서의 엔트로피 증가는 궁극적으로 자멸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엔트로피 이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신과학 운동가들이 신과학을 차용고 남용하는 과정에 일부에서는 신과학적 개념과 의사과학적 또는 반과학적 개념들을 혼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氣)와 기공(氣功), 수맥탐사, 공간에너지, 영구기관, 물질이동, 심령치료, 각종 무속행위, 풍수와 같이 그동안 현대 과학의 영역 바깥에 머물던 분야를 신과학에 포함하는가 하면(이런 신과학을 B형 신과학이라고 하자), 또 어떤 사람은 환경 보전, 생명 사상, 여성 운동 등에 연관시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과학으로 신과학을 말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서구에서 신과학은 이처럼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과학의 한 사조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과학계를 자극해서 과학계가 새로운 탐구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견인차 구실을 하면서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구 과학계가 A형 신과학에 대해서 처음부터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과학사가들은 외견상으로는 가장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는 과학계에서조차 기존 학설이나 이론에 도전하는 새로운 주장들은 외면받기 일쑤라는 점을 곧잘 지적하는데, 신과학 이론 대부분이 처음에는 그런 싸늘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투철한 합리성과 논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 과학계가 이런 중요한 이론들을 홀대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스템 이론, 공생진화설, 가이아 이론, 비평형열역학, 카오스 등 무수히 많은 신과학 이론이 점차 과학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구 과학계가 중국 한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이며, 그동안 외면해왔던 대체의학에 대해서 최근에는 미국 정부가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향후 신과학의 발전에 커다란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1970년대 말엽에 신과학 개념이 처음 소개됐다. 우리 나라에 신과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당시 신과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서 직접 범양사출판부를 설립했던 고(故) 이성범(李成範) 범양사 회장으로 이분의 주도하에 저명한 국내 과학자들이 다수 참여해서 신과학 운동에 불을 지폈다.

    범양사출판부를 중심으로 한 신과학 운동은 앞에서 설명한 A형 신과학을 국내 학계에 보급했으며, 서구에서 전개됐던 시민운동 차원의 신과학 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성범 회장이 막대한 사재를 출연하면서까지 신과학을 국내에 보급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자신이 지극한 휴머니스트였던 이회장은 환원주의에 치우쳐 발전해온 현대 과학이 인간성을 피폐하게 하고 환경오염을 부추겨서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와, 그런 절박한 상황인데도 국내 과학계가 이런 문제점을 별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당혹감을 지인들에게 자주 피력하곤 했는데, 이런 조바심이 노구를 신과학 운동에 뛰어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78년 설립 이래 지금까지 범양사출판부는 신과학 이론을 소개하는 단행본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으며 1992년부터는 ‘과학사상’이라는 계간지를 내고 있다. 필자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과학사상’은 일부 비판자들이 공격하는 것처럼 신과학 보급을 위한 잡지가 아니라 현대과학의 올바른 이해와 그 합리적인 발전 방향을 꾀하고자 노력하는 과학교양지다. 다만 이런 편집 방침에 따라서 과학의 논리성과 합리성을 견지하는 글이라면 신과학에 대한 기사도 게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정신과학학회와 그 비판자들

    80년대가 지나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에서도 신과학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범양사출판부가 독점하다시피 출판하던 신과학 관련 서적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발간되기 시작했고 사회적으로는 시민단체의 활성화와 함께 과거 60, 70년대에 서구 사회를 휩쓸었던 기(氣), 요가, 단학, 명상 등의 심신수련법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또 소위 UFO, 사후세계, 영매, 텔레파시와 염력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와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런 B형 신과학의 범람은 이 분야 전문출판사인 정신세계사를 국내 굴지의 출판사로 성장하게 했다.

    과학계에서는 이런 사회적 시류에 편승해서 일단의 연구자들에 의해 1994년에 한국정신과학학회라는 학술단체가 설립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학회설립 취지를 “인간과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정신능력과 자연현상 가운데에는 기존 과학에서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능력과 현상들이 있다. … 한국정신과학학회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계론적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동양의 전체론적 사고체계 아래 ① 기존 과학이 설명할 수 없었던 다양한 정신현상과 자연현상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의 창출과 ②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신과학 기술의 개발 및 ③ 인간에 내재하는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인류사회에 응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을 창출한다”라고 명시했다.

    한국정신과학학회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① 전통사상 연구 ② 생체 기과학 연구 ③ 시공간 기과학 연구 ④ 잠재능력 연구 등을 수행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B형 신과학 연구의 본산임을 자처하고 있다. 특히 이 학회 이사인 방건웅 박사는 1997년에 ‘신과학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저서를 발간한 바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물에 정보가 각인된다는 이론, 원적외선의 치료 효과, 영구기관, 맹물로 가는 무공해 자동차, 중력제어장치 등 현대 과학에서 인정하지 않는 내용들을 무수히 인용하면서 그것들을 신과학의 업적으로 포장했다. 한국정신과학학회와 방건웅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그들이 지칭하는 신과학은 분명히 B형 신과학으로 이는 범양사출판부를 통해 소개되는 A형 신과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정신과학학회는 나날이 그 세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급기야 1997년에는 과학기술부의 지원으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과학 분야의 연구 확대를 위한 연구기획과제를 수행하기에 이르렀고, 1998년부터는 정치권과 연계해서 소위 ‘정신과학진흥육성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법안의 발의자로 무려 19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이 나섰다고 한다.

    신과학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나 우려의 글들은 한국정신과학학회가 발족한 이후 간간이 있어왔지만, 본격적인 비판은 숙명여대 교수를 퇴임한 강건일 박사가 1998년에 ‘신과학은 없다’라는 저서를 발간한 데에서 비롯됐다. 강박사는 1999년에도 ‘신과학 바로 알기’라는 저서를 내 한국정신과학학회에서 다루는 신과학을 온갖 마술·초정상 현상의 쓰레기 과학으로 비판했다. 초정상 현상이란 텔레파시, 기치료, 염력, 피라미드 파워 등 과학적으로 그 실재가 입증되지 않았거나 존재가 부정된 현상들을 말한다.

    강박사의 저서들에는 범양사출판부에서 발간한 신과학 관련 저서들과 계간 ‘과학사상’을 비판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특히 저자는 ‘과학사상’을 반과학적인 신과학 논리를 교묘하게 포장해서 국내에 전파시키는 못된 잡지로 치부하고 있는 듯한데, 이는 A형 신과학과 B형 신과학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인 듯하다. 과학평론가인 이인식씨도 최근 강박사와 비슷한 관점에서 신과학을 공격하는 글을 모 잡지에 실은 바 있다.

    신과학 논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신과학 관련 논쟁은 그것을 지지하는 쪽이나 부정하는 쪽이나 모두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이런 유의 공개적인 논쟁이 별로 없었던 과학계에서는 놀라운 일로 치부될 만하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논쟁이 우리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으니만큼 이 논쟁에서도 혼란스러운 점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먼저, 신과학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강건일 박사의 주장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부족함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후작인 ‘신과학 바로 알기’에서는 그 전작에 해당하는 ‘신과학은 없다’에 비교해서 훨씬 더 세련된 논리를 폈지만, 이 책의 상당 부분에서는 여전히 저자가 과연 신과학을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과학 자체를 설명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로 저자의 주장과 다루는 주제에 대한 설명이 중첩돼 있다. 만약 “한국정신과학학회에서 다루는 신과학은 반과학과 의사과학에 다름아니다”라는 신랄한 비판이 기재된 이 책의 맨 뒷장을 제외하고 본다면 ‘신과학 바로 알기’는 제목 그대로 신과학에 대한 해설서로 사용될 수도 있음직하다.

    둘째, 자신들이 수행하고 있는 신과학 연구에 대해서 그동안 두 차례의 단행본을 통해 혹독한 비판에 시달렸던 한국정신과학학회라면 지금쯤 이에 대한 반박을 해야 할 터인데, 아직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강박사의 지적에 따르면 정신과학학회에는 무려 210명의 박사급 과학자들이 가입해 있다고 한다. 만약 이른 시일 내에 그들 중 누군가가 강박사의 비판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한국정신과학학회는 해체되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학문에 대해서 그것이 반과학이자 의사과학이라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매도를 감수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적어도 과학계의 한 집단이 다른 편으로부터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혹평을 들었다면 마땅히 반론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쟁이 없는 사회라면, 아니 과학계라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지 않겠는가.

    셋째, 그동안의 신과학 논쟁에서는 우리 나라의 여느 논쟁과 마찬가지로 논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서 엄격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크다. A형 신과학적 지식의 보급에 힘써왔던 범양사출판부의 저서들이나 계간 ‘과학사상’의 취지는 명백하다. 그 동안 환원주의적 사고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반대 급부로 인간성의 쇠퇴와 환경오염을 부추겼던 현대 과학을 반성하고 현대 과학이 나아갈 대안으로 전일주의적 관점에서 얻어진 새로운 과학이론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그 소임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범양사출판부 쪽에서 주장하는 신과학은 현대 과학의 범주 속에 귀속된다. 다시 말해서 ‘현대과학이 무시하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자연계의 능력과 현상들’에 대한 연구를 주장하는 정신과학학회 쪽의 신과학과는 전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양 진영의 신과학 개념이 이렇게 다른데도 신과학 공격의 기수를 자처하는 강건일 박사나 기타 비판자들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한데 묶어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점은 안타깝기조차 하다.

    결론적으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신과학을 둘러싼 과학계의 논쟁은 그 자체가 좋은 논쟁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격렬성과 진지성을 충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하다. 필자는 이런 논쟁을 통해서만이 우리 과학계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도 건전한 토론문화를 배양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족 한마디를 덧붙이자. 우리 과학계의 실정에 박사학위를 소지한 과학자 210명이 가입한 학회라면 결코 작은 집단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과학자들이 우리 과학계가 반과학으로 그토록 부정하고 있는 B형 신과학 - 그들은 정신과학이니 기과학이니 하는 용어로 부르지만 - 을 굳이 연구하고자 별도로 모임을 결성할 만큼, 그렇게 우리 과학계가 한가로울까? 과학계가 그만큼 한가로운지 아니면 그 과학자들이 한가로운지 한번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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