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요가섹스’를 통한 깨달음의 세계

  • 조현두

    입력2006-10-25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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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소개>
    • 산부인과 전문의인 조현두씨는 부산대병원 수련의 시절 선의(船醫)로 근무, 일본 대만 필리핀 괌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여행 편력을 시작했다. 91년에는 산부인과 과장으로 재직하던 마산성모병원을 사직하고 60여 일간 중동과 유럽지역에서 배낭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96년에 인도 밀교인 탄트라 구도(求道) 여행을 다녀왔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 그가 인도에서 직접 체험한 탄트라 수행 여행기로 일반인은 좀체 체험하기 힘든 세계다. 조씨는 요즘도 틈틈이 세계의 고대 유적지를 찾아 여행을 하고 있다.
    [ 제 1 부: 비밀의 고대도시 카쥬라호 ]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시골에 있는 한 절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자비롭게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웅전의 불상을 비롯해 절을 구석구석 구경하고 다녔는데, 한 방에 이르니 불상을 모두 천으로 가려두었다.

    나는 호기심에 그 천을 벗겨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자를 껴안고 있는 불상이 아닌가! 젖가슴을 드러낸 여자는 그 입술로 부처님(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그 불상이 부처님인지 보살인지 수도승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음)의 입술을 빨고 있었고, 한 팔은 부처님의 목을 감은 채로 그 엉덩이를 부처님의 ‘중요한 부분’ 위에 얹어놓고서 요동치고 있는 아주 생동감 있는 조각상이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수도(修道) 중인 것 같았다. 부처님의 표정과 자세는 전혀 섹스를 즐기는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섹스를 멀리서 관조(觀照)하는 듯했다.

    부처님은 섹스를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수행해 오던 법력(法力)을 시험하는 것일까. 나는 거기서 뭐라고 형언할 수 없지만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을 친구들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때 카메라 불빛을 봤던지 한 스님이 뛰어와서 마구 화를 내며 나를 제지했다. 나는 왜 막느냐며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그 스님은 중국말로 뭐라고 소리쳤는데, 오직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탄트라’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탄트라라는 말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았는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불교용어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병원 일이 바빠 더 이상 탄트라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다.

    또다시 만난 탄트라

    비가 오는 어느날 저녁 퇴근 무렵, 병원 응급실에서 나를 급히 찾는 전화가 왔다. 한 외국인이 교통사고로 다쳤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서, 말은 잘 몰라도 곧잘 의사소통을 하는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나는 병원 전공의 시절 선의(船醫)로 근무하면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부랴부랴 응급실로 뛰어가 보니, 환자는 뱃사람으로 봄베이(지금은 뭄바이로 개칭) 출신 인도인이었다. 가슴을 벗겨보니 흰 끈이 어깨에서 허리까지 걸쳐 있기에 “당신은 고귀한 신분 브라만이군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눈을 번쩍 뜨더니 나의 손을 꽉 잡으며 “Hare Rama Krishna!(라마신이시여, 크리슈나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그는 봄베이 해양대학을 졸업한 1등항해사 바가바나였다. 그는 다리에 골절상을 당했는데 나는 그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도 나에게 신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등 인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바가바나는 젊었을 때 힌두교의 시바 교단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년간 수행했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 즉 성적 기쁨을 단지 감각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실재(實在)하는 신과 일체가 되는 종교적 의식으로 승화시킨다고 했다.

    수행자가 수년간 수행을 쌓으면 특별한 종교행사 때 신도들이 모두 제단 앞에 모여 향을 피우고 북을 치고 횃불을 돌리는 가운데 특이한 요가 행법(行法)에 따라 남녀 결합의식을 치른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서 탄트라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탄트라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섹스를 통해 신과 일치하는 과정으로 득도(得道), 해탈(解脫), 열반(涅槃)에 들어갈 수 있는 수행의 비밀스러운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에 아주 흥미가 당겼다. 섹스를 통해 해탈할 수 있다면, 섹스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구태여 입산(入山)해 암자나 동굴에서 20~30년 도를 닦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바가바나에게 물었다.

    “나와 같이 처자식이 있는 사람도 그런 비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좋은 스승을 만나면 가능하지요.”

    바가바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승(Guru:구루)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구루 스와미 사라난다(Guru Swami Sarananda)가 바로 그분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이제 성인(聖人)이 돼 바람같이 다니는데 어제는 히말라야, 오늘은 데칸고원, 내일은 라자스탄에 나타난다고 하니 나는 맥이 빠져버렸다.

    그러자 실망하는 내 모습을 바라본 바가바나가 내 손을 잡으면서 “친구! 탄트라의 비밀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정글 속의 고대도시 카쥬라호에 가서 일단 시작해보게!” 하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난 일단 카쥬라호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바가바나는 병원에서 에이즈(AIDS) 검사를 꼭 받으라고 귀띔했다. 에이즈 검사증이 있어야만 그 비밀스러운 교단에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터뜨릴 수 있다는 게 그의 조언이었다….

    정글의 도시 카쥬라호

    96년 어느날, 나는 병원에 장기 휴가를 신청하고 인도로 떠났다. 버스는 인도의 시골길을 따라 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인도인의 체취를 맡으며 나는 탄트라의 비밀이 묻혀 있다는 정글 속의 고대도시 카쥬라호로 가고 있던 것이다.

    길가에는 원숭이들이 얼씬거렸고, 마을에서는 소들이 인간의 존경과 공양을 받으며 살고 있었고, 힘든 일은 모두 낙타의 몫으로 돌아가는 이상한 체험을 하면서 말이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현지인들이 마치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나를 둘러싸고 쳐다본다. 나는 사원까지 가기 위해 오토릭셔(삼륜차)를 탔는데 차가 떠났는데도 동네 어린애들이 한참이나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숲속 길을 한참 달렸는데 온갖 새의 지저귐이 들리고 짐승의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원숭이 무리가 내는 소리라고 했다.

    삼륜차가 달리는데 갑자기 소가 길 길 가운데 들어와 떡 버티고 섰다. 운전사는 깜짝 놀라 필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아 겨우 소 앞에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런데 소는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다.

    운전사가 가만히 있기에 성질 급한 내가 차에서 내려 소의 엉덩이를 살짝 걷어찼다. 그러나 소는 끄떡도 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순간 너무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운전사는 새파랗게 질리며 “아이고, 우리는 이제 죽었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더니 곧장 차에서 뛰어나와 소에게 몇 번이나 큰 절을 하며 손발이 닳도록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소가 천천히 길을 비켜 주었다.

    나는 소의 그 무서운 눈초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소는 걷어채기 전에 벌써 도망치는데… 이곳에서는 분명 소가 동네 어르신이고, 소 역시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 소는 외국의 무식한 한 개 같은 놈을 만나 생전 처음 맞아 보았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동물세계에도 계층이 엄연히 존재한다. 신 아래의 첫째 계층은 소(암소)다. 소는 신들이 타고 다니는 동물로 여겨져 수천년 동안 신성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들은 항상 자연 속에서 사색하고, 인간들이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고, 또 항상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 길 중앙에 소가 걸어가면 차들은 길가로 피해 서행해야 한다.

    소 아래 서열로는 인간과 개가 있고, 또 그 아래에 수소와 온갖 동물들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같은 소라고 해도 암소와 수소의 대접은 천양지차다.

    인도에서 놀란 것은 마을마다 암소들을 위해 특별히 ‘몸’으로 봉사하는 물건 크고 건강하고 정력 좋은 수소의 집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암소들이 대자연을 거닐며 사색을 즐기다가 성욕(?)이 발동하면 수소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집에 가서 밤새 젊은 수소와 즐기고 나온다는 것이다. 암소들은 언제 어느 때나 수소들에게 성관계를 요구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데 비해, 만약 (비천한) 수소가 지나가는 암소를 올라탈 경우 그 수소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다고 한다.

    36가지 섹스 테크닉 묘사한 조각상

    나는 카쥬라호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는 현지 안내인(힌두교도)을 구하여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이곳은 요즘 관광지로 개발돼 많은 외국인이 찾아 온다고 한다.

    칸다리아 마하 데바 사원!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달의 신인 찬드라의 자손 찬델라 왕국이 세운 사원이다.

    이곳은 시바신을 모신 사원인데, 본당 안에 시바신의 거대한 성기(性器) 링가가 모셔져 있고 모두가 이 링가에 경배한다. 이 링가 주위에는 36가지 섹스 테크닉을 묘사한 조각상이 있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나는 어두운 법당 안에서 촛불을 들고 천천히 사랑의 기교를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서너 가지의 남녀교합 자세가 얼마나 빈약한 지식이었는지 정말이지 실감했다. 어떤 조각은 ‘six-nine(6-9)’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1000년 전에 벌써 이 왕국에서는 이런 방법이 성행하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졌다. 깊은 탑 속의 법당 안은 암흑천지가 돼버렸다. 나는 안내인을 불렀다. 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져 무서웠다. 겨우 빛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링가 앞에는 낮은 제단이 또 있었다.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어보니, 이곳의 젊은 여사제(女司祭)가 이 낮은 제단에 올라와 완전 나체로 춤을 추는 곳이라고 한다. 나는 “혹시 탄트라에 대해 아십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힌두교 신도는 너무나 반갑게도 그것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정액은 머리에서 만들어져(사실 정액은 머릿속에 있는 뇌하수체의 자극으로 생성된다) 정수리를 타고 내려와 배꼽에 모여 있다가 남녀가 교합할 때 성기를 통하여 방사됩니다. 인간의 정액은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가 고갈돼 결국 인간은 죽는 것이죠. 이 에너지를 역회전시켜 다시 머리 속으로, 생명의 근원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해탈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탄트라입니다.”

    “예? 뭐라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나는 놀라서 다그쳐 물었다.

    “1000년 전 이 제단에서는 그 성스러운 의식이 행해졌죠. 승려들은 북을 쳤고 신자들은 주위에서 횃불을 돌렸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젊은 여사제가 이 제단에 올라와 춤을 추었습니다. 춤이 절정에 이를 때, 여사제는 이 순간을 몇 년이나 기다린 수도자를 데리고 이 제단에서 성적(性的) 교합을 가졌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교합이 아니었고 요가로 오랜 수도 생활을 겪은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극히 어려운 체형으로 이루어졌죠. 성적으로 월등하게 뛰어난 여사제의 엉덩이 놀림에 대부분의 수도자는 그 피 같은 생명의 에너지를 헛되이 쏟아버리기 일쑤였죠. 그래서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나왔죠.”

    “아 그랬군요. 한국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사제의 혼신의 유혹에도 에너지를 쏟지 않고 여사제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버텨내면 그 에너지는 머리 끝까지 올라가 그 수행자는 열반의 세계, 득도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 부처가 되는 것이죠.”

    예술이냐? 외설이냐?

    나는 그 설명을 듣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난 그 비밀의 실마리를 찾은 거야. 안내인은 나를 그 옆에 있는 데비 자그단베 사원으로 안내해 주었다. 거대한 탑의 벽면을 장식한 남녀 교합상들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그 뜨거운 사랑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적나라했다.

    이것은 시바신의 제단에서 벌어지는 성(聖)스러운 성(性)의식의 실제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중에 서서 교합하는 자세는 아주 어려운 체위법인데, 여사제와 수도자 모두 요가를 통한 오랜 수도생활로만 이런 체위가 가능하다.

    여사제는 허리를 깊이 꺾고 다리를 수평으로 들어 남자를 감았으며, 남자 또한 한쪽 다리로만 균형을 잡고 있다. 결국 두 남녀는 한 다리로만 서 있는 격인데 여사제의 격렬한 엉덩이 춤으로 서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좌우에서 두 집사가 팔을 잡아주고 다리를 들어 올려주어 성의식을 도와주고 있다.

    이 외에도 나는 조각들을 볼 때마다 찬탄과 놀라움의 비명을 질렀다. ‘아 이럴 수가! 저, 저런 것까지’ 하고 말이다. 조각들은 너무 사실적이고 생동적이어서 도대체 예술인지 외설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환상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 조각 앞에 서서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안내자의 설명이 필요없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조각이었는데, 안내인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이 조각 작품에 제목을 붙인다면 ‘하급병사들의 하루’쯤 될 것 같은데, 지루한 생활을 하는 병사들이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을 수 없어 암당나귀에다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모습이다. 한 병사가 암당나귀를 뒤에서 안고 욕구를 해소하는 동안, 오른쪽 뒤에서 기다리는 다른 병사는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다음 순번인 듯하다.

    그리고 애꿎은 당나귀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으며, 당나귀 옆으로는 예쁜 팔찌를 찬 한 여자가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것을 본 양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치고 있다. 또 당나귀 앞의 한 병사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물건을 꺼내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 그 표정은 마치 부처님의 얼굴처럼 평온한데, 아마 사정한 직후의 얼굴인 듯하다.

    나는 어설픈 솜씨나마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러면서 안내자에게 “요즘도 저런 탄트라 비법을 수행하는 교단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러 곳에서 의식을 행하고 있는데 나 같은 외국인은 접근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스와미 사라난다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안내자는 그 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분은 아마 카시(Kashi)에 계실 겁니다. 카시라는 말은 ‘영적인 빛으로 충만한 도시’라는 말인데, 흔히 그곳을 바라나시라고 합니다.”

    바라나시(Varanashi)! 그곳은 바로 힌두교의 성지가 아닌가.

    ‘카 마수트라(Kamasutra).’ 나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 와서 ‘카마수트라’라는 고대 인도의 성경전(性經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카마는 사랑(sex), 수트라는 기교(technique)란 뜻인데, 우리 식으로 풀어보면 완전한 사랑 혹은 완전한 결혼생활을 위한 섹스 교과서인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결혼생활에서 성(性)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성에 무지하여 겪는 결혼생활의 좌절이나 파탄을 막고 지속적인 성생활을 통해 부부의 사랑과 건강증진에 초점을 맞춰 지어낸 것이 바로 ‘카마수트라’다.

    나는 강변에 있는 요가학교에서 카마수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훌륭한 경전을 사 보았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실하고 현명한 아내는 매일 아침 남편의 건강을 알아보아야 한다. 남편보다 먼저 깨어나 남편의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환(불알)을 만져 볼지니… 불알이 탱글탱글하고 주름이 까실까실하면 건강하고, 불알이 축 늘어져 있고 뜨뜻하며 땀에 젖어 있으면 이상이 있음을 알아야 할지니라… (중략).’

    산부인과 의사인 나도 놀랄 만한 고대 인도들인의 지혜로운 건강 체크법이 아닐 수 없다. ‘여자의 기분을 알아내는 편’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여자가 데이트할 때 저번보다 더 예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오면 그것은 나에게 더욱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지니 총각들이여 분발하라….’

    여자들은 남자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입으로 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몸 전체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하간 카마수트라가 건강한 부부생활을 위한 경전이라면, 남녀의 성생활을 쾌락을 넘어서 신과 일체가 되는 종교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 바로 탄트라다. 즉 쾌락을 최고도의 힘으로 고양시켜 정신적인 에너지로 만드는 수행법인 것이다.

    섹스에 대한 양대 학설

    여기서 잠시 섹스 에너지에 대한 양대 학설을 짚고 넘어가 보자. 고대 중국인들은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성생활과 건강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다. 중국의 고대 의학서인 ‘의심방방내기(醫心方方內記)’는 동양을 대표하는 성경전(性經典)인데, 일반인에게는 성 지침서로 소녀경(素女經)이 더 유명할 것이다.

    나는 부산대학병원 산부인과 수련의 시절 주임교수의 연구 ‘소녀경의 현대적 해석’을 도운 적이 있다. 세세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중국 황제들의 필독서인 소녀경의 주제는 ‘건강=절제 있는 성생활’이었다. 즉 접(接)하되 사정(射精)하지 말라, 즐기되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섹스 에너지(性力), 즉 정액은 한정돼 있다고 믿은 것 같다. 이들을 속칭 ‘곶감학파’라고 부른다. 인간의 정액은 마치 선반 위에 올려놓은 곶감 두름과 같아서 젊을 때 많이 빼먹으면 늙어서는 빼먹을 것이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요즘 TV 인기 드라마인 조선의 의성(醫聖) 허준도 그의 저서 ‘동의보감’에서 인간이 평생 동안 쓸 수 있는 정액의 양은 서 말 서 되뿐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그래서 절제하고 절제하라, 즐기되 사정을 아껴라 하는 것이다. 여자를 수십에서 수백 명씩 거느리고 사는 중국의 황제에게 이 말이 해당될 것 같다. 그 많은 여인을 상대로 잘 때마다 사정하면 약해지고 단명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반대로 서양에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학파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이른바 ‘샘물학파’라고 부른다. 그들은 인간의 정액은 샘물과 같아서 퍼낼수록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본다. 아낀다고 그냥 두면 샘물은 썩는다고 말하고 있다.

    두 학설 모두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중용을 취해서 이해하기로 했다. 샘물학파라고 해서 샘물을 마구 퍼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곶감학파라고 해서 곶감을 절대 빼먹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두 학파 공히 정액을 규칙적으로 적절히 자제하면서 사용하면 건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힘이 없는 노인에게도 섹스는 중요하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처럼 뜨거운 몸부림은 아니더라도 배우자를 꼬옥 안아준다든지, 사랑한다고 귓속말로 속삭여준다든지, 손 얼굴 귀 등을 만져주는 것도 노인들의 신체·정신 건강에 크게 도움을 준다. 이런 행위도 넓은 의미의 섹스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 바라나시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가 씻긴다고 믿으며, 죽어서 화장한 재를 이 강에 뿌리면 그 영혼은 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곳 바라나시로 찾아오며, 강변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으로 가득하다. 인도인들에게 가장 큰 효행은 바라나시까지 가는 열차의 편도 티켓을 늙은 부모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 바라나시는 지상 최악의 도시 캘커타에 못지않게 먼지와 소음, 혼잡과 시체 타는 냄새로 뒤덮인 도시다. 차선도 신호등도 없는 거리에는 자전거와 인력거 사이로 마차와 승용차가 지나다닌다.

    또 낙타꾼, 어슬렁거리는 소들, 소 뒤를 따라다니며 쇠똥을 줍는 인간들, 들것에 실려가는 시신들, 타다 남은 시신을 놓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개와 천민들, 달려드는 거지들, 지붕 위로 뛰어다니는 원숭이들, 그리고 홀랑 벗고 다니는 수행승들이 있다. 내 눈에는 마치 지옥처럼 보이는데 그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이 신성한 도시라니….

    나는 이곳에서 혼돈의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탄트라나 깨달음에 대해 알려고 할수록 더욱 무지(無知)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심,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할 뿐이었다. 내가 여태 자랑하고 싶어하던 것이 여기서는 추한 악(惡)일 뿐이고, 내가 평소 지극히 혐오하던 것들이 여기서는 지극한 선(善)인 것이다.

    화장터에는 대나무 끝에 많은 등불을 달아 두었다. 내가 뭐하는 데 쓰는 것이냐고 물어보니, 밤에 불빛을 내 “신이시여, 제 영혼이 지금 올라가오니 보살펴주소서”라고 하늘에 신호를 보내는 등불이라고 한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 바라나시. 밤에 나와보니 화장터의 날름거리는 불꽃들과 대나무 끝에 매달린 수많은 등불이 강에 비쳐서 정말로 영혼들이 춤을 추면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갠지스 강변에서 한 편의 시를 지었다.

    ‘갠지스강에서 나는 보았네./ 그들의 영혼의 깨끗함을/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네./ 온갖 옷과 치장으로 가려야 하는/ 내 肉身과 악취 풍기는 내 영혼을 알았네./ 나는 무릎 꿇고 기도했다네./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주신 그대로/ 이 대지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나는 다시 떠났다네./ 바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가장 아름답고도 순수한 그 神을 찾기 위하여/ 내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깨끗한 그 神을 찾는 순간/ 나는 깨달음을 얻고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리라.’

    강변의 높은 언덕에서 몇 년 동안 수행 중인 한 수행승을 만났다. 그는 서양인들의 부(富)와 물질주의를 크게 비난했다.

    “마음의 평안도 없이 가진 게 많으며 안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들은 모두 몸의 평안이지 마음의 평안은 아닙니다.”

    그분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의 열쇠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당신의 욕망을 통제하시오. 그리고 자기 수련을 계속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영원한 기쁨을 얻을 것이오.”

    그 말은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오. 그리고 늘 기도하시오. 그러면 영원한 기쁨과 영생을 얻을 것이오”와 너무나 비슷한 말이었다. 수행방법은 다르지만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나에게 또 충고를 했다.

    “한 집의 가장이 되어 그의 피부가 주름지게 되고 그의 머리가 백발이 되며 그의 자식의 자식을 보게 될 때는 그는 집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그곳에서 집 없이, 불 없이 오직 과일과 나무뿌리만으로 연명하다가 깨달음을 얻어 현인(賢人)이 될 수 있다.”

    인도인들은 죽을 때 가장 가난하게 죽는 것을 가장 훌륭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죽을 때는 빈손으로 죽기 위해 걸친 팬티까지 벗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어떤가. 어떻게 해서든 부자로 죽으려고 한다. 남아 있는 재산을 움켜쥐고는 죽지 않으려고 발광하다가 대개 죽는다. 병원에서 환자가 죽으면 서너 명의 자식과 며느리, 친척들이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아귀처럼 싸우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망자(亡者)의 시신은 한쪽으로 나동그라져 있고, 자식들은 멱살을 쥐고 싸우는 꼴이란….

    흔히 인도인들은 가난하고 더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인도인들은 가난하지 않고 더럽지도 않다. 정작 더럽고 가난한 사람은 깨끗한 양복을 입고 다니는 우리가 아닐까 싶다.

    구루 사라난다를 찾아

    나는 이곳 바라나시에 와서 구루 사라난다(Guru Sarananda)를 열심히 찾았다. 물어 물어서 힌두교인만 출입을 허용하는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 시바교도처럼 이마에 점을 찍고 가로로 회칠을 했다.

    사원의 집사는 나를 스와미 사라난다가 계신다는 넓은 법당(?)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법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시 그 집사를 붙잡고 “실례지만 그분이 어디 계신지 상세히 말을 해주시오” 하니 “그분은 저기 있지 않소. 제단 위에 저처럼 꼿꼿이…” 하고 말했다.

    제단 위에는 벌거벗고 앉아 있는 동상 하나가 있었다.

    “아니, 그러면 구루 스와미 사라난다님은 죽었단 말입니까(Is he dead)?”

    “아니오. 그 분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No, he is alive forever).”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집사는 화가 나 있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의 사멸을 뜻하는 것인데 스승님에게 그런 치욕적인 말을 하다니, 당신 빨리 나가!”

    나는 쫓겨났다. 죽음이란 우리 같은 속세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위대한 성인(聖人)은 신과 같기 때문에 죽음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 한 가지를 알고서 말이다.

    나는 다음날부터 요가학교에 등록하여 수십 명이 들어가는 도장(道場)에서 요가를 배웠다. 허탈한 심정이 사라지고 나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여러 힌두교인을 만났는데, 그중 한 분이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분은 바라나시 힌두대학의 두바이(Dubay) 박사였다.

    “스와미 사라난다 스승은 몇 년 전에 입적하셨소. 그분의 수제자인 묵타난다(Muktananda)가 아직 활동하고 있소. 그 분과 나는 친한 친구이므로 당신이 꼭 원한다면 소개장을 써줄 수 있소. 봄베이에서 기차로 6시간을 가면 가네스푸리(Ganeshpuri)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강을 건너면(강에는 다리가 없소), 원주민 왈리족이 사는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을 지나면 200년 전 그 땅을 점령한 포르투갈인이 세운 성채가 있소. 그 안에 묵타난다의 아슈람이 있소.”

    아슈람(ashram)은 이른바 성지(聖地)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순례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사원을 갖춘 장소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곳까지 가려면 제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군요.”

    다음날 두바이 박사는 묵타난다의 사진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나는 그 성인의 사진을 보았는데 흠칫 놀랐다. 사진 속의 눈길이 너무나 강렬해 내가 빨려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봄베이로 가기로 했다. 인도 여행은 기차여행이다. 고속도로도 없고 비행기는 큰 도시 몇 군데밖에 연결되지 않는다. 이 대륙의 구석구석을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기차뿐이다.

    기차를 타보면 이 사회가 계층사회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최상류 왕족이 타는 칸부터 최하층 빈민이 타는 칸이 구별돼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칸에 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느 칸에 타야 할지 몰라 물었다.

    “저는 어느 칸에 타야 합니까?”

    “당신 아버지가 무엇을 했습니까?”

    “아버지가 촌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저는 의사입니다.”

    “당신이 의사인 것은 필요없고 아버지가 농민이니 당신은 농민계층입니다. 코끼리는 코끼리를 낳고 참새는 참새를 낳을 뿐이고 왕은 왕을 낳고 대장장이는 대장장이를 낳고 농부는 농부를 낳을 뿐입니다.”

    할 수 없이 나는 농부와 의사의 중간을 택하여 이등칸 표를 사서 한바탕 죽기 살기로 승차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차 안은 더욱 충격적이다. 짐 싣는 선반까지 인간들로 가득하고 시트 아래에도 인간들로 득실거린다. 이곳에서는 인간 위에 인간 있고 인간 밑에 인간 있다더니 사실이었다….

    맛의 충격, 소리의 충격, 종교의 충격, 촉감의 충격…. 인도여행은 충격에서 시작하여 충격으로 끝난다. 이곳에서는 신을 모신 사원이나 기념관, 박물관 등 큰 건물에 들어가려면 꼭 신을 벗어야 한다. 어떤 때는 신발을 벗고 1시간 이상 걸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처음에 두꺼운 운동화를 벗고 양말을 벗으니 허옇게 죽어 있는 발을 보고 놀랐다. 물기 있는 잔디밭을 맨발로 걸으니 처음으로 발의 쾌감을 느꼈다. 발은 40년 만에야 해방돼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과 향기로운 풀냄새를 맡으며 아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신을 벗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발과 발가락이 대지와 입맞춤하며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틀이 지나자 발은 뚜렷이 핏기가 돌고 햇빛에 그을어 빠알갛게 살아나고 있었다. 발이 해방되어 상쾌하니 몸 전체가 상쾌하다.

    가끔 거리나 마을에서 홀랑 벗고 꽃목걸이만 하고 다니는 수행자를 만나는데, 포경수술을 하지 않은 성기(性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참되어 보인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부터 물건을 가리기 시작했을까. 기독교 논리에 따르면 태초에 죄를 짓고 난 후부터다. 성경 창세기 3장7절을 보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는 눈이 밝아져서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껴 남자는 두 손으로 물건을 가리고 여자는 한 손으로는 음부를, 다른 한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고 전한다.

    우리의 죄와 가식을 가리는 이 옷들. 그런 면에서 보면 홀랑 벗고 향기나는 꽃만 목에 걸고 다니는 수행승들은 진정 그 영혼이 순수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나는 봄베이에서 현지인들에게 가네스푸리까지 가는 방법을 물어보었다. 그런데 열에 열 명 다 대답이 틀리다. 버스가 있다는 사람, 기차로 가라는 사람, 택시로 가라는 사람, 배를 타고 가라는 사람, 배를 타지 말고 차라리 끝내주는 배(腹)를 타는 곳으로 가자는 사람 등….

    교통편은 그렇다 치고 박사가 말한 왈리족은 어떤 족속일지 두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무사히 그 마을을 통과할 수 있을까. 부닥쳐보자. 설마 식인종은 아니겠지.

    해골로 물 마시는 왈리족

    난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의외로 순박하고 신앙심이 두터웠다. 그들은 해골 바가지로 물을 떠먹었는데 내가 놀라서 물어보았다.

    “이 해골(두개골)은 나의 존경하는 스승의 것이오. 이 스승의 해골에 물을 담아 마시면 그분의 영혼과 지혜까지 물 속에 녹아서 내 몸 깊숙이 들어옵니다. 자 당신도 한번 이 해골로 물을 마셔 보시오.”

    그들은 기꺼이 나를 안내해 주었다. 마을과 숲을 지나니 또 강이 나왔다. 아니 이 강에 대해선 두바이 박사의 말이 없었는데… 현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이 강을 건너면 당신이 찾아가려는 아슈람이 나옵니다. 하지만 당신을 배로 건네줄 수는 없습니다. 저쪽 피안(彼岸)의 세계와 이쪽 속세(俗世)의 약속이죠. 저쪽으로 가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이곳에 버리고, 모든 인연을 끊고 맨손과 맨몸으로 헤엄쳐 건너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하긴 우리 선조들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집을 나와 깊은 산속에 있는 스승을 찾아 속세와 인연을 끊는 의미에서 삭발을 했다. 그리고 계율을 지키며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 평생을 정진하지 않았던가. 인도에서는 이런 깊고 넓은 강이 수도자를 위한 좋은 관문이 돼 왔다. 진정 도(道)에 뜻이 있는 사람만이 목숨을 걸고서 이 강을 건너오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건너가자니 강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고, 돌아가자니 여기까지 죽을 고생하고 온 것이 너무 아까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번민의 밤을 보냈다.

    나는 달마대사와 그 제자 신광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달마대사가 중국 하남(河南)의 숭산 소림사의 동굴에서 면벽(面壁)수도를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신광이라는 중이 구도를 하러 찾아와 밤새 눈발 날리는 동굴 밖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대사는 며칠이고 상대해주지 않았는데 신광은 예리한 칼로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 대사 앞에 던지며 “대사님, 구도를 향한 저의 마음은 이와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감명받은 달마가 비로소 제자로 받아 주었다고 한다.

    구도의 길은 가시나무 위를 걷는 것처럼 괴롭고 힘들며 오랜 끈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없이 결코 구도의 길에 들어서지 말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인 것이다. 신광은 그 뒤 달마를 계승하여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된다.

    ‘그래 결심했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리라.’

    다음날 아침, 나는 왈리족의 전송을 받으며 강을 건넜다. 강물은 따뜻했고 물살도 세지 않았다. 나는 한참 헤엄쳐 가다가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려고 잠수를 했다. 물 속으로 한참 내려갔지만 강바닥에 닿지 않았다. 물이 혼탁해 물고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헤엄쳐 물을 건너는데, 강 저편에서 몇몇 사람이 나를 지켜보는 것이 보였다. 강을 건너 수행자들을 만나자 난 합장을 했다. 그들도 나에게 합장하고는 나를 아슈람으로 인도해 주었다.

    아슈람 건물 밖에는 총을 찬 보안요원 7, 8명이 지키고 있었다. 탈주자를 막기 위함인가, 침입자를 막기 위함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제단 위의 황금 신상

    나는 대기실에서 한참 쉬었는데, 저녁 6시에 구루기타(구루에 대한 찬미시간) 의식이 있다고 한다. 이곳 집사에게서 흰 가운을 빌려 입었는데, 누구든지 예배 성소(聖所)에서는 알몸 위에 가운 하나만 걸치게 되어 있었다.

    나는 4시쯤 성소에 들어갔는데 안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제단 위에는 황금으로 빛나는 구루 사라난다의 전신상(全身像)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덩어리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모두 황금이었다. 신상(神像)의 뒤에는 형형색색 찬란한 빛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벽면에는 죽 돌아가며 대스승 사라난다와 수제자인 스승 묵타난다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사진 밑에는 교리(敎理) 같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찬찬히 음미하며 읽었다. 원문과 내 어설픈 번역은 다음과 같다.

    ▲God and Guru give everything, but man doesn’t know how to take(신과 구루는 모든 것을 주신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받는 방법을 모른다).

    ▲Guru is neither man, nor God, nor individual. he is just Guru, who destroys darkness and gives light(구루는 인간도 신도 아니다. 그는 단지 구루일 뿐. 그는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을 주신다).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Guru and God. Only God manifests himself in the form of the Guru(신과 구루의 차이는 전혀 없다. 신이 구루의 몸을 빌려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God is in your heart. You lost him in your heart. You will find him only in your heart(신은 네 마음 속에 있다. 너는 신을 네 마음 속에서 잃었다. 너는 단지 네 마음 속에 계신 신을 찾아야 한다).

    ▲To receive when the Guru gives, to give when the Guru accepts, to live as the Guru’s entirely. These are the marks of devotion to the Guru(구루가 줄 때에는 받기 위해서, 구루가 원할 때는 바치기 위해서, 온전히 구루 같이 살기 위해서. 이것들은 구루에 대한 헌신의 징표이다).

    ▲To find that Great Ecstasy, we repeat the name of God. The name of God is charged with beauty and energy(최고의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신의 이름을 계속 부른다. 아름다움과 정력이 충만한 신의 이름을).

    나는 그 글들이 주는 영감(靈感)에 깊이 빠져들어 잠시 나를 잊고 있었는데, 앞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선녀(仙女)들이 흰옷을 입고 하늘하늘 들어왔다.

    처음에 나는 선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선녀가 아니라 아름다운 서양여자들이 흰 가운을 걸치고 찬송가 같은 책을 들고 줄줄이 들어와 구루 사라난다의 황금신상에 절하며 경배했다.

    다른 문으로는 많은 젊은 남자신도들이 들어와 남녀 따로 나뉘어 제단을 보고 앉았다.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많아 보였다. 이 많은 아름다운 남녀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저 예쁜 여자들은 탄트라의 제물(祭物)일까. 남녀 신도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찬미했다.

    “하레 함(Hare Ram ; 오 신이여).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 ; 오 크리슈나 신이여).”

    그래! 바로 그 신었다. 인도인 항해사 바가바나가 내게 말해준 그 신이다. 향을 피우고 북을 치면서 횃불을 돌린다고 내게 말해주었지.

    오후 6시가 되자 조용한 음악이 흐르더니 누군가가 큰 북을 방의 한가운데로 가져왔다. 상체를 벌거벗은 한 미남 서양인이 제단의 황금신상 앞에서 3개짜리 횃불을 돌렸다. 또 햇살에 그을려 아주 건강해 보이는 한 청년이 북을 쳤다. 그 북소리는 마음 속을 울렸고 40년 동안 누워 자던 내 자아(自我)를 깨우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북소리에 맞추어 창문 밖에서 종소리가 들렸는데 그 우렁찬 종소리는 내 자아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흰 연기가 나는 화톳불을 신도(信徒)들 사이로 돌리고 내 주위에서도 돌렸다. 제단 앞에서 4개짜리 횃불을 돌렸다. 횃불은 더 크게 불타오르고 북소리와 종소리도 점점 빨라졌다. 내 심장도 종소리에 맞추어 고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황홀한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단 앞에서는 5개짜리 횃불을 계속 돌렸다. 북소리와 종소리도 횃불이 더 크게 불타 오름에 따라 더욱 빨라지고 내 맥박도 점점 빨라졌다.

    내 마음 속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제단 앞에서 7개의 횃불이 돌아갈 때는 내 가슴 속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고 전신이 그 기쁨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기쁨의 극치감.

    내 옆의 한 신도가 “빛이 보여요” 했다. 정말 제단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 흰 빛, 난 그 빛을 보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우차, 케차차 우차, 우차, 케차차… 신도들의 열광적인 함성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깨어나 보니 많은 신도가 그대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잠들지 않은 한 신도에게 물었다.

    “성(性)의식을 치렀나요?”

    “아니오. 성의식은 아주 특별한 날에만 합니다. 당신은 엑스터시에 도달하더니 그대로 누워 자버리더군요.”

    아마 오전에 강을 건너와 너무 피곤했던 것 같았다.

    탄트라의 도량

    다음날 나는 간곡히 부탁하여 탄트라의 도량(道場; 도를 수련하는 곳)에 가볼 수 있었다. 여러 도사가 갖가지 방법으로 수련하고 있었다.

    난 점점 놀라기 시작했다. 한 도사는 성기(性器)에 천을 감아 몽둥이처럼 만들어 큰 나무에 대고 치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치는지 나뭇가지가 마구 흔들렸다. 저것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내가 의과대학생일 때 부산 대신동에서 하숙했는데 그때 옆방에 있는 대학 대표씨름선수가 아침마다 성기에 붕대를 감아 물이 가득 담긴 드럼통을 마치 야구방망이로 치듯이 하면서 성기를 단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왜 이런 훈련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씨름시합 중에 상대방 선수가 급소인 불알을 치거나 꽉 잡아 순간적으로 힘을 못쓰게 하는 반칙을 가끔 하기 때문에 몸의 다른 부위와 마찬가지로 성기도 단련한다는 것이다.

    집사는 나를 큰 스승에게 데려갔다. 나는 그분에게 큰 절을 했다. “저는 먼 동방의 나라 코리아(Korea)에서 스승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영원한 구루시여! 탄트라, 그 놀라운 성력(性力)을 어떻게 수련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그분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몸소 수련 비법을 보여 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 “스, 스승님. 무, 물건이 찌, 찢어지겠습니다” 하고 외쳤다. 하지만 스승은 전혀 힘들어하지 않고 일어났다. 무겁고 큰 벽돌을 4장이나 달고서….

    세상에, 나는 이런 수련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은 절대 따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구루는 수십년간 수련을 통해 단련된 성기(性器)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일반인이 따라하다가는 물건이 찢어져 성불구가 될 수도 있다. 여하간 나는 탄트라가 이렇게 어려운 수련인 줄 몰랐다.

    나는 아슈람에 묵는 동안 파란 눈의 수많은 외국인을 지켜보면서 인도의 종교가 어떻게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이는 서양인들이 2000여 년이나 자신을 지배해 오던 하나님에 식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 서양에서는 신과 인간이 주와 종의 관계로 설정돼 있지만, 인도에서는 인간이 신이자 주인이다. 사람의 몸 내부에는 또 다른 정신적인 실체가 존재하는데 명상과 수련을 통하여 자신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그 절대적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신(바로 자신의 원래 모습)을 찾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렇게 자신의 본체(위대한 영혼)와 대면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을 통하여 자신도 신과 같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고 여긴다.

    나는 맨발로 추수가 끝난 인도의 대지를 걸었다. 거친 땅에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따끔따끔 아팠지만 상쾌한 기쁨을 느꼈고 정신은 더없이 맑아졌다. 나는 대지에 앉아 끝없이 보이는 숲과 평원을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겼다. 나를 낳아주신 대지여! 나를 키워주신 하늘이여! 따스한 대지(大地)를 느끼니 내 마음 깊은 심연에 잠들어 있던 자아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거짓과 오만과 온갖 허욕으로 가득 찬 껍데기를 자아(自我)는 비웃다 못해 그냥 무시해 버리고 살았다.

    대지에서 조용히 명상하니 바람 소리가 들린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땅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난 이제 길을 찾았어.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을 찾은 거야. 그 길 끝에 있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자아를 만나기 위해 난 첫 발을 내디딘 거야.

    나는 탄트라의 비밀을 찾기 위해 호기심으로 인도를 방문했다. 그런데 인도의 대지를 걷는 순간 그 호기심은 차츰 경외감으로 바뀌었고, 탄트라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8만6000가지나 되는 수많은 수행 중 하나임을 깨닫았다.

    단지 섹스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다는 환상을 가졌던 나는 탄트라의 어려운 수련과정을 보고나서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나는 탄트라의 심오한 진리를 만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함부로 탄트라를 말한 것 같다. 이 점 널리 양해를 구한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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