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100평 남짓한 밭, 농약과 화학비료로 생명을 잃은 흙밭에 땅힘을 북돋기 위해 산에서 낙엽과 부엽토를 얻어오려는 것이다.
낙엽을 이불로 삼아 수년, 아니 수십년 동안 갖가지 생명을 키워온 부엽토는 검고 부드럽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수십억의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이 속에서 박진감 넘치도록 꿈틀거리고 있음을 생각하면 손으로 만지기가 두렵고 떨린다. 두려움을 떨치고 부엽토를 손으로 긁고 삽으로 퍼내 자루에 담으며, 그 많은 생명들에게 죄짓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직 농사일에 농익지 못하고 농업노동으로 단련되지 못해 턱없이 부족한 나는, 50kg 정도인 부엽토와 낙엽을 지고 산을 내려온다. 비탈지고 고르지 못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나무들이 내 얼굴을 할퀴고 길을 가로막는다. ‘왜 우리 생명인 밭을 훔쳐가느냐? 안 돼! 못 가!’라고 소리지르는 것 같다.
지게를 받쳐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하고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다가, 하늘이 부끄러워 시선을 주변 돌짝밭으로 돌리고 만다. 다시 언덕길을 오르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심조심 한 발짝씩 옮겨놓는 내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다시 한 번 쉬면서 아버지 생각을 한다.
어머니에게 들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던 시절, 아버지는 농한기인 가을이나 이른 봄에도 온돌방에 불을 지피려 나무를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무를 하러 간 아버지는 지게를 부셔버리고 내려왔다고 한다. 나무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지만 농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단다. 무거운 나뭇짐이 내리누르는 힘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내려오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따가운, 허덕대는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중에 면서기 일을 하게 되었고, 이 일을 도시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았던 것 같다.
1962년경에 우리가 살던 서부이촌동 판잣집이 홍수에 잠겨 봉천동 산꼭대기로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때 정부에서 건축자재를 지원받았는데, 이 자재를 봉천동 산꼭대기로 아버지와 함께 날라야 했다. 정말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육체노동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나무 무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발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곧 숨이 막혀 죽을 듯한 느낌도 든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서 빈민의 친구로
그 뒤 아버지를 따라 공사현장을 다니며 모래와 자갈을 등짐져 나르는 일을 했다. 오로지 먹고살기 위한 육체노동이었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열망이 컸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들끓었다. 노동은 마지못한 호구지책의 고통이었다. 그 밖에 건축현장에서 벽돌 쌓는 일을 돕는 뒷일꾼, 남대문 보수공사의 잡일 등을 하면서 먼지를 마시는 일도 많았다.
이 무렵 신학교 기숙사 일을 했는데, 이를 연고로 신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형이상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인간 정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동안 육체노동은 천한 사람들의 생계수단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형이하학과 인간의 사회적 삶의 조건에 관심을 갖는 민중운동을 하면서도, 또 의식화 운동과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행동을 할 때도, 육체노동은 우리가 하고 있는 정신노동(운동)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 변방에서 가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중과 동일해지기를 모색하던 나는 어느덧 민중의 육체노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육체노동이 기술노동과 접목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건전한 토대를 세우는 기반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이 생기기 전에도 간헐적인 육체노동으로 나를 단련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육체노동이 사회운동을 하면서 생기는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서 피폐한 정신을 맑게 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체험이라고 인식하는 정도였다.
내친 김에 민중과의 동일화를 위해 성직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처절한 민중의 생존현장인 육체노동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러나 4년여의 체험은 육체노동이 피폐한 정신을 맑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민중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며, 노동력을 팔아서 잘살아보려는 시장경제 논리는 경매장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을 초라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농사일이 겁나 도시에서 산다고?
육체노동을 하는 민중에게는 시장바닥과 구분되는 위대한 정신이 있어서 그것이 역사와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신념이 내게 있었다. 이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도시 빈민들과 함께 살았다. 빈민은 민중세력 중에도 주변세력이라는 소외감을 감내하면서도 주변의 삶을 소중하게 껴안았다.
그런데 이 신념이 차츰 깨지기 시작했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빈민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사회구조가 도시 빈민을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을 하기에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연에 몸을 던졌다. 시골에서 나무를 하고 뙤약볕 아래에서 김을 매거나 모를 심는 육체 노동이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때로는 외로움을 타기도 한다. 일에 열중하다가 옆을 보면 함께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할 때는 힘이 들어도 외롭지 않았는데. 그러나 단언하건대 이 외로움은 곧 사라진다.
많은 사람들은 농촌에서 살고 싶어도 농사일(육체노동)이 겁나 못 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곰곰이 도시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자. 도시에서 생활하면 육체적으로 고달프지 않은가?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매일 두들기고 사는 사람들은 육체가 편안한가?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플 것이다. 회의는 또 어떤가? 토론은 어떤가? 이런 모임이 끝나고 나면 몸이 나른해지거나 입술이 부르트는 일은 없는가? 사업상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떤가? 긴장하고 경계하며 계산하고 다음 행보를 염두에 두고 머리를 짜는 동안 받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인가?
도시에는 안락의자가 있고 자동차가 있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노래방이 있고 술집이 있다. 그렇다고 고통과 괴로움을 다 씻을 수 있는가?
서울에서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요즈음 술을 못 먹는다고 한다. 몸이 곯을 대로 곯아 술이 몸에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렇다고 한다. 일찍 집으로 가서 쉰다는 것이다. 몸도 피곤하지만 오염된 공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한다.
건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생산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육체노동을 피할 수 없고 그로 인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다 마찬가지다. 단지 똑같은 일을 단순 반복하지 않거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여지가 많고 적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도시에는 사람의 눈코입과 감각을 즐겁게 하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널려 있기는 하다. 이는 육체노동이 힘들고 괴롭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도시에서도 힘들고 괴로운 육체노동을 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즐기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더 값지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인기와 명예를 얻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고 가르치고 지도하는 동안 자기 능력과 힘을 과시하는 일에 취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에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쓴잔을 마셔도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도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육체노동을 견딜 수 없어 시골에 오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시골에서 겪는 육체노동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지게질을 하고 삽으로 땅을 파거나 퇴비를 뒤집는다. 괭이로 굳은 밭흙을 뒤집고 고랑을 만든다. 호미를 들고 밭고랑을 다니면서 풀을 뽑고 돌을 골라내는 일도 한다. 20~40kg인 사료 포대나 퇴비포대를 등이나 어깨에 메고 옮겨 논밭에 뿌린다. 묏자리를 하고 허리를 구부려 모를 심고 논에서 자란 피를 뽑아준다. 들이나 논두렁에 자란 풀을 낫으로 베어주기도 한다. 그밖에 팔과 다리 근육에 힘을 싣고 온 몸에 무게를 가하는 각종 노동을 한다. 집 짓고 수리하고 축사도 지으며 길도 다듬고 상수도와 하수도 공사도 한다. 장독대도 만들고 정원도 꾸미며 나무도 심는다.
노동을 하는 내내, 눈에는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이 들어온다. 향기로운 꽃냄새가 항상 주변에 있다. 나비와 벌 곤충과 갖가지 새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내는 음악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일한다. 덥고 힘들면 바로 옆에 있는 개울을 찾아 발을 담그고 주변의 열매를 따먹으며 쉬기도 한다. 맑고 상쾌한 공기가 코와 폐부 깊숙이 들고난다. 땅위와 땅속의 벌레들과 미생물을 만나 대화하고 교감하며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돈이나 명예나 인기, 지배와 쾌락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생명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먹을 것이 생기고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풍요로운 정신과 감성의 세계에 젖어들 수 있고, 이러는 동안 근육의 피로와 몸의 고달픔이 사라진다. 한 가지 일만 단순반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육체노동은 아기자기하다. 무릇 육체노동은 팔과 몸의 근육을 쓰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단순 노동이 아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 정신과 의식과 이성이 더 깊어지고 넓어질 뿐만 아니라 맑아지고 고요해진다. 때로는 마음이 비어 있어서 세상의 온갖 것을 품을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도시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뿐인가? 이런 경험을 통해 친구들을 생각하고 옛날 도시에서 아옹거리며 다툰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큰 꿈을 품은 일, 의식과 사명감으로 치열하게 살던 일,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일하고 고민하며 울고웃던 생활을 떠올리기도 한다.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을 연대하기도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때로는 옳은 일을 위해 힘들게 도시에서 사는 마음의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자연의 바다에 그들의 얼굴과 몸부림을 투영해보면 그 속에서 함께 허우적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눈을 뜬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사회, 역사와 세계에 대해 명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래서 육체노동은 정신세계로 연결되며 세계관과 역사관이 새롭게 자리잡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나는 누구이며 인생이란 무엇인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정치와 경제는 어떻게 되어야 하고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쫓아다닐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사는 집에는 1년에 1000여 명이 방문한다. 우리는 이들과 삶과 경험을 나눈다.
육체노동은 몸으로 사는 형식이다. 나는 서울에서 머리로 사는 것보다 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성서와 신학도 몸으로 사는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몸으로 산다는 것을 단지 ‘아는대로 실천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몸으로 산다는 것은 육체노동과 맞물리면서 내용이 풍부해진다. 자연의 수많은 생명체를 보며 이들이 온몸을 움직이고 노동을 통해 생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노동은 생명을 일으키는 노동인 것이다.
‘식물의 정신세계’라는 책을 접하면 식물은 인간이라는 생명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식물들과 함께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 그들은 노동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 생명을 일으키는 동지임을 알게 된다. 곧 그 경험은 느낌을 뛰어넘어 의식과 가치관으로 자리잡는다.
농작물을 심기 위해 밭에 퇴비를 주면서 생각한다. 퇴비는 땅 속에 미생물들을 발생하게 한다. 수억 종류의 미생물들이 상부상조하고 어울려 때로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안 그들이 흘리는 피땀이 있고 열정과 의지가 있다. 미생물들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생명을 위한 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뿌린 씨앗도 생명유전자를 지니고 생명을 일군다. 씨앗이라는 생명은 미생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신을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부식시킨다. 주변 미생물들과 치고받고 먹고 먹히면서 생명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노동을 몸의 노동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를 ‘밀알 노동’이라 말하고 싶다. 씨앗 하나가 얼마나 작은가? 그런데 거기에서 수백 수천 개의 열매가 맺힌다. 땅속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일으키고 있는가? 작은 자의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밀알 노동이고 자신을 분해하고 희생한다는 뜻에서 밀알 노동이다.
성서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밀알 노동을 생각하게 된다(이 점은 한신대 이준모 교수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육체노동, 몸의 노동, 밀알 노동으로 시골의 일상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생태계 최대 교란자는 인간
자연 속에는 살벌한 생존경쟁이 있다.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인간과 자연의 생명체 간에 모두 따뜻하고 포용적이지도 않다. 예를 들어 가시나무는 주변 다른 식물에게는 아픔이 되어 다른 생명을 억제하기도 한다. 멧돼지가 사라져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칡넝쿨은 온갖 나무를 휘어감아 그 생명력을 억제한다. 쇄뜨기 풀도 각종 넝쿨 식물도 땅과 식물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본래 자연 생태계는 절대적인 지배자도 없고 제왕 같은 폭군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면서 평화와 공존과 공생의 자연생태계를 교란한 것이다. 산림정책을 다루는 사람들도 생태적 원리보다는 사람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육림사업을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산림은 자연생태계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 토종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토종 생태계가 외래종에 밀려 말살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인간들이 무제한 개발로 여러 동식물의 씨를 말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일에 맞서 싸우는 일도 밀알 노동으로 드러내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것이 생태계의 엄연한 질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면 인간이 파괴하고 훼손한 생태계가 인간에게 반란을 일으킨다고 볼 수도 있다.
자연을 살리고 생태계 원리가 회복되도록 인간이 희생하고 자기를 해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연과 인간은 공존할 수 있으며 우리 후손이 이 땅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영원토록 인간의 역사와 세계가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노동이 자연 생태계를 훼손한 어리석음과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귀농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인간적 삶의 모범을 만들어보겠다고 ‘생태마을’을 세우기 위해 산을 ‘개간’하여 집을 짓고 밭을 만들기도 했다. ‘개간’이란 노동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고 포크레인이 나무를 무지막지하게 쓰러뜨리고 풀을 뒤집어놓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 생명들이 울고 고통스럽다고 불평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못된 인간에 대해 분노하고 한을 품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아파하고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생태마을을 조성한답시고 자연의 생명체를 괴롭힌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나무를 심고 채소와 꽃을 심으면서 더 다양한 생태질서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일말의 보상을 시도하고 있다. 아니 자연의 생명체만으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아니라 이들 속에 인간도 끼여들어 가족이 되고 함께 생태계의 생명력을 복원하는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이 먹고 먹히는 동안 절대 지배자도 없고 폭군도 없이 스스로 평등과 평화를 일궈가는 것처럼 우리도 이 생태적 원리에 합류하는 마음을 가지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그들에게 속죄가 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는 것
도시에서, 노동은 대체로 통제당하고 규격화되어 있으며 요구에 따라 이뤄진다. 이는 사회 질서와 규율에 짜 맞춘 노동일 뿐이다. 이런 노동은 사회체제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골에서 이뤄지는 가족농의 육체노동은 사회 구조와 체제에서 자유롭다. 노동량이 적으면 적게 먹으면 된다. 적게 먹는다고 해서 일찍 죽는 것도 아니다. 더 오래 살 수도 있다.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고 누구의 지시를 받을 일도 없다. 자율성과 독창성이 있을 뿐이다.
이런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탐구하며 명상하고 상상한다. 기존 지식과 경험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노동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하고자 한다. 그런 경지에 들어설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때는 우리 영성이 더욱 풍부해져 있을 것이다.
노동의 결과는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을 이웃과 나눠먹고 깨끗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보급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땅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는 삶이 21세기에 필요한 삶의 모범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모범을 세우려면 자연에서 자연의 생명체들과 함께 노동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세상을 향해 속삭이고 싶다.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