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는 2명이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 아닌 설악산을 근거지로 왕건에 대항했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으로 들어가 금나라를 세웠다.
생몰연대를 전혀 알 수 없는 신비의 인물인 마의태자는 일반적으로 개골산, 그러니까 지금의 금강산에 숨어 살다가 자결한 것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가지 않고 설악산에 갔다! 일찍부터 이 말을 하고 다닌 사람은 서울 보성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재직했던 김종권씨였다. 이미 작고했는데, 일찍부터 이 사실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는 일에 여생을 바친 분이었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건, 설악산에 갔건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저기 다리 품을 팔면서 외치고 다녔을까? 한때 필자도 김종권 선생을 한심한 재야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우연히 이 문제를 다룰 기회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다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실의에 빠져 죽으러 갔다는 뜻이고, 설악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신라의 국권을 왕건 같은 반역자―당시 왕건은 일개 반란분자에 지나지 않았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금강산과 설악산이 가지는 상징 코드를 해석해내면 마의태자와 관련한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왕건은 고려의 건국 명분을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국권을 평화적으로 양도받아 은근히 고려 건국에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미하려 했다.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차기 대권 후계자인 태자가 경순왕의 양국(讓國)에 반대한다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왕건은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고 중신들과 상의했을 것이고, 중신들이 “간단합니다. 태자를 마의태자라 부르게 하시고 금강산에 죽으러 갔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역사 왜곡이란 이런 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왕건도 이 소리를 듣고 탄복했을 것이고 “그리 하거라” 했을 것이다. 당시 금강산은 그곳에 유배될 경우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地名)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 보자.
인제 김부리 지명의 유래
강원도 인제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속초 쪽으로 거의 다 가 한계령을 넘기 직전에 있다. 인제군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차로 가려면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인제 어구에 서 있는 ‘마의태자유적비’를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먼저 김부리에 대해 적어놓은 ‘인제군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김부리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이곳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김부리로 들어가 보니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폐촌 아닌가. 또 김부리와 나란히 갑둔리(甲屯里)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김부리와 갑둔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말했다는데, 육군에서 재빨리 이 일대를 사격연습장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지금 김부리에는 이 마을 어린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이 텅 빈 채 서 있고 그 옆에 대왕각이 남아 있다. 이름이 대왕각이지 서낭당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이 분지에 마을이 셋이나 있었고 마을마다 대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하나 남은 대왕각마저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000년 동안 김부대왕각에서 김부대왕 제1자의 위패를 모셔온 신라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산골로 변해버린 것이다.
마의태자 유적지는 비단 경주김씨 후손이나 강원도 인제군의 역사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에도 호국정신을 기리고 가르치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이다. 바로 그런 곳이 국군의 불도저에 의해 역사의 무대 밖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마의태자 유적지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왕릉 터가 없어지고 그 위에 아스팔트가 깔리는 순간이었다.
마의태자 유적지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있다고 처음 밝힌 이는 19세기 초의 유명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었다.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인제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이규경은 이 마을을 답사하지 못한 탓에, 김부가 마의태자란 사실을 모르고 경순왕으로만 이해했다.
실제로 김부리의 김부대왕각에 모셔놓은 위패에는 ‘김부대왕 제1자’라고 명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나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탑이 마의태자가 죽고 난 후 그 후손이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항려(抗麗) 운동의 기지
김부리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왕릉터와 김부석탑 2기(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1기), 그리고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이 있다. 이 골짜기를 ‘맹 개골’이라 전하는데 개골산의 개골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유물은 대왕각 제단에 배설돼 있었다는 철마상(鐵馬像)이다. 이것 역시 누군가 가져가버려 찾을 길이 없는데 그 모형이 남아 있다. 철마상을 두고 경주의 신라왕릉에서 발굴된 천마상(天馬像)을 모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가 있지만, 필자가 아는 한 철마상은 대장간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符籍)이었다. 이런 부적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곳에 대장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장간에서는 농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도 김부리가 고려에 반대하는 항려운동(抗麗運動) 기지였다는 증거로 이 고을의 특이한 지명을 들 수 있다. 김부리 옆의 마을 이름이 갑옷 갑(甲)자에 진 칠 둔(屯), 즉 갑둔리다.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군사적인 이름이 왜 필요했을까. 또 한 골짜기의 이름은 막을 항(抗)자에 군사 병(兵)으로 항병골이니, 이렇게 위험천만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거기다 단지(斷指)골이 있고, 임금이 넘었다는 행차 고개에다, 수거 넘어 등의 지명이 있다.
더욱 괴이한 것은 다물리(多勿里)라는 지명이다.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 국권 회복 또는 광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지명들이 모두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암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곳 인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와 관계 있다고 믿는 지명으로 경기도 양구군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을 든다. 이곳에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부하인 맹장군이 양구지에 가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징발해 저장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 경내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은행나무가 마의태자가 심은 것이라는 전설은 너무 유명하고, 인제와 지척간인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 지왕동(至王洞)이 있는데, 마의태자가 횡성군 탑산(塔山)을 거쳐 이 마을에 왔다가 인제로 떠났다는 것이다.
다물리 마을에서 해마다 지내던 민속행사 가운데 마의태자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았다 한다. 대왕각(大王閣) 동제(洞祭)에서는 제상에 꼭 미나리떡과 취떡을 올려놓았다는데, 마의태자가 이 곳에 와서 특히 좋아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제례 때는 절을 네 번이나 했다고 전한다. 천자(天子)가 아니면 4배까지 하지 않는 것이 예다.
이러한 김부리 마을의 동제는 고려 500년 동안 몰래 지내야만 했을 것이다. 고려왕조가 볼 때 마의태자는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마의태자라 하지 않고 경순왕 이름인 김부를 썼을 것이다. 탄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족 몰살의 화를 당했을지 모른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멸망 후 200년 만에 영남지방에서 신라 유민들이 항려운동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무신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고려왕조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마의태자와 직접 관계가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신라 유민들은 신라가 망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는 두 사람이었다”
마의태자는 조국 광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라벌을 떠났고 뜻을 같이하는 충신열사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는 화랑(花郞)의 나라였다. 화랑의 힘으로 발전하고 또 통일의 꿈을 이룩한 나라였다. 그런 신라가 아무리 타락하고 나약해졌다 하더라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고려에 순순히 항복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의태자는 화랑답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권을 물려받을 사람이 바로 마의태자 아니던가. 그런 자리를 한마디로 반역자이자 역적인 왕건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그래서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무조건 항복에 극력 반대했다고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이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 얼마나 의젓하고 화랑다운 말인가. 태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하나 아직 충신과 의사가 많이 남아 있다. 둘째, 신라의 민심이 흩어졌다고 하나 수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셋째,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가 그만둘 일이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다.
한편 이때 경순왕의 다른 왕자 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해인사에 들어가버렸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고려의 관사(官史)인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고 마의태자 한 사람만 반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신라의 왕손인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족보로 가장 오래 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인조 20년, 1642년)’를 보면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기 전에 두 부인(석씨와 박씨)이 있었고 그 사이에 왕자를 여덟 명이나 두었다. 이들 여덟 명의 왕자 가운데 두 사람이 개골산에 들어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즉 마의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이 광복운동을 하러 입산했다는 말은 안 하고, 죽으러 갔다고 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를 덜기 위해 다른 일반의 경주김씨 족보에는 경순왕의 첫째 왕비인 석씨 부인이 기록돼 있지 않다는 점을 밝혀둔다. 말하자면 경주김씨 내부에도 이견이 있는 것이다. ‘삼성연원보’를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경순왕의 둘째 왕비 박씨부인만 인정하고 그 맏이인 김일이 마의태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신라삼성연원보’와 같은 내용의 족보가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순왕의 첫째 부인 석씨의 존재가 재확인되고 있다. 일제시기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남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첫째 부인 석씨가 빠진 데 비해 북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석씨가 기록돼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마의태자 후손으로 보이는 김씨가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웠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어쨌든 마의태자는 혼자서 경주를 떠나지는 않았다. 마의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조부 효종랑(孝宗郞)은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서울(경주)을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결연히 개골산으로 떠났고, 그런 태자를 따르는 신라의 충신과 의사가 많았던 것이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러 가는 경순왕의 일행은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나 이어졌다고 하는데 마의태자 일행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경순왕 일행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지만 마의태자 일행을 보는 군중의 눈에서는 망국의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의태자 일행은 강원도 인제 설악산 기슭에 도착한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깊은 산골인 ‘하늘 아래 첫 동네’를 택했을까. 바로 그곳에 한계산성(寒溪山城)이라는 이름난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은 “한계산성은 인제현 동쪽 50리 거리에 있다. 산성은 둘레가 6278척, 높이가 4척의 석성(石城)이다. 지금은 퇴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한계산성의 정확한 위치는 인제군 북면 한계 3리 1번지다. 인제읍에서 원통 면사무소를 지나 오른쪽 44번 국도로 꺾으면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는 길인데, 가다 보면 향토공원이 나오고 옥녀탕이 보인다. 거기서 하차하여 가파른 산길을 기어가다시피해 30분 정도 올라가면 평탄한 능선에 오르게 되고 이윽고 아름다운 성벽이 나타난다. 성안에서는 냇물이 흘러 소리가 요란하다. 냇물을 건너가면 성의 남문이 나온다. 이 남문 자리가 해발 1000m라 한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서 성벽에 올라섰으나 병사 500명이 들어설 수 있다는 넓이 600여 평의 대궐 터와 절터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외성이고 훨씬 더 올라가면 내성이 또 있는데, 그곳에 대궐 터가 있다는 것이다. 내성은 너무 험해서 산악 전문가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내성에 우리가 찾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적과 싸우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 필승을 다짐했다. 한계산성의 천제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삼신단(三神壇)’이다. 또 거기에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 그리고 김세진(金世震)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과 경오(庚午), 신미(辛未)라는 간지(干支)로 판독되었다고 한다.물론 세 사람이 어느 시기의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간지의 정확한 연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의선운장이란 의병장을 말하는 것이니, 김성진과 김세진은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장군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신라의 왕족 경주김씨 아니었을까.
간지의 연대도 마의태자 때라면 경오, 신미년은 각각 고려 광종 20년(970), 21년(971)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망한 해부터 헤아리면 36년 내지 37년 뒤가 된다. 만일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이 산성은 신라 멸망 이후 고려 제4대 광종 때까지 적어도 37년간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유민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성에 올라서서 동쪽을 보면 한계령 고갯길이 눈 아래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동해안 쪽에서 한계령을 너머 침입해오는 고려군을 감시하고 또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개성에서 인제 땅은 너무 멀다. 이곳을 공격하자면 육로보다 동해안에서 진부령을 넘는 것이 훨씬 쉽다. 지금 동해안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이 있는데 진부령의 본시 이름은 김부령(金富嶺)이었다는 말이 있다.
한계산성에도 전설이 많다. 이 험한 산에 성을 쌓을 때 동네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돌을 손에서 손으로 넘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계산성 아래 동네 총각에게는 시집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왜 그런 말이 돌았을까. 마의태자와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일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원도 인제에서는 마의태자가 설악산에 들어와서 광복운동을 했다고 믿고 있다. 인제 땅은 본래 신라 영토가 아니라 고구려 영토였다. 그래서 고구려 말로 구토(舊土)회복이라는 단어인 다물(多勿)이 이곳에 한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일설에 한계산성은 맥국(貊國)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산성이었다고도 하니 일찍부터 인제 땅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계산성 같은 난공불락의 산성이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면 마의태자가 살다가 죽었다는 금강산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 금강산 구경이 한창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은 동해안 쪽으로 가서 외금강을 보고, 금강 중의 금강이라 하는 내금강(內金剛)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금강산은 철원 쪽에서 들어가서 단발령을 넘어 먼저 내금강을 본 다음에 외금강, 해금강 순으로 보는 것이 구경의 원칙이다.
개골산이 금강산인가
그러니 지금 가는 금강산 유람으로는 내금강을 못 볼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유적도 볼 수 없다. 비로봉 밑에 있다는 전설의 태자릉(太子陵)도 못 볼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태자릉을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삼국사기’를 들여다보자.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마의태자의 최후를 적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을 믿고, 마의태자가 비관한 끝에 금강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실제로 금강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은 “금강산은 그 봉우리가 모두 1만2000봉이나 되는데 비로봉이 제일 높다고 하며 골짜기마다 108개나 되는 불사가 산재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강산에는 민가가 한 채도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경작지가 전혀 없어 외부의 식량지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은 바위 봉우리가 벽처럼 서 있어 이르는 곳마다 천길 만길이라 몸을 의지할 만한 암자도 움집도 없었으며 채소나 과일을 심어서 먹을 만한 흙 한 줌도 없었으니 여기에 산다는 것은, 구멍에 숨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사는 새나 짐승과 같이 거처하지 않는 한 하루도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금강산은 최남선의 말처럼 커다란 바윗 덩어리요, 온갖 기묘한 변화를 나타낸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요, 금강 없는 금강산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산속으로 태자 일행이 들어갔다는 것은 죽으러 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강산에 가보면 마의태자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먼저 금강산의 이름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중간(重刊)된 것이다. 그래서 개골산에 괄호를 하고 금강산이라 주석을 단 부분은 고려 때 나온 ‘삼국사기’ 원본에 있었다 하더라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개골산은 물론 금강산이란 이름도 없었다.
즉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개골산을 삼국시대에는 상악(霜岳) 또는 설악(雪岳)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과 역시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의 설악에서 소사(小祀), 즉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개골산이나 금강산이란 지명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상악이라고만 나오는 것이다.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삼국시대에는 개골산이니 금강산이니 하는 지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개골산과 금강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부터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주로 금강산으로 나오지 개골산은 드물다. 또 금강산은 중앙에서 모반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의 유배지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유배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후대에 조작된 금강산 태자 유적지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금강산은 유학자들의 수도장으로 변했고, 금강산이라는 불교 냄새 나는 이름 대신에 개골산이니 풍악산이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에 나온 ‘동국여지승람’ 회양도호부조에 보면, 금강산에는 이름이 다섯가지나 있다고 기술한다.
“산 이름이 다섯 있는데 첫째 금강, 둘째 개골, 셋째 열반, 넷째 풍악, 다섯째 지달이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풍악이지만 중 무리는 금강산이라 한다. 이 금강이란 이름은 화엄경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시대에는 상악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이름을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불렀지만 일반인은 풍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개골산도 풍악이란 이름과 함께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또 금강산과 설악산이 연접돼 서로 암수 하는 사이이고 보니 혼동될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삼국시대의 상악(금강산)과 설악(설악)은 구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의문점은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분명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학자가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일찍이 금강산을 등산, 태자 유적지를 보고 ‘금강예찬(金剛禮讚)’(1927년)이란 기행문에서 이것은 가짜라고 말했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란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진실과는 딴것입니다. 첫째 세상만사를 다 끊고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에게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태자의 계마석(繫馬石)이니 마구간(馬廐間) 터니 하는 것은 다 옛날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태자성(太子城)이란 것도 제단으로 들어가는 성역 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의 태자 유적들이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최남선 특유의 지명학(地名學)을 터득해야 한다. 본시 금강산은 예국의 영산(靈山)이었다. 신라가 이를 계승하여 해마다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골짜기마다 불사가 들어서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 불단으로 변하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불교 이름이 지어지고 말았다.
태자 유적지도 그런 것 중 하나인데 태자성은 둘이나 있고 망군대와 장군봉이 모두 마의태자가 조국 광복을 위해 군사를 지휘하던 산으로 이름지어졌다. 심지어 단발령까지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멀리 금강산 절경을 보고 중이 되려고 머리를 깎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금강산의 전설은 믿기 어려운 것이 많다.
여하간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도 설악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같이 마의 초식하다가 춥고 배고파서 죽은 무기력한 마의태자상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 광복을 위해 당당하게 싸우다 죽은 씩씩한 태자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마의태자가 ‘삼국사기’ 같은 정사에 나오는 나약한 태자가 아니라 정의에 불타는 전설 속의 대장부였다면 금강산으로 가지 않고 설악산으로 갔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떠난 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면 하나는 설악산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금강산 기슭 어딘가 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금강산에 그를 추모하고 아끼는 유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두 가지 가설을 이상하게 보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마의태자 문제에 관한 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마의태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金)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엄연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0년 전에 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알려진 발해진을 탐방한 일이 있다. 발해진은 발해의 상경이요, 요의 상경이기도 한 역사의 고장일 뿐만 아니라 금 태조가 공격하여 되찾은 우리의 서울이었다. 가던 날 발해진 광화문 위에는 구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그곳 조선족 한 사람이 한 말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 땅은 중국 땅이 아닙니다. 우리 땅입니다. 중국 사람 말 듣지 마시구레.”
또 다른 마의태자 행방과 관련해 먼저 ‘고려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 11대 문종 28년(1074) 9월, 그러니까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간 해(935년)로부터 139년 후의 일인데, 갑자기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그의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오고내와 핵리발 부자가 남도 아닌 고려인이요 옛날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볼 때 신라왕족 김씨 후손이 바로 코앞에 나라를 세워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김씨는 누구란 말인가. 고려왕조는 그가 경순왕의 투항을 반대하고 개골산에 들어갔다는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보고가 들어왔다. 다행히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 것도 같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동여진을 장악한 이른바 태사(총독)는 금준(今俊)이란 사람의 후손인데 평주(平州) 사람이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행(金幸)이라고도 한다. 금씨란 우리나라에 드문 성이니 김씨가 맞을 것이고,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영흥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월경하여 아지고촌(阿之古村)이란 마을에서 여진 여자를 취하여 극수(克守)를 낳았는데 이가 곧 금나라 시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주는 과연 어딘가. 황해도 평산(平山)이 평주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함경도 영흥(永興)이 평주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왕건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여진 땅과 너무 멀었다. 함경도 영흥은 원산 근처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여진과 접경지대였다. 여기 같으면 왕건의 눈을 피해 중으로 숨어 살거나 여진으로 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영흥을 일명 평주라 한 것은 바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평주진을 쌓아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흥에는 정변진, 장평진 같은 군사기지가 생겨난 것을 보면, 고려는 이곳을 북방수비의 요지로 삼았던 것 같다.
함경도 영흥은 또 금강산과 가깝고 설악산과도 가까워서 만일 고려군과 싸워 져서 후퇴한다면 동해안을 거쳐서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같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의치 않았는지 마의태자는 다시 여진 땅으로 갔다. 아무리 왕건이 마의태자를 잡으려 해도 조국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영흥 땅이야말로 뒷날 태조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왕조를 전복한 혁명의 고장이란 사실이다. 대륙을 통일하는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인 것이다.
여진으로 떠난 마의태자 후손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금나라 시조가 된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란 인물이 과연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족보에도 나오지 않으며 나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족보 문제는 나중에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여진으로 간 김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진은 당시 원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행과 그 후손들은 국가를 건설할 지혜와 문화가 없는 여진족을 지도하여 나라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신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분거하였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그 땅에는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그러나 그 예물은 사금이나 짐승 가죽이나 말이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은으로 후히 주어 보냈다.
‘고려사’는 이렇게 여진이 후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그 위치는 흑룡강 유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당시 여진은 생(生)여진과 숙(熟)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김행이 간 여진은 생여진이었다. 생여진은 끝까지 요의 지배를 받지 않다가 결국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 이는 신라에서 망명해간 왕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금나라 세워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하셨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또한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유한을 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