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통 두꺼운 벽으로 닫혀 있는 지중해 일대의 집들. 이와는 반대로 어디로나 열려 있고 비어 있는 몬순지대의 ‘틈투성이’ 집들. 돌기둥 속을 파내 삶의 터전으로 삼은 카파도키아인들…. 지구촌 식구들이 사는 각양각색의 집 이야기.》
이렇게 아름다운 에게바다에는 777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다. 이 섬들은 크기는 각기 달라도 하나같이 경사가 가파르다. 그 언덕 위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모두가 그림같이 아름답다. 어느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도 완벽한 풍경화, 정물화가 된다.
집의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사각 평면에 돔형 천장, 그리고 햇빛을 반사시키기 위한 하얀 페인트칠, 간혹 멋을 내느라 노랑, 빨강, 하늘색 등으로 창이나 문을 칠하거나 항아리에 꽃을 담아두는 것, 그게 전부다. 그리고 집 앞에는 반드시 테라스가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태양을 즐기며 여유롭게 커피나 아이스 티를 마시기 위해서다.
한때 이 땅에서도 유행했던 칸소네 ‘카사 비앙카(하얀집)’를 연상시키는 에게해의 집들은 이렇듯 언제 보아도 정겹고 평화롭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흔히 ‘에게해의 진주’라 부르는 산토리니섬과 나그네의 향수를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5개의 커다란 풍차가 언덕을 점령하고 있는 미코노스섬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에게 제일의 관광지다. 섬에는 ‘호텔’ ‘인’ ‘펜션’ ‘스튜디오’ ‘아파트’ 등의 이름을 가진, 크기와 설비와 분위기가 다른 다양한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그런데 길은 좁다. 차가 빵빵거리면서 달릴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자전거만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다. 옛날 해적들이 날뛰던 시절, 그들이 쉽게 찾아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골목을 좁게 했다는데, 나그네의 눈에는 그게 그렇게 아기자기해 보일 수가 없다.
하얀집은 모두 벽이 두껍다. 그리고 창이 작다. 태양이 내리비치는 밖은 가마솥같이 뜨거워도 집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금방 시원해진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도 원체 건조한 곳이라 햇볕을 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늘 닫혀 있는 집
그러나 벽이 두툼하고 창이 작은 집이 에게바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건조한 바다’ 지중해 일대가 다 그런 집들로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카사 비앙카의 고향 이탈리아 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남부, 스페인, 포르투갈 또한 그렇다. 이들 지역에서도 골목은 어김없이 좁다. 사람이 다녀야 하는 골목에 그늘을 드리우기 위해서다. 에게 지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붕 위에 얇은 기와를 얹는다는 정도다. 비가 적게 내리기에 기와가 두꺼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붕의 물매도 완만하고 그 선도 직선에 가깝다.
그리스 북쪽의 발칸반도나 이탈리아 북부지방으로 올라가면 기와는 조금 두꺼워지고 색깔은 흰색 계열에서 황적색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알프스를 넘어서면 회색 또는 검은색이 된다. 그렇지만 건축 재료는 여전히 벽돌 아니면 돌이다. 콘크리트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비율을 차지한다. 그 두꺼운 건물외벽이 담장 노릇을 하며 당당히 길과 맞서고 있다. ‘파티오(patio)’라 부르는 사각 마당은 그 속에 있으면서 집과 집을 잇는 통로 구실을 한다. 그렇긴 해도 닫혀 있다는 인상을 지우진 못한다. 그렇다면 왜 유럽의 집은 닫혀 있는 것일까.
비가 적게 내리는 곳에선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집은 대개 돌이나 벽돌로 짓게 된다. 그것들을 한 장 두 장 차곡차곡 쌓아서 짓는 그곳의 집은 벽이 두터울 수밖에. 더욱 중요한 것은, 건조한 지역은 땅의 생산성이 낮기에 자체 생산물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지에서 생필품을 사오거나 뺏어와야 한다. 상업과 약탈, 그리고 전쟁이 주로 건조지대에 사는 민족들에 의해 자행됐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늘 셈을 해야 하고,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그들의 집은 마음놓고 쉬기 위해서라도 외부의 위해를 막아내는 구조를 취해야 했다. 이런 가옥 형태의 대표적인 예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푸에블로(Pueblo)’라 불리는 아도베(adobe)집을 들 수 있다. 이곳 역시 건조지대다.
‘푸에블로’란 스페인어로 ‘마을’이란 뜻. 수렵 채취 상태에서 벗어나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하는 인디언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는데, 그것이 후일 그들의 전형적인 주거형태까지 가리키게 됐던 것이다.
푸에블로는 아파트의 원형?
푸에블로의 고전적 형태는 미국 콜로라도주 남쪽의 메사 베르데(Mesa Verde)-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로 유적에서 볼 수 있고, 그보다 남쪽인 뉴멕시코주의 타오스(Taos)-이곳도 세계문화유산이다-엔 지금도 그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다층구조의 푸에블로가 2동이나 남아 있다.
황갈색 두꺼운 벽체에다 좁은 출입문, 극히 절제된 창, 사다리를 타고 지붕을 올라 위층으로 오를 수 있는 특이한 구조, 연기마저 지붕 위의 작은 출입구를 통해 빠져나가게 한 철저한 차단구조는 이 집이 외부 침입을 막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이 독립가옥보다 아파트 구조를 연상시키는 공동가옥을 짓게 된 가장 큰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듯 지붕은 편평하여 성냥갑 모양이다. 이런 모양새의 푸에블로들이 타오스 시내는 물론 그 남쪽의 현대도시 산타페(Santa Fe)까지 온통 뒤덮고 있다. 일반주택뿐 아니라 교회, 화랑, 최고급 아파트도 푸에블로 양식이다.
푸에블로에서 놀라운 것은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르내릴 때만 사다리를 사용하고는 재빨리 치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외부 침입에 대비했던 것이다. 공동주택을 일컫는 아파트(apartment)란 말이 푸에블로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왜 인간 관계를 단절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공동주택은 아니지만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원주민들도 위층에 출입할 때만 사다리를 사용하고는 곧장 치워버린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인공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펼쳐지는 아나톨리아 고원을 달리다가 문득 지평선의 고요를 깨뜨리며 다가오는 카파도키아. 먼 옛날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된 부드러운 화산재가 세월이 흐르는 사이 뜨거운 낮과 차가운 밤의 일교차, 혹서와 혹한, 비바람의 풍화작용으로 얼었다가 풀리며 씻기고 다듬어져 아주 기묘한 풍경을 연출하는데, 그 기묘한 돌기둥 속을 파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금도 ‘변화중’인 이곳이 2000년 가까이 삶의 터전으로 쓰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사는 기독교가 아직 공인을 받지 못했던 시절, 박해를 피하고자 했던 기독교인들이 쉽게 지하공간을 만들 수 있는 이곳을 신앙의 도피처로 삼으면서 시작됐다. 카파도키아의 중심도시 괴레메(G쉜eme)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는 7층 구조의 지하도시 데린쿠유가 그 좋은 물증으로 남아 있다.
방어와 프라이버시 보호 완벽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회는 웬만큼 지상으로 올라왔으나 여전히 동굴 속을 벗어나진 못했다. 굵은 돌기둥 속을 파내 내부공간을 만든 다음,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해서는 예배 공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기묘한 경관을 가진 괴레메는 시대를 달리하여 지어진 이런 건축물 덕분에 세계자연유산이면서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괴레메에서 과히 멀지 않은 우치사르란 곳은 마을 전체가 커다란 원뿔형 돌기둥으로 되어 있고 집은 그 속에 자리잡고 있다. 문이 돌기둥 중간쯤 되는 높이에 있어 그곳으로 오르려면 사다리가 필요할 텐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푸에블로와 마찬가지로 사다리는 필요할 때만 내렸다가 곧장 걷어들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집주인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 이곳 역시 외부의 위험에 대비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별다른 공간구획이 없는, 그래서 커다란 홀처럼 생긴 공간과 만나게 된다. 바닥은 원형이고, 천장은 높은데다 돔 구조라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문과 창이 작아 어둡지만 빛이 그런 작은 창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다. 사뭇 성스러운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물론 그들도 등불을 켠다. 참으로 매혹적인 것이 바로 이 등불이다. 한밤, 그 등불빛이 바깥으로 새나오는 환상적인 광경을 본다면 누구나 무릎을 칠 것이다. 그들은 카펫이 깔린 이런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잘 뿐만 아니라 빵을 굽고 카펫도 짠다. 그들에게 방은 곧 집인 것이다. 그만큼 방은 다용도로 쓰인다.
카파도키아인들처럼 부드러운 흙을 파내 그 속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사는 사람들은 튀니지의 산악지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지역, 중국 서북부의 건조한 황토지대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에선 깎아지른 듯한 황토 벼랑의 단면에 새긴 이런 가옥을 ‘요동(窯洞)’이라고 부르는데, 정저우(鄭州)에서 뤄양(洛陽)으로 가는 길 주변과 옌안(延安)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지로 삼았던 옌안의 요동이 국민당군에 쫓기던 그들에게 안전한 은신처가 되어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건조지대의 집은 이렇게 닫혀 있다. 그래서 안전과 프라이버시는 완벽하게 보호된다. 그들이 일찍 노크(knock) 문화를 만들어낸 것도 그렇고, 초대하지 않은 사람이 불쑥 찾아오는 것을 가장 무례한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도 다 이런 사정에 연유한다.
그러나 방어기능에 충실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효과적으로 지켜준다고만 해서 집으로서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는 없다. 카메라는 사진이 잘 나오면 되고, 자동차는 안전하고 빠르게 달리면 일단 합격이지만 집은 그렇지가 않다. 집은 매우 넓은 활동영역을 가진 인간의 삶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몇몇 특정한 기능을 잘 해낸다고 해서 반드시 집의 ‘성능’이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집은 가족공동체의 삶을 담는 그릇이긴 하지만, 가족공동체는 마을공동체, 나아가 지역공동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서는 자신의 안녕과 이익을 도모할 수 없다.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해온 석조(石造) 문화권 사람들은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모여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마당 노릇을 할 무언가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광장이었다. 광장은 마을 주민 모두가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마을 한가운데에 마련됐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지금도 남아 있는 아고라(Agora) 유적은 광장의 시원(始原)적인 형태다. 부서진 돌기둥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아고라에서 필자는 매일 오후 이곳에 나타나 청년들과 문답식 대화를 주고받던 소크라테스의 진지한 표정과 직접 민주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자신에 찬 얼굴을 그려보곤 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여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토론했고, 연극과 음악의 재능을 선보였으며, 시와 웅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아고라는 시장과 법정 기능까지 하면서 아테네를 민주정치의 요람이 되게 했다.
그리스에 이어 유럽문명의 맹주가 된 로마제국은 아고라를 본떠서 ‘포로(Foro)’라는 광장을 만들었는데, 로마 한가운데에 폐허로 남아 있는 포로 로마노(로마광장)가 그 대표작으로 지금은 늘 여행객으로 붐빈다. 그러나 포로는 아고라와는 사뭇 달랐다. 이곳에는 로마시민뿐만 아니라 속지(屬地)의 시민들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으니, 이와 같은 포로의 개방성과 포용성에 힘입어 로마는 아테네와는 달리 세계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포로에서 공화제라는 민주정을 탄생시켜 민주주의의 발전 도정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 후 유럽의 모든 도시는 포로, 즉 광장을 어김없이 두게 되어 광장은 서구사회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필자는 서유럽의 광장문화를 보면서 왜 우리는 광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해 민주주의에 지각생이 됐고 그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네들의 문물을 따라 배울 수밖에 없게 됐나 하고 몇 번이나 조상들을 못난이라고 나무랐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 모두가 그랬지만.
베이징에 아시아 대륙 최초의 광장인 천안문광장이 등장한 것은 중국땅에 인민을 주인으로 한다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1949년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민들의 주체적 행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후 평양과 서울에도 광장이 생겨났으나, 어쩐 일인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와 독재자에 대한 환호만 있었지 시민문화는 싹트지 않았다. 이제 여의도광장마저 녹색공원으로 바뀌었으니 이제 우리에게는 광장이 없다.
사실 광장은 우리 체질과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힘들게 조성했던 광장을 다시 허물지는 않았을 테니까. 우리는 광장이 없어도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문화를 일궈온 것이다.
늘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알았던 우리에게는 광장이란 이름의 공적 공간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광장문화를 탄생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문화를 체질화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탓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우리식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말이다.
사막지대에는 또 ‘코파(kopa)’라 부르는 특이한 형태의 가옥이 있다. 도토리 모양으로 생긴 코파는 카파도키아 남동쪽의 고도(古都) 하란(Haran)을 중심으로 해서 시리아 북부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다. 기원전 3000년경 건설되어 2400~2250년에 전성기를 맞았던 에블라(Ebla) 유적지를 찾았다가 만난 코파는 그 지붕의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은 여성의 아름다운 젖가슴 형상을 하고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흙집의 쾌적한 실내
지붕은 돔식이고 그 아래는 흙벽돌을 쌓아 만든 사각공간인데, 그것이 방이었다. 외벽은 흙손으로 매만졌는지 매끈하다. 그런데 출입문은 나무다. 돌이나 나무를 구하기 힘들어 흙벽돌로 집을 지을 수 밖에 없었을 텐데, 문을 만들 나무는 어디에서 구했을까.
마을 입구에서 사귄 소년의 안내를 받아 문을 열고 코파 안으로 들어가자 예닐곱 살 돼 보이는 꼬마와 할머니가 놀라긴 했으나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벽에는 사진틀과 옷가지들이 걸려 있고 카펫 바닥 한쪽으로는 이부자리가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시골 흙집을 대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천장이 높아서 좋았다.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쌓아올린 흙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천장 한쪽에는 환기구멍이 나 있고, 내부는 생각보다 쾌적했다. 흙집이 건강에 좋다는 말이 실감났다. 인상이 좋은 할머니에게 사진을 찍겠다며 카메라를 들이대자 고개를 돌렸다. 아랍 사회에서 여성은 외간남자에게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거니와 사진은 더더욱 찍지 못한다.
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땅에는 지금도 구약에 나오는 그대로 양떼를 이끌고 이곳저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다니며 살아가는 베두인족이 있다. 그들의 집은 그러한 이동생활에 알맞게 텐트구조로 돼 있다. 기둥을 몇 개 세우고 거기에 양털로 짠 두툼한 천을 둘러 만들었는데, 바닥에는 냉기를 막기 위해 카펫을 깐다.
이들 역시 남녀 구분이 엄격해서 여성은 외간남자와 얼굴을 맞대지 않으려 한다. 사막길을 다니다가 그들의 텐트에 몇 차례 들렀는데, 남자들은 나그네를 안으로 불러들여 뜨거운 커피를 권하기도 했으나 여성은 어디에 있는지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베두인족이 사는 아라비아반도에 비해 중앙아시아는 덜 건조한 편이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몽골유목민들의 텐트는 베두인족에 비해 크고 튼튼하다. 몽골인들은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다 그곳은 바람이 강하기 때문이다. ‘겔’이라 부르는 몽골인의 집은 뼈대와 끈, 펠트(거적)로 이뤄지는데, 뼈대는 버드나무나 낙엽송을 잘 다듬어서 만든다.
특히 겔 한가운데에 세우는 기둥은 천장을 지탱하기에, 몸을 기대는 것은 물론 만지는 것도 안 된다. 그것에 의지해 있는 천장은 겔의 골격을 유지해줄 뿐 아니라 빛과 공기가 내부로 들어오게 해준다.
집을 지었다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 해체하고는 이동하고 다시 짓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유목민이기에 집을 짓는 순서가 정해져 있고 이에 숙달해 있어 짧은 시간에 그 일을 해낸다.
‘틈’으로 바람이 드나드는 집
먼저 벽체를 세우고, 남향 또는 산의 정상을 향해 출입문을 낸다. 그리고는 천장을 짜고 거기에 서까래를 여러 방면으로 걸친다. 서까래 위에 속지붕을 올리고 그 위를 펠트로 덮은 다음, 다시 겉지붕을 덮는다. 이것들이 날리지 않도록 ‘호실롱’이라는 튼튼한 끈으로 묶는다. 마지막으로 천장에 거적을 덮고는 그것을 세 방향으로 묶으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원형인 겔 입구 쪽에는 물항아리와 연료통, 그리고 마유주(馬乳酒)통이 놓이고 침대는 둥근 벽을 따라 배치되는데, 남녀노소 구분이 엄격하다. 겔 중앙에는 화덕이 놓이는데 환기통 구실을 하는 지주(支柱)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 양이다. 유목의 기초 생산단위인 호트아일의 우두머리도 대개 말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된다. 아예 ‘고향’이란 낱말을 모르는 몽골 유목민들은 돼지와 닭 같은 집짐승을 가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집짐승은 정착생활에는 어울리지만 유목생활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정착생활은 비가 많은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단위면적당 인구부양 능력이 뛰어난 벼농사 지역이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아시아 몬순지대가 바로 그런 곳이다. 이런 곳에선 나무도 잘 자라기 때문에 집은 대개 나무로 짓는다.
여기에서 ‘나무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나무로 기둥을 세운다’는 뜻이다. 북유럽이나 러시아,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도 나무로 집을 짓긴 하나, 그것은 아시아의 방식과는 다르다. 그곳에선 나무를 판자로 만들어 마치 벽돌을 쌓듯 판자를 이어 벽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벼농사지역에선 나무로 기둥을 세울 뿐 판자로 벽을 마감하지는 않는다. 뿌리로 물기와 양분을 빨아들이고 잎으로 탄소동화작용을 하던 상태 그대로 나무를 세워 집을 짓는 것이다. 따라서 기둥의 섬(立)은 곧 집의 섬을 뜻한다. 그렇게 세워진 기둥은 집의 윤곽만 그린다. 집의 구조를 짤 뿐 벽처럼 가득 채우진 않는 것이다. 이렇게 ‘짜는(架構)’ 방식으로 짓기에 이런 집에는 틈이 많다. 그 틈으로 집이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통풍(通風)이다. 그렇다면 비가 많은 지역에선 왜 통풍을 중요시하는 것일까.
인간이 가장 견뎌내기 어려운 것은 더위나 추위보다 후텁지근함 아니던가.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후텁지근함. 불쾌지수는 바로 이것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후텁지근한 날씨의 몬순지대 사람들이 자연과 대결하기보다 거기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습기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해답은 바로 바람이다. 바람이 쉬 들고나는 날렵한 처마선, 얇으면서도 구멍이 숭숭 드는 흙벽, 땅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으면서 앞이 툭 틔어 시원하기 짝이 없는 마루, 바깥의 빛과 소리가 안으로 스며드는 창호, 집은 보호하되 사람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담장, 담장을 넘어 불어온 남풍이 잠깐 쉬었다 가는 마당으로 구성되는 우리의 집이 그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통풍을 맨먼저 고려한 우리의 집은 어디 하나도 채워져 있지 않다. 늘 열려 있고 비어 있는 것이다. 습기가 많고 벼농사가 시작된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 ‘공(空)사상’이 태어난 것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차 있고, 정확한 수치에 근거한 서구식 집을 보던 눈으로 우리의 집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집은 한 마디로 틈투성이다.
그러나 그 틈은, 완벽을 기할 수 없어 불완전한 상태로 내버려뒀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갖겠다는 생각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 틈을 일러 ‘소극적이다’ ‘부정적이다’고 함부로 말할 게 아니다. 틈은 불완전과 결핍의 동의어가 아니라 생성과 창조의 가능성, 그리고 여유와 여백의 동의어이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생명의 장치인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라. 습기가 많은 땅만큼 변화가 많은 땅이 어디에 또 있는가. 변화의 원리를 담은 고전적인 텍스트인 ‘주역(周易)’은 동아시아 농경지대의 산물 아니던가. 이곳에선 사철의 변화를 한곳에서 모두 경험할 뿐 아니라 뭇생명들이 자라는 곳이기에 모든 것이 매일매일 변한다. 이렇게 변화가 극심한 곳에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완충장치를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틈인 것이다.
중국의 경우도 건조한 화북지대보다는 습기가 많은 화중, 화남 지역의 집에 틈이 많으며,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높은 마루로 이루어진 고상식(高床式) 주택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다가 인도네시아로 건너가면 거대한 선형(船型) 가옥이 나타난다. 인도네시아에서 네 번째로 큰 술라웨시 섬 한가운데 있는 따나 또라자(Tana Toraja)라는 마을이 바로 그 본향이다.
또라자는 오지이긴 하나 선형 가옥과 독특한 장례의식을 갖고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호텔 간판이 쉽게 눈에 띄고 기념품 가게도 흔하다. 외지인들과 많이 접하다 보면 친절과 순박성을 잃게 마련인데 또라자인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푸근한 마음으로 마을을 지나다닐 수 있다.
지붕의 양끝이 뱃머리처럼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어 선형 가옥이라 불리는 또라자 특유의 가옥형태를 현지인들은 ‘똥꼬난(Tongk onan)’이라고 부른다. 2층 구조지만 하늘을 향해 치솟은 위압적인 지붕으로 인해 고층건물처럼 높아 보인다. 그저 크기만 한 게 아니라 디자인과 장식도 특이해 눈길을 끈다.
하늘을 향해 달아나는 가파른 지붕선(지붕은 그들에게 하늘을 상징한다), 처마 아래의 판자벽을 장식한 울긋불긋하면서도 화려한 단청문양(흑, 백, 황, 적이 어우러져 있다), 장식벽면의 앞으로 툭 튀어나온 물소와 수탉의 머리상, 지붕에서 땅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뻗은 정면기둥에 매달린 물소뿔들… 대담하면서도 화려하고 또 신비스럽다.
물소와 수탉이 장식물로 이용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소는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또라자인들에겐 가장 큰 재산으로 부를 상징한다. 물소뿔을 정면 기둥에 길게 매달아 놓는 것도 집안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수탉은 닭싸움을 즐기는 또라자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사자(使者)다. 그래서 그들은 부와 승리를 기원하고자 자신의 집을 물소와 수탉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티티카카의 갈대섬, 갈대집
2층 구조인 똥꼬난의 아래층은 물소 등 가축의 우리로 사용되고, 사람은 위층에 산다. 2층 중앙은 가족의 공동 공간으로 거실과 부엌이 자리하며, 북쪽은 상석으로 부부가 쓰고 남쪽은 자녀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공간이 된다. 가옥의 건축재료로는 대나무 같은 목재가 쓰일 뿐 금속성 재료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못도 사용하지 않는다.
똥꼬난 맞은편에는 크기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은 ‘새끼 똥꼬난’이 있다. 곡식 창고로 사용되는 ‘아랑’이다. 주거공간인 똥꼬난이 남편을 상징한다면 아랑은 아내를 상징한다. 아랑 또한 고상식으로 지어졌다. 곡식을 보관하는 곳이라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그렇게 짓는다.
선형 가옥 똥꼬난 이야기를 하다보니 갈대배가 생각난다. 페루의 쿠스코를 떠나 볼리비아로 넘어가는 길에 티티카카 호수에서 갈대배를 만났는데, 호수 위에 떠있는 작은 섬 우루스(Urus)에는 그 배를 만든 사람들이 사는 갈대집이 있었다.
우루스는 아주 특이한 섬이다. 바닥이 흙이 아니라 갈대로 되어 있다. 갈대는 쉬썩기 때문에 우루스인들은 석 달에 한번씩 새 갈대를 깔아주면서 지반을 늘 같은 높이로 유지한다. 이 얼마나 성가신 일인가. 그런데도 여기에 뿌리를 박고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잉카의 후예인 그들은 순수한 인디오다. 그들이 호수 안의 작은 섬, 그것도 갈대로 만든 섬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정복자 스페인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못살게 했으면 호수 안으로 흘러 들어와 갈대로 섬을 만들 생각을 다 했을까.
안데스 산맥의 준봉을 뒤덮은 눈이 녹으면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생긴, 바다 같은 호수 티티카카. 그 수면 위에는 세찬 파도까지 일었다. 섬이 가까워지자 물결도 잦아지면서 갈대밭이 펼쳐졌다. 갈대는 키가 커서 온통 시야를 가린다. 배는 그 사이로 난 좁은 수로를 따라 달리는 것이다.
섬에 발을 내딛자 촉감이 아주 이상했다. 마치 스프링 위를 밟는 것처럼 푹신푹신했다. 갈대섬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갈대로 되어 있다. 섬도, 집도, 배도, 땔감도 모두 갈대다. 그런 만큼 집의 내부도 단순하다. 잠자는 방만 있을 뿐, 음식을 준비하거나 스웨터를 짜는 것처럼 다른 곳이라면 실내에서 할 일도 이곳에선 모두 시로이에서 이루어진다. 방이라 해도 입을 옷 몇 가지와 이부자리가 놓여 있는 게 고작이다.
지금은 티티카카 호수에 고립된 우루스 인디오들이 살고 있는 갈대집의 역사는 알고 보면 문명의 여명기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구하다. 메소포타미아 시대에도 사람들은 갈대로 배를 만들고 갈대집을 짓고 살았으니까. 그 때의 갈대집은 별다른 형태의 변화를 겪지 않고 지금도 이라크 남부 바스라 일대의 늪지대에 남아 있다.
문명전파설을 믿으며 자신의 학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먼 항해 길을 떠나곤 했던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토르 헤이 에르달은 티티카카 호수에서 갈대배를 만드는 인디오들을 이라크 남부 키그리스 강변의 바스라로 불러다가 ‘티그리스’란 이름의 갈대배를 만들게 한 다음, 그것으로 인도양을 항해했다. 그는 그 길에서 갈대배 모양이 새겨진 5000년 전의 부조를 발견해 갈대와 인류의 질긴 인연을 확인했다.
사합원의 봉건구조
세계의 주거문화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중국의 사합원(四合院)이다. 이는 북중국 살림집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사합원의 가장 큰 특징은 집 한가운데 조용한 내원(內院)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안전과 프라이버시를 유지하고, 대내적으로는 가족 전체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스페인의 사각마당 파티오를 연상시킨다. 그것이 언제 유라시아대륙을 넘어 베이징까지 흘러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문을 닫아버리면 사합원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우주인 셈이다.
초대받지 않은 외지인이 사합원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북경의 고급호텔은 고층이라 그런 전망을 제공해준다.
사합원은 네모 반듯하다. 내원을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에 각기 한 채씩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중심축선을 그은 다음 좌우를 비교하면 완벽한 대칭이 그려진다. 그것을 다시 확대하면 황제가 사는 자금성(紫禁城)에 가깝다.
주인이 사는 북쪽 채는 지붕이 높고 우람하다. 그 앞으로 자리잡은 동서 좌우의채는 자녀들의 공간이고, 대문에 연이어 있는 채는 우리의 행랑채처럼 하인들의 것이다. 이러한 건물배치와 용도는 중국 봉건사회의 가정윤리질서-부권(父權) 중심, 남존여비, 주종관계-를 그대로 나타낸다.
내원에 피는 꽃들
중국인들은 집을 감싸는 문을 사람의 얼굴에 비유하기를 좋아해 그곳을 나름대로 장식하곤 하는데, 보통은 그 좌우에 석사자상을 세운다. 사자는 오랫동안 백수의 왕으로 불려왔고 성격이 용맹하여 사자상으로 하여금 수문장 노릇을 하게 해 주인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세우는 것이 아니라 좌측에는 암사자를, 우측에는 수사자를 세운다.
그것을 통과하면 이번에는 영벽(影壁)이 나타난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영벽 위에는 대개 꽃과 나무가 새겨진다. 어떤 경우에는 복을 상징하는 박쥐와 장수를 나타내는 학이 새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꽃과 나무는 영벽을 지나 만나게 되는 내원에서 볼 수 있다. 내원에 심는 나무는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엔 그늘을 만들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는다.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내원의 꽃은 나름대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해당화와 배나무는 봄이 되면 나무 전체가 붉게 물든 가운데 흰눈이 내린 듯하여 뜰은 춘의(春意)로 가득 찬다. 뿐만 아니라 해당화는 형제간 화목을 상징한다.
석류나무는 비록 그늘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꽃과 열매는 부귀를 상징한다. 더욱이 석류는 다산(多産)을 뜻하며 대추나무와 더불어 자손이 일찍 생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것은 가정의 흥성이라는 길상의 뜻이 담긴 것.
또한 대추나무 꽃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가을에는 가지마다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포도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주며 열매는 맛이 좋다.
작은 정원 하나를 꾸미는 데에도 이처럼 수많은 문화적 상징체계가 동원된다. 그러므로 주거문화는 그 사회 민족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