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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찬미자들에게 엄중경고함 !

영어 찬미자들에게 엄중경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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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 2000년 3월호에 소설가 복거일씨의 영어공용화 주장이 실리자 많은 독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복거일씨의 주장에 일면 수긍할 만한 면도 없지 않으나 “우리말을 버리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것은 지나친 비약 아니냐”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신동아’는 최근 사회적으로 널리 주목받아온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이번 호에는 복거일씨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싣는다. <편집자>》
1.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지금은 영어를 하지 못하면 개인 차원에서나 국가 차원에서도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다.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영어를 못해서 31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야 했던 한 중국인 이민자의 얘기다. 데이빗 톰이 1952년 미국에 건너왔을 때,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영어라고는 “Me no crazy. This nuthou- se(나는 미치지 않았어. 여긴 정신병원이야)”뿐이었다. 1979년에 어떤 사회봉사원이 정신병원에 있던 그를 데리고 중국식당에 갔을 때 데이빗은 중국인 요리사와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이때 비로소 그가 정상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서툰 영어 때문에 정신분열환자로 오진받았던 것이다. 4년간의 법정싸움 끝에 풀려난 그는 20만5000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것은 ‘타임’지가 보도한 대로 비극이었다.

2년 전 문단의 중진인 복거일씨는 우리의 민족어인 한국어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열린 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영어를 우리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해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어서 ‘신동아’ 2000년 3월호에 기고한 ‘소위 민족주의자들이여! 당신네 자식이 선택하게 하라’는 글에서 영어공용화론을 좀더 분명하게 주장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영어공용화론이 대두하면서 그의 주장은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일본에서도 지금 영어공용화에 대한 찬·반 논의가 한창이다. 이번에 제기된 영어공용화론은 메이지유신 때 문부성 장관을 지냈던 모리 아리노리,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오자키 유키오 의원이 영어를 일본 국어로 채용하자고 주장한 이래 세 번째 나온 시도다. 당시 문단의 원로인 시가 나오야는 프랑스어를 일본 국어로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에 나온 영어공용화 논의는 1, 2차 때보다 강도가 약하다는 것이다. 이번 논의는 소위 ‘바이링구알(bilingual) 개조론’으로 영어를 제2 공용어로 하자는 것이며, 일본어를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일본처럼 두 언어를 병용하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복거일씨의 주장이다. 어쨌든 필자가 보기에 일본인과 한국인만큼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국민도 없을 것 같다. 단일 민족, 단일 언어 국가이면서 영어공용화론이 제기된 나라는 한국과 일본말고 현재 지구상에는 없다.

그런데 모국어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야 할 작가가 이런 주장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기야 지구화 시대인 오늘날, 헤르더가 말한 것처럼 “참다운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명제는 시대착오라고 할 수도 있다. 가령 체코 출신인 밀란 쿤데라, 불가리아 태생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보라. 그들은 각각 자기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가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조지프 콘래드, 블라드미르 나브코프도 영어로 작품을 써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쿤데라는 “문학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문학을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복거일씨와 같은 작가가 모국어를 버린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마지막 수업’을 쓴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어의 지배를 찬양하는 제국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배경이 된 시절의 알자스인에게 모국어는 프랑스어가 아니라 알자스어였고, 프랑스어는 그들에게 한갓 외국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어 교육을 엄금하고 있었다. 아멜 선생이 학생들에게 “프랑스 알자스”라고 써보인 것은 일제시대의 우리 나라 교실에서 일본어로 “일본 조선”이라고 썼을 것에 비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멜 선생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지배적 언어였던 프랑스어 대신에 알자스 지역에서만 통하는 방언이었던 알자스어를 배워서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따라서 알자스인으로 추정되는 아멜 선생은 민족의 배신자가 아니라 참다운 제자 사랑을 실천한 교육자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필자의 짐작에 복거일씨의 주장은 아멜 선생처럼 현실론 위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장래를 위해서, 후손을 위해서 영어를 아예 우리 모국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 나오야가 말한 것처럼 모국어와 이별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은 쓰라린 일이지만 ‘큰 마음 먹고’ 후손을 위해 한국어를 버리자는 것이다. 복씨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① 미국은 세계화의 주역이며 영어는 국제어다.

② 우리는 영어 구사력의 부족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를 습득해야 한다.

③ 단 하나의 대책은 모국어인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것이다. 이 길만이 영어를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는 길이다.

④ 영어가 공용화하면 우리 문화를 알리고 발전시키는 데 더욱 유리할 것이다. 우리말이 ‘박물관 언어’가 되더라도 이 ‘죽은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을 터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⑤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과 사람들의 언어구사 능력은 특정 언어에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특정 언어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것은 어떤 명분과 이름으로 치장하더라도 비합리적이다.

⑥ 영어가 우리 모국어가 되면,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그의 견해는 언어도구설, 탈민족·탈국가주의라는 이상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2.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모국어 포기론의 핵심 근거는,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못을 박을 때 쓰는 망치와 같은 도구에 불과한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 가령 큰 못을 박을 때는 큰 망치를 쓰는 것이 효율적인 것처럼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언어의 의미를 거세한 채 통사구조, 음운구조만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던 구조주의적 언어관에 입각한 것이다.

이러한 언어관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복거일씨의 견해는 언어 기능의 일면만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헤르더, 훔볼트, 사피어-워프의 언어상대성 원리를 장황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에 두 차례나 벌였던 논의의 결과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른바 ‘강한 가설’은 전폭적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지만 “언어와 우리의 정신구조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약한 가설’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영국의 언어학자 M.A.K. 핼리데이는 사회와 언어 간의 상관관계를 전제해서, 사회생활이 언어형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형식이 사회의 실제를 창조하거나 구성하며, 경우에 따라 언어가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굴절시키면서 우리의 생활 형식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일종의 ‘음모설’을 제기하면서 그 예로 ‘성장주의’를 들고 있다. 성장주의는, 우리의 언어가 공기·석탄·석유와 같은 물질을 ‘비가산적(uncountable)’인 것으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무의식 속에 이런 자원은 무한한 것으로 각인·패턴화해 있고, 이것이 바로 자원남용, 환경파괴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훔볼트적 명제는 몇몇 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보았으며,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바로 세계를 가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논고 5·6’에서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명제를 정립하고 있다. 푸코는 또 ‘말과 사물’에서 “언어라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매개수단이 아니라 경험을 교환하고 실제를 묘사하며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숨어 있는 주관적 힘으로서 (…) 우리가 한 마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지배해서 무력하게 만든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라캉 역시 “주체는 언어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전유한다. 프로이트적 조망에 의하면 인간은 언어에 포박된, 그리고 언어로 고문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 중독효과를 갖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말인 것이다. 말하는 주체는 언어에 의해서 독을 입는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언어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비계가 된다.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 뮐러 등의 언어지배 이론이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언어와 사고구조 사이의 밀접한 상관성을 전제하는 훔볼트적 명제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여러 학자들의 말을 예로 든 것은, 적어도 모국어라는 것은 간단히 갈아치울 수 있는 ‘도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모국어가 가진 힘이라는 것은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 언어공동체가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주위 환경이라는 세계는 원래 무의식적, 카오스 상태다. 이러한 세계는 언어의 힘에 의해서 어화(語化)해야 비로소 우리가 접근할 수 있다. 어화란 바로 범주화를 의미하며, 이로써 인간 사유가 가능하다. 이런 과정은 모국어마다 다르게 진행된다. 별을 보라. 북두칠성이니 오리온 성좌라는 언어에 의해 범주화됨으로써 우리의 의식구조에 들어오는 것이다.

모국어에는 특정 언어공동체, 즉 그 민족의 정서와 혼이 배어 있고, 독자적인 세계관이 깃들여 있다. 그래서 흔히 모국어는 민족정신이요, 민족혼 또는 국민성의 구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민족어가 그 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체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며 모국어는 모국 혼(魂)”이라는 말을 남겼다. 체코어를 버린 밀란 쿤데라도 자신의 정신 속에 녹아 있는 모국어의 특성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모국어를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일제시대의 어떤 작가처럼 우리말을 버리고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할 수도 있으며, 조국을 떠나 이민을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한국어를 버려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거일씨는 그야말로 ‘합리적으로’ 모국어라는 우상을 버려야 하는 이유로 ▲ 정보전달 수단과 망(network) ▲ 영어가 국제어라는 사실 ▲ 앞으로 대부분의 민족어는 소멸된다는 확신 ▲ 언어학습과 대뇌생리적 기능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필자가 보기에 영어교육 강화의 명분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한국어를 포기하는 명분은 될 수 없다.

복씨는 대부분 민족어는 ‘박물관 언어’가 될 것이므로 우리가 선수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현재 영어의 침투에 거국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국가는 프랑스밖에 없으며 그나마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가 비즈니스 면에서 영어를 용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아전인수격인 과장일 뿐이다.

프랑스는 현재 영어식 프랑스어인 ‘프랑글레’의 사용을 억제하는 데에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는 최근 다시 ‘영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특히 인터넷에서 영어를 추방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프랑스의 경제·재무부는 지난해 7개의 위원회를 구성해 영어로 된 컴퓨터 용어를 프랑스어로 대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예컨대 컴퓨터는 ‘오디나튀르’ 전자메일은 ‘쿠리에 엘렉트로니크’ 등으로 부르고 있다. 또 ‘프랑스어 방어협회’도 조직돼 있다.

앞으로 100년 후에는 영어, 스페인어 및 중국어만 살아 남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문자 그대로 예측에 불과하며, 학자에 따라서 견해가 다르다. 가령 데이빗 그랏돌의 저서 ‘영어의 미래?’에는 2050년경에 세계 언어계층의 최상층부는 대언어인 중국어, 힌디/우르두어, 영어, 스페인어, 아라비아어 등 5∼6개 언어로 구성되고, 그 다음 계층인 광역언어(주요 무역언어)에는 아라비아어, 마레어,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그 다음 계층인 국가언어에는 220개 이상 민족국가의 약 90개 언어가 들어간다. 그리고 나머지 750여개 언어가 최하 계층인 지역언어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은 무역·경제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 언어가 가진 문화적 측면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지식·문화적 영역에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및 일본어가 계속 우위를 지켜 나갈 것이다. 한편 뮌헨대학 교수 게르트 라아이텔은 “영어의 지배력은 당분간 계속되겠지만 지역언어 역시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는 홍콩의 스타 TV가 중국어, 힌디어 등 다른 아시아어로 방송을 하고 있으며, CNN 역시 남미에서 스페인어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예로 들고 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언어전쟁을 볼 때, 민족어는 좀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벨기에의 언어 갈등을 들 수 있다. 북서쪽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인과 남동쪽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론인 사이의 끈질긴 언어갈등은 벨기에에 ‘언어전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나라’라는 별칭을 안겨 주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대회에 참가한 벨기에 대표팀 선수 가운데 네덜란드어권 선수들과 프랑스어권 선수들은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벨기에의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와 동쪽 지역의 7만여명에 달하는 독일어 사용 주민을 위해서 독일어의 세 가지로 돼 있다. 그러나 이렇듯 끝없는 싸움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이제껏 없다.

유고분쟁의 근저에도 언어 갈등이 깔려 있다. 모국어인 코소보·알바니아어를 지키려다가 50여명의 교사들이 코소보사태 와중에 처형된 일도 있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및 리투아니아 등 발틱 3국은 모두 러시아어를 버리고 자기네 모국어를 국가 공용어로 지정했다. 바스크어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분리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바스크인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모두 세계화시대의 시대착오적이고 비합리적인 민족주의자들일 뿐인가?

한편 한국·일본과 더불어 영어를 기꺼이 받아들이던 독일에서도 역시 독일어를 지키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이래로 심지어 독일 외교관들조차 조심스러워 하던 일이다. 그렇게 지나치게 침식당해온 독일어를 보호하기 위해 ‘독일어를 지키는 모임’이 결성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50년이 지난 1997년 11월이었다. 지나친 영어화를 막고 독일어를 지키자는 운동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7월에는 유럽공업장관회의에서 독일어 사용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핀란드에 대해서 독일의 슈뢰더 정권은 이례적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필자가 이런 갖가지 예를 드는 이유는 복거일씨 주장처럼 민족어가 쉽사리 ‘박물관 언어’로 퇴화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더욱이 100년 후에 대한 불확실한 추산이 어찌 우리말을 포기하는 명분이 될 수 있겠는가? 이웃 일본만 해도 그렇다. 일본은 한편에서는 영어 공용화를 논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신자에서 발신자로’라는 슬로건하에 일본어를 확장시킨다는 세계전략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대만, 동남아, 호주 등에서 이 전략은 크게 성공하고 있다.

4. 인터넷은 세계의 지역화에 기여한다

민족어 소멸의 논거로 위성방송이나 인터넷이 주로 영어로만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금과옥조처럼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인터넷이나 위성방송은 오히려 다문화, 다언어주의에 활기를 불어넣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TV 위성방송이 영어를 기본으로 하는 오디오·비주얼 문화를 가져온다는 말은 기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CBS는 브라질 시청자들을 위해 포르투갈어 방송을 예정하고 있다. 홍콩의 스타 TV나 CNN 국제방송 등은 지역 시청자를 위해서 영어 이외의 방송을 시작하고 있다. CNN은 남미 지역을 향해서 24시간 스페인어 뉴스를 내보내고 있고, 힌디어 방송도 계획중이라고 한다.

스타 TV 역시 표준 중국어와 힌디어로 방송하고 있다. 이런 일은 마치 ‘뉴스위크’지 한국어판이 나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영어 이외의 언어들은 그 세력 범위를 확대하게 되고, 주요 방송들은 방송 서비스를 지역화해 나간다.

이러한 ‘지역화(localization)’는 세계 기업에 근무하는 마케팅 담당 매니저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마케팅에서 지역의 문화, 언어, 사회적 가치관 등에 적응하는 것은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한 그랏돌의 말을 인용해보자.

“영어 이외의 언어에 의한 인터넷 소재는 앞으로 10년간 극적으로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영어는 당분간 탁월한 지위를 유지하겠지만, 결국은 수많은 언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영어가 인터넷 전용 언어라는 생각은 오해일 뿐이다. (…) 인터넷에 의한 지역적 커뮤니케이션 역시 크게 증가할 것이 예상된다. 여기에 사회나 가정에서 전자우편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앞으로는 사용 언어의 다양화가 진행될 것이다. 1990년대에는 컴퓨터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경우 영어가 80%를 점했다고 하지만 이 비율은 다음 10년 동안 40%까지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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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호 경북대 교수·독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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