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거주하는 한국 출신 유학생 규모는 초중고생을 포함해 이미 5만 명을 넘었고 미국 전체 유학생 중 국가별로는 항상 2,3위를 차지한다. 이들이 소모하는 외화는 얼마나 될까? 1인당 연간 평균 2만5000달러가 소요된다고 가정할 때 매년 13억 달러, 한화로 1조5000억원의 엄청난 액수를 쏟아붓는다는 계산이다. 미국에서만 그럴진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에 나가 있는 모든 유학생 수를 감안한다면 정말로 큰 액수다.
과연 이 많은 돈이 적절하게 사용되며 수많은 유학생과 영어연수생들의 노력이 바람직한 결과를 얻고 있는지 궁금하다. 귀중한 시간과 국력만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그렇다면 유학비용은 국가부담이 아니라고 정부는 그저 눈감고 있어야만 할까.
올해 초중고생 유학이 전면 개방된다 해서 한국의 학부모들이 술렁이고 있다. 필자 역시 친척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분들로부터 가끔 문의를 받는다. 우리 아이도 조기유학을 보내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입학절차가 어떻고 아이의 장래에 투자가치가 있는 일이냐? 아이가 잘못 되면 어찌하느냐? 우려와 기대가 교차되는 질문을 한다. 이분들에게 필자는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답을 한다. 대학수준 이상의 유학도 자칫 돈과 시간 버리기 십상인데 조기유학의 경우에는 돈과 시간은 고사하고 아예 아이까지 함께 망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외국유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대학과정 이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며 이 과정 역시 일정한 선발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기유학은 투자에 비해 얻는 소득이 너무도 적거나 아예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물론 아동 개인의 상황과 능력이 달라 한마디로 가부를 표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과 사회상황, 유학 대상국의 학교 수준, 유학의 이유와 목적, 귀국 후의 적응문제와 장래진로 문제 등 현실적인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조기유학의 전체적인 효용성에 회의를 갖게 한다. 흔히 보도되는 외국에 나온 한국 아이들의 탈선과 방황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유학생활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간다. 이렇게 세상구경 하며 영어까지 배울 수 있다는 조기유학에 왜 고개를 젓게 되는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떠나는가
첫째, 아이들이 외국으로 떠나는 이유가 사실 학교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한국사회와 경제의 구조적 불평등, 정치의 무능력이 아이들을 외국으로 내몰고 있다. 둘째, 유학대상국의 교육수준이 한국의 그것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저급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을 갈 필요는 없다. 셋째, 국민의 영어사용능력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주장에는 결코 공감할 수 없으며, 1~2년의 단기유학으로 아동의 전반적 의사소통능력이 획기적인 발전을 할 수도 없다. 넷째, 다수의 아이들은 귀국 후 재적응 과정에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는다.
이런 문제점들을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래서 명확한 분석과 판단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외국유학을 결정했으면 한다.
한국의 부모와 아동들이 선택하는 조기유학 대상국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영국, 캐나다 또는 호주를 비롯한 영어 문화권 국가다. 유독 영어문화권 국가로 아이들이 몰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계화와 국제화의 시대, 선진 외국의 문물과 지식을 배워 나라에 공헌하고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살자는 고상한 이유가 아니다. 실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유학 대상국이 결정된다. 풍요한 선진국인 이들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도 배우고, 과외 걱정 없이 편하게 공부해 좀더 쉽게 대학에 입학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취직하기가 복권당첨만큼이나 어렵다는 게 한국의 형편이다. 그러니 모두 일류명문대학만을 향해 뛰어야 한다. 모두 다 일류대학에 합격할 수가 없으니 경쟁은 날로 심해지고 입시 걱정으로 온 가족이 몸살을 앓는다. 아이들 사교육비 충당에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판에 온 나라에 영어회화 바람까지 불어닥쳐 원어민 과외교사가 인기를 모은다. 영어회화 능력이 대학입학과 졸업 그리고 취직의 관건이다. 토플, 토익에다 텝스(TEPS)라는 영어능력시험들이 줄줄이 난리를 쳐대고 기업체와 국가기관의 승진과 봉급인상까지 영어에 좌우된다. 교육부는 영어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한다고 영어돌풍을 부추기고, 일부에서는 이참에 영어를 공영어로 만들자고 목청을 높인다.
영어의 나라 한국, 먹고 사는 일이 영어에 달렸으니 달리 방도가 없다. 영어를 잘 해야 명문대학에 갈 수 있고, 일류직장에 취직도 되며, 좋은 신랑 예쁜 신부 만나 깨 쏟아지게 백년해로할 수 있다니 영어를 안 배우는 사람이 이상할 지경이다.
세상에 쓸모 없는 문법과 독해만 가르쳐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해도 미국인과 말 한마디 못 나누게 만드는 한심한 한국의 영어교육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이구동성이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본고장에 직접 가서 영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배우는 방법이 제일이라며 전국의 대학은 영어연수단을 조직하고 신문방송은 연일 영어, 미국말, 잉글리시 타령이다. 어디 그뿐이랴. 선진국에서는 공부도 재미있게 가르치고, 과외도 필요 없고, 대학 가기도 별로 어렵지 않다니 내친 김에 그 곳에서 아예 대학까지 마칠 장기계획을 세운다. 일석십조의 묘안, 조기유학은 날로 인기를 모아 부유층은 느긋한 기대감으로, 서민층은 애타는 희망으로 아이들을 외국으로 떠나 보낸다.
그러나 여기서 꼭 짚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선진 외국학교는 아이들을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며 “미국 영국 캐나다의 학교가 우리나라 학교보다 잘 가르치고, 영어 잘 하는 그곳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보다 정말로 공부를 더 잘 할까?” 하는 의문이다.
선진국은 교육도 선진?
영어문화권 국가의 교육재정은 한국보다 월등히 많다. 따라서 물리적인 교육환경은 분명 한국보다는 풍족하다. 돈이 많으니 기자재도 풍부하고 모든 면에서 여유롭다.
그러나 “어느 나라 아이들이 정말 공부를 더 잘하고 더 우수한가”에 대한 연구조사결과는 일반의 통념을 뒤집는다. 풍요한 영어문화권 아이들은 놀랍게도 밑바닥을 면치 못한다. 교육효율의 대표적 평가척도인 국가별 학업성취 기준에서 볼 때 한국의 교육은 이들 구미의 국가를 완전히 압도한다. 보기 좋고 살기 좋다고 학교까지 좋다는 법은 없다.
적어도 초중고교육에서 한국 교육이 아직까지는 세계 정상급이다. 최근 미 교육부가 발표한 제3차 국제수학·과학 경시대회 (TIMS Study)의 결과와 유네스코의 조사결과에서 보듯 한국은 세계 최고권의 성적을 올리고 있고 미국·영국의 교육계는 우리의 학교를 경이의 눈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학과과정의 양과 질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의 조기유학 개방정책은 공부 잘 하는 나라의 아이들을 공부 못 하는 나라로 보내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집 떠난 지 얼마 만에 영어로 조잘대는 아이가 신통방통해 보이리라. 그러나 실제로 아이는 저질교육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대가 있어야 집을 짓듯 모든 배움은 기초가 있어야 가능하다.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초중학교와 고등학교 초반기까지의 교육은 기초학습능력의 체계적인 습득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장래 사회생활에서 또는 대학에서 요구하는 응용력의 기반을 만들어 주는 일이 초중고 교육의 기능이다. 그러나 영어문화권의 학교는 일반적으로 한국과는 전혀 다른 아동 중심의 진보주의 교육을 신봉하여 기초지식의 습득을 게을리한다. 응용력과 창의력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세계 최하위를 달리는 미국 아이들의 학업성적은 서구식 교육의 문제점을 확연히 보여준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내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년에도 미국인 신분으로 노벨상을 받은 이들 대부분이 귀화한 외국 출신 미국시민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기유학생들이 선호하는 미국 공립학교의 실상을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에게 물어보라. 한국 교육은 이렇게 고치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미국 교수들과 현장의 언어를 가르친다는 원어민 영어교사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미국 아이들의 무식함과 버릇없음에 골머리를 흔들리라.
아이들 교육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세계 모든 나라는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학습에 쏟도록 할까 궁리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교육정책은 될 수 있으면 적게 공부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풀고 열고 내돌려 놀리자는 교육정책은 제 풀에 망가지자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조기유학을 핑계로 우리 아이들이 외국의 쉬운 학교로 도피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부모들은 왜 어린 아이들을 외국의 저질학교로 내몰아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
무엇을 먼저 배워야 하는가
체류국 학교의 저질교육만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모국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습하는 내용을 배우지 못한다는 점도 역시 고려해야 한다. 떠나 있는 동안 필연적으로 생기는 학습의 공백으로 인해 아이는 귀국 후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외국에서 적게 배우는 동안 본국의 아이들은 많이 배우고, 그러는 동안 학업성취의 격차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학습에 필요한 기초를 쌓지 못한 아이는 귀국 후 당연히 뒤처지게 되고 당황한 부모는 대책마련에 고심한다. 한국의 외국인 학교는 미국영주권이 없으니 입학자격이 없고, 집에 내버려 둘 수는 더욱 없다. 결국 또래를 따라잡기 위한 집중과외가 다시 시작되고, 이도 여의치 않을 때는 아예 외국에 아이를 주저앉힌다. 돈 쓰고 공들였더니 사교육비는 오히려 더 들고, 심한 경우 아이를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국제방랑자로 만든다. 한국 아이들은 외국 가면 잘 하지만, 외국 살던 아이들은 한국에 오면 견디지 못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왜 무시하는가.
그래도 아이들은 외국으로 떠난다.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영어라도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아동들의 외국어 습득속도는 놀랍게 빨라서 성인들에 비해 단기간에 많이 배울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남의 말인 영어를 1~2년 내에 마스터할 수는 없다. 그 정도 시간으로는 수박 겉 핥듯 겉모양만 대충 보는 학습에 지나지 않는다. 습득속도가 빠른 만큼 상실속도 역시 빠르다. 귀국한 후 사용하지 않으면 금세 까맣게 잊고 마는 것이 외국어다.
외국어를 배우는 만큼 모국어의 습득기회가 줄어든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영어 배우려다 우리말 못 배우는 희한한 경우인데 이 아이들이 모국에 돌아와서 어찌될까? 영어도 완벽하게 못 하고 모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국적 불명의 아이가 생겨날 수 있으며 모국의 풍속과 관습을 배우지 못해 사회생활에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 세상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시 돌아와 살 곳은 결국 한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살 아이들은 한국의 말과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뿌리를 잊은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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