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한다. 그러나 영어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곧 실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두서없는 떠벌림은 소음에 지나지 않으며 얕은 식견은 곧 드러난다. 진실로 실력 있는 사람은 풍부한 전문 지식에 바탕을 둔 출중한 판단력과 사려 깊은 식견을 지닌다. 여기에 덧붙여 말까지 잘할 때 금상첨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KAIST 출신의 26세 한국인 청년이 프린스턴 대학 수학과 조교수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영어소통능력은 미국에서 낳고 자란 성인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모자랐으리라. 그래도 전공분야에 관해서는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이론을 지녔다고 선발위원들이 판정했기에 이 청년을 임용했을 게다. 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수학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준비된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폭넓은 독서와 학습을 통해 마련된 축적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확고한 논지와 이론을 정립해야만 한다. 사고력, 창의력, 번득이는 기지 역시 기초가 있어야만 개발이 가능하다.
결국 축적된 지식이 있어야 말도 잘할 수 있는 법이다. 사람은 아는 만큼만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모르는 사항을 남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이 쓰는 모든 지식의 개념은 어휘(단어)로써 표시되고 소통된다. 따라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아는 단어가 많고 사용하는 단어의 수도 많다. 말을 잘하기 때문에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있기에 말을 잘하게 된다는 이치다. 지식의 기반에서 출발하는 어휘력이 표현능력을 결정한다. 영어가 곧 실력이라는 허황된 논리는 이제 그만 접어두자. 한국말을 잘 하는 이가 영어도 잘하며,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한다.
미국에는 금발머리 아가씨들의 무식함을 놀리는 노랑머리 농담(blonde joke)이 많다. 얼굴 예쁘고 인기 좋다고 마냥 조잘대는 푼수덩어리 돌머리 아가씨들을 비웃는 농담이다. 예쁘고 말을 잘해도 무식할 수 있다. 말 속에 알맹이가 있어야 인정을 받으며 그 알맹이는 다름아닌 지식이다. 지식이 있어야 실력이 있는 법이다.
일본 국민이 영어를 잘해서 전자기기와 자동차의 세계시장을 쥐고 흔들지 않는다. 일본은 품질과 신용으로 시장을 제압했다. 일본이 영어를 잘했더라면 미국의 정보와 금융 그리고 서비스 사업까지 제압할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다르다. 미국은 막대한 부존자원과 기술력의 바탕 위에서 세계 최대의 공업생산력을 오래 전부터 이미 확보해 놓고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미국은 그 바탕 위에서 정보와 금융까지 휘어잡고 있다.
국민 모두가 영어를 잘 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다 잘할 필요는 없다. 좋은 물건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품질이 좋은 물건은 잘 팔릴 수밖에 없다.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최신정보의 신속한 전달이 필요하다. 첨단정보가 학계와 산업계로 빨리 전달돼야 이용도 되고 활용도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석이라 했다. 그런데 첨단기술 정보는 꼭 영어로만 전달되고 습득해야 할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최신정보를 정확히 분석해서 신속하게 전해줄 전문번역가들을 양성해 이들을 활용하는 방법이 훨씬 지혜롭다. 모든 국민이 이미 알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우리말을 제쳐두고 왜 영어로 지식을 새로 배우자고 동분서주하는가. 지름길 버리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어리석음이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고 빠르게 최신정보를 번역하고, 어떻게 정리·선별하여 소비자에게 신속히 전달하느냐는 기술적인 문제다. 언어의 차이로 정보전달이 안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일본 문부성 번역국은 구미의 최신 정보와 전문기술서적을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구하고 번역해서 각계각처에 전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연구논문이 불과 1주일 만에 번역·출판되고 인터넷에 뜨는 형편이며 학계와 산업계는 이를 이용해서 기술을 발전시켰다. 세계를 주름잡는 일본의 전자기기와 자동차는 이렇게 탄생됐다.
미국에서 학업에 정진하는 수만 명의 한국 유학생들, 매년 수천 명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 기회를 기다리는 박사학위 소지자가 이미 3만명을 넘었다. 발에 채는 외국박사들 세계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인구밀도에 비례해 가장 많은 곳이 서울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많이 오고 많이 가는데 이들 중 과연 얼마나 직장을 잡는가. 겨우 한 줌의, 그것도 미리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미국의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하더라도 학연, 인연 등의 확실한 연줄이 있거나, 혹은 재력이 뒷받침해주는 이들에게만 기회가 있다. 미리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낙점받지 못하는 많은 이들, 특히 이공계 출신 유학생들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택한다. 선진기술과 지식으로 훈련된 인재를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의 허술한 인력관리정책은 이들을 미국에 주저앉게 만들고 미국의 기초학문은 다시 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땅 팔고 소 팔아 미국 유학 보냈다가 미국만 좋은 일 시키는 꼴이다.
기술개발이 안 되고 산업발전이 늦다고 모두가 한숨이다. 그러나 한국은 있는 두뇌도 활용하지 못하며 산업개발의 근본인 기초과학은 뒷전으로 밀려나 폐사 직전이다. 미국은 인재를 수입한다. 끌어안고 대우해주니 이민 오고 유학 와서 미국에 귀화해 미국인으로 연구한다. 교육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산업기반이 유지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있는 사람들도 쫓아내고 있다. 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건방지고 동화하지 못한다고 경원당하는 실정이니 세계적 과학자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초중고에서 아무리 잘해도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받침을 못 하니 생기는 결과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영어교육
기능성 중심의 생활영어는 보통 설정된 가상의 상황에 맞추어 공식을 외우듯 연습하는데, 실제상황에서는 평소에 연습한 회화예문대로 미국 사람들이 묻지도 않을뿐더러 대답 역시 외우고 준비한 대로 할 수가 없다. 한국 사람들의 영어는 “3분 영어”라는 말이 있다. 짜깁기식 3분 영어 강의를 틀에 맞추어 연습하다 보니 외국인과 만나 3분만 대화를 하고 나면 밑천이 다 떨어져 갑자기 벙어리가 돼버린다는 이야기다.
결국 응용력이 필요한데 이는 기본 문법과 형식을 깨우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영어회화도 기본은 문법과 형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영어는 미국에 살다 보면 저절로 배울 수 있으며 전문지식 습득에 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고등학교 수준의 학과과정도 생활영어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영어교육의 최종 목적이 선진기술과 지식의 습득을 통한 국가산업의 발전이라면 독해와 작문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미국 아이들과 어울려 밥 잘 먹고 술 잘 먹기 위한 유학이 아니라면 책을 읽고 보고서도 써내야 한다. 독해력과 작문능력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인터넷도 생활영어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사업에서의 영업행위 역시 문서와 문자의 사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끼리의 직접접촉은 통역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국 교육이 지난 30년간 겪은 ‘whole language’ 소동은 영어교육에 있어서 다시없는 좋은 교훈이다. 문법과 발성규칙에 중점을 두는 어학교수법(phonics)을 제쳐두고 의사소통의 기능성만을 강조하는 whole language방식을 사용한 후부터 난독증(dyslexia)성향의 학습장애아들이 쏟아져 나왔고 미국의 특수교육은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일대 곤욕을 치르고 있다. 기초교육을 소홀히 하다 날벼락을 맞은 미국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캘리포니아주는 ‘whole language’ 금지 법안까지 통과시키며 기본으로 회귀하는 형편이다.
배우고 살기 위해서는 읽고 써야만 한다. 언어의 네 가지 사용방법인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중 읽기와 쓰기가 가장 어렵다. 그러나 바람직한 영어교육은 정확한 문법과 형식에 준하는 쓰기와 읽기를 무시하지 않는다. 읽기와 쓰기를 하다보면 생활영어도 저절로 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문법에 기초한 독해와 작문을 무시하면 큰일난다.
누가 아이들을 외국으로 내모는가
한국의 교육은 세계적으로 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오죽하면 미국과 영국은 한국교실의 수업광경을 비디오로 제작하여 교사지망생들에게 시청시킬 정도일까.
그랬던 한국 학교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온 나라 학교가 뒤숭숭하고 아이들은 밖으로만 나돈다고 모두가 걱정이다. 창의력은 안 키워주고 온통 주입식 교육만 시키는 학교가 재미없고 답답하다고 아이들은 아우성이고, 교사들은 제멋대로인 아이들에게서 아예 손을 놓고 있다. 행동조절의 방책이 없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당황한 부모들은 고심 끝에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낸다. 한국의 학교가 너무도 엉망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한탄이다.
그러나 이런 한심한 문제들이 학교의 잘못으로 시작됐을까? 선생님들이 잘못하고 재미가 없어서 교실이 붕괴하고 아이들은 보따리를 싸 해외로 도피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 교육의 침몰은 사실상 교육현장 밖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학교를 바꾼다 해도 나아질 삶은 없고 아이들은 계속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 구조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한국 교육의 문제는 공정한 경쟁이 없는 취업구조와 대학교육의 실패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초중고 교육은 외국에 비해 성공적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망가진다.
이 통탄할 현상은 한국 사회에 있어 절대적으로 부족한 취업의 기회에 그 원인이 있다. 일자리가 너무도 부족한 것이다. 넘쳐나도록 많은 사람, 기업주들은 같은 값이면 일류대학 출신, 또는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찾는다. 이 때문에 초중고생은 영어능력을 키우기 위한 조기유학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일류대학 들어갈 궁리만 한다.
한편 든든한 연줄이 없는 대학생들은 명문·비명문을 막론하고 취업걱정만 한다. 기초학문은 외면되고 취업이 용이한 학과는 무조건 문전성시다. 빚을 내서라도 어학연수를 다녀와야 하고, 취업경쟁에 처진 대학 졸업생들은 외국으로 나가 학위를 따며 국내로의 재진입을 노린다. 취업기회의 절대적인 부족이 수많은 초중고, 대학생들을 외국으로 내몰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학교만 두들겨 맞고 있다. 문제는 밖에서 시작하건만 모든 잘못을 학교 탓으로 돌리고 교사들은 죄인의 행색으로 머리를 들지 못한다. 정녕 누구의 잘못인가 깊이 생각해 보자. 현재 한국의 학교와 교사는 남의 죄를 뒤집어쓴 채 변명도 못 하고 있다.
문제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는 취업의 기회가 확대돼야 한다. 나아가 모두에게 공정한 경쟁 기회를 부여하는 취업제도가 확립돼야 한다. 사회가 순조로울 때 학교는 칭송을 받는다. 또한 공평한 취업의 기회가 모두에게 부여될 때 사회는 비로서 살 만한 세상이 된다.
미국박사들의 탁상공론
둘째, 현장경험 없는 미국 박사들의 탁상공론이 한국 교육의 위기와 실용영어지상론 등의 환상을 몰고 왔다. 아는 것이라고는 미국밖에 없는 (그것도 껍데기만) 사람들로 교육계의 지도층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으며, 우리 교육이 현재 겪고 있는 안으로부터의 붕괴현상은 어쭙잖은 외국의 교육관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바로 이들 소위 교육전문가와 관료들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정책은 미국 교육계를 80년대 중반부터 휩쓸고 있는 포스트모던 교육철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식 진보주의 교육철학에 바탕을 두고, 브라질 출신 파올로 프레이어(Paulo Fr eire)의 해방교육 계통의 교육관과도 유사점이 많은 포스트 모던 교육관은 학교교육이 사회지배계층의 이익추구를 위해 존재한다고 강변하며 일체의 기존지식과 학교체제를 거부한다. 지배계층이 그들의 기득권 유지에 필요한 가치와 지식을 피지배 계층에 학습하도록 강요하는 곳이 학교라는 주장이다.
미셸 포컬트(Michel Foucault),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던 교육은 절대적 진리를 인정치 않으며 학생을 지적 압박의 대상으로 교사를 지식의 압제자로 규정한다. 또한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과지식을 오직 계급유지를 위한 강요된 세뇌의 도구로 매도한다. 탄압자인 교사가 피압박자 아동들을 얽매며 실생활에 아무 소용이 없는 학과지식을 강제로 주입하여 이들의 창의력과 비판력을 마비시키고 결국에는 의식 없는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류의 급진적 계급투쟁 이론이다.
미국, 영국의 공교육을 황폐화하고 일본 교육계를 당황하게 만든 예의 진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열린교육, 대안교육, 참교육 등의 이름으로 이제 한국의 교육을 뒤흔든다. 심지어 이반 일리히(Ivan Illich) 등이 주창하는 탈학교운동, 학교무용론까지 대두하여 아이들은 졸며, 부모는 불평하고, 교사는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상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학과지식의 전수를 중요시하는 주지학습은 숨막히는 교육으로 외면당하고 실용교육 만능론이 교육을 끌고 간다. 실생활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지식만이 가치가 있기에 국어, 역사, 수학을 막론하고 지식축적 위주의 교육방법은 주입식교육이라 불리며 힐난받고, 영어학습의 기본인 문법과 독해, 그리고 작문이 멸시되고 영어회화가 제일이라는 얄팍한 상업론이 판을 친다. 투쟁의 이념이 교사와 학생을 적으로 만들고 당장 쓸 수 있는 지식만이 추앙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교가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족한 투자와 척박한 환경에도 한국의 학교는 나름대로의 구실을 훌륭히 수행해왔다. 그런 우리의 학교를 이념의 유희에 휘말린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뿌리를 자르고 있다. 이들은 멈추어야 한다.
셋째, 닫힌 사회와 폐쇄된 사회인식이 교육을 망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견과 시각의 차이를 허용치 않으며 반론과 도전은 눈총을 받고 눌려왔다. 윗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의식의 폐쇄성은 개방되고 열려 있어야 할 대학사회에서 더욱 심하고 정책결정권을 가진 힘있는 자들간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회의 지식인과 지도층이 이런 지경이니 창의적 사고가 발붙일 수가 없다. 내 뜻을 거스르면 모두가 적이라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어찌 학생들의 사고력이 발달하고 창의력이 개발될 수 있는가? 위에서 먼저 열려야 국민의 의식이 열린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발전의 목줄을 거머쥐고 새로운 생각을 억누른다. 이들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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