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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초리로 우리말 가르친 자식 하버드생 안부럽다”

“회초리로 우리말 가르친 자식 하버드생 안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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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미국에서 28년째 살고 있는 재미동포 윤주환씨(58)의 자녀교육기다. 윤씨는 미국에서 태어난 수진(현재 뉴욕 거주·25), 희진(고려대 동양사학과 재학중·23 ), 원진(고려대 경제학과 재학중·20) 3남매가 당당한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회초리를 들면서까지 한국어를 가르쳤다. 남들이 다 미국 유학을 가지 못해 안달일 때, 윤씨는 세 자녀를 모두 한국 대학으로 유학 보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게 한 독특한 교육관을 갖고 있다.》
1972년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경영대학원만 졸업하면 곧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평소 희망하던 좋은 직장을 잡는 행운을 만나 그냥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제일 더운 애리조나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제일 춥다는 미네소타의 3M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한국으로 돌아가 살려고 생각했지만 사업상 1년 뒤, 1년 뒤 하고 미루다 어느덧 28년이란 세월이 지나버렸다.

이렇게 나는 미국을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했지만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냥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에서 살게 된 것뿐이다. 그래서 걱정이 있다면 나중에 이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살고 싶어도 한국어를 모르고 또 한국문화가 낯설어 돌아갈 수 없게 될 경우 부모를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아이들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한국에서 공부할 기회도 주어서 나중에 스스로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철저하게 가르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세 아이가 한국이나 미국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당당한 세계인으로 살 수 있도록 키우는 게 우리 부부의 첫째 교육 목표였다. 세속적인 출세나 성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두 딸과 아들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래서 외국인이나 한국인 모두 쉽게 부르고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해평 윤가 27대손의 돌림자 진(鎭)을 따라 큰딸은 수진(秀鎭), 작은딸은 희진(希鎭), 막내아들은 원진(源鎭)이라 지었다. 영어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유난스럽게 한 것은 한국어 교육이었다. 회초리까지 들어가며 열심히 한국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걸림돌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 즉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려웠다.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거꾸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냥 막연하게 너희는 한국사람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만으로 한글을 가르치기는 매우 어려운 여건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희생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우리는 아이들이 장차 하버드나 프린스턴 같은 일류대학에 진학하는 것에는 처음부터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하버드 대학생보다는 한국어를 잘하는 평범한 주립대 학생이 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사업상 자주 집을 비우는 까닭으로, 집 근처 드루 신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학생 부부를 모셔 한글을 배우도록 했다. 아이들에게는 한국어 공부 때문에 학교 성적이 떨어지거나 일류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면, 그런 것은 얼마든지 이해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어 교육의 목표는 한국 신문을 읽는 수준이었다. 어느 외국어를 배우든 신문을 읽을 정도는 돼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왜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한국에 갔을 때 길가 간판을 줄줄 읽을 수 있게 되자 비로소 한국어를 배우면 생활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깨닫는 눈치였다.

한국어를 제대로 알려면 한자도 필수다. 아이들에게 가르칠 교재는 내가 직접 만들었다. 상용한자 1800자를 가지고 자주 사용하는 두 자 단어를 만들어 직접 가르쳤다. 나는 여섯 살 무렵 천자문을 한번 배웠는데, 그것도 손으로 쓰면서 배운 것이 아니고 다만 입으로 외서 배운 것뿐인데도 나중에 한자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런 나의 경험을 살려 아이들에게 상용한자 1800자를 큰 소리로 한 번만 외게 했다. 금방 잊어버리더라도 장차 언젠가 다시 한자를 배울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회초리로 키우기

지금까지 나는 남을 때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매를 들게 됐다. 매를 들어서라도 자녀에게 가르칠 것은 꼭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로서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조용히 타일러서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린 자녀들에게는 하나하나 말로 이해시키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럴 경우에는 매를 들어서라도 무조건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회초리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Spare the rod, spoil the child)’는 말은 동양이 아니라 서양 속담이다. 서양에서도 엄격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큰딸과 둘째 딸은 평소 말썽도 부리지 않고 공부도 잘해서 매를 들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한글 숙제를 안 해서 매를 맞았을 뿐이다. 큰딸 수진은 캘리포니아 킹스캐니언에서 산 매(두께 1.5cm × 너비 8cm × 길이 36cm), 둘째 딸 희진은 오리건 국립공원에서 산 매를 사용했다. 미국 관광기념품점에서 그런 매를 판매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미국에서도 자녀교육을 위해 매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매를 들 때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으면 날마다 칭찬만 하고 살겠지만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든다”고 말해줬다. 또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숙지시킨 후 몇 대를 맞아야 한다고 미리 말해주고 볼기만 매우 아프게 때렸다.

큰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서 매를 맞는 아이는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따져 아내를 놀라게 했다. 나는 곧 큰딸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동양 부모는 매를 들고 서양 부모는 매를 들지 않는다. 그 대신 서양 부모는 자녀들이 잘못하거나 부모 말을 안 들으면 온종일 방에 가두거나, 영화구경갈 때 안 데리고 가거나, 온가족이 외식하러 갈 때도 혼자 집에 남겨 놓고 간다. 너는 동양식과 서양식 중 어느 것이 더 좋으냐? 네가 서양식을 원하면 앞으로 그렇게 해주겠다.”

큰딸은 동양식으로 매를 맞는 편이 더 좋다고 했다. 그 후부터는 안심하고 때렸다.

둘째 딸은 언니가 매맞는 것을 보아서인지 훨씬 덜 맞으면서 자랐다. 막내는 웬만한 일은 시키는 대로 잘하는 데다 어쩌다 잘못했을 때 간단한 주의를 주거나 조금만 꾸지람을 해도 곧 시정했기 때문에 맞을 일이 거의 없었다. 막내가 아들이라서 일부러 안 때린다고 두 딸이 항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막내도 초등학교 때 무언가 큰 잘못을 해서 매를 맞게 됐다. 막내의 매는 목재상에서 사온 둥근 나무 몽둥이(반경 1인치 × 길이 20인치)였다. 두 딸은 평소 매를 안 맞는 동생이 이번에는 맞게 됐다면서 내 옆에 서서는 정말 아버지가 막내를 때려주는지 그리고 얼마나 아프게 때리는지를 감시했다. 막상 매우 아프게 볼기 석 대를 때리니까 두 딸은 아무 말도 않고 쳐다만 보았다. 그 후 막내가 또 잘못을 해서 내가 몽둥이를 찾으면 두 딸은 그것을 감추고 동생을 때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나는 누나가 남동생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못 이기는 체 몽둥이를 거두곤 했다.

이처럼 자녀들에게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할 것은 꼭 가르쳐야지 서양식으로 그냥 방임하는 것은 귀여운 자녀를 도리어 망치는 것이다. 어쨌든 아이들이 매를 맞아가며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큰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자 매를 들면서까지 한국어를 가르쳐준 부모를 진심으로 고마워하게 됐다. 그때의 몽둥이 3개는 아이들이 결혼할 때 주려고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운전연습과 캠핑으로 대화하기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디를 가자고 하면 항상 잘 따라왔다. 그런데 아이들이 점점 커서 중학교 3학년쯤 되니까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많은 부모들이 우리집 아이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한다고 자랑하는데, 옆에서 부모가 지도해주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을 마련하려고 궁리해낸 것이 고속도로 운전연습이었다. 나는 평소 아이들에게 고속도로에 혼자 차를 몰고 나가려면 적어도 아버지와 고속도로 운전연습을 3번 이상 해야 한다고 말하고, 연습 전날 밤에는 아이들에게 꼭 해줄 말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메모를 해두었다.

보통 토요일 아침에 우리는 왕복 6∼8시간쯤 걸리는 고속도로 주행연습을 했다. 이때는 절대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틀지 못하게 했다. 장거리 운전을 단둘이 하니까 아이도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면 지루하니까 아버지의 말을 듣다가 가끔 자기 의견도 낸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세 차례 정도 연습을 하고 나면 꼼짝없이 아버지가 준비한 강의를 다 들어야 한다. 강의는 주로 자기 언행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돼야 하며, 근검한 생활을 하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은 언제 어디 가서 살아도 보통 이상으로 살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전공이나 직업 선택보다 먼저 책임지는 사람과 근검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매주 토요일이면 골프장에서 살았고, 일요일이면 한국이나 다른 데서 온 손님들의 관광 안내차 집에 없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주말인데도 항상 집에만 있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캠핑 장비 전문점에 들렀다가 장비들이 너무 좋고 간편한 데 놀라 캠핑장비를 마련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도 중단하고 주말이면 온 가족이, 어떤 때는 어머니까지 모시고 캠핑을 떠났다.

미국에는 사설 캠핑장이 많다. 수영장·매점·세탁실·호수 등이 있고, 텐트를 치는 장소는 땅이 고르게 정돈돼 있으며 수도와 전기시설도 있어 불편함이 없다. 텐트 바닥에 전기장판을 깔고 코드를 꽂으면 영락없이 따뜻한 온돌방 같다.

낮에는 아이들과 호숫가에서 낚시하고 보트도 타고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다가 오후 늦게는 상추쌈과 불고기를 구워가며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한다. 밤에는 매점에서 장작을 사다가 캠프 파이어를 하며 그 불에 감자도 구워 먹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옛날 이야기를 하고 숲 속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주말을 보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는 고사리와 산나물도 뜯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다 추운 겨울 밤 도토리묵도 만들어 먹었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생활이 바빠지고 개인 활동이 많아지면서 가족캠핑은 그만뒀다. 하지만 요즘도 그때 캠핑을 더 많이 다녔더라면 하는 후회가 앞선다. 그런 재미있는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캠핑에 모시고 갔던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아이들도 다 커서 뿔뿔이 흩어져 살다 보니 함께 갈 사람도 없다. 지난해 젊은 한국인 부부에게 그 캠핑 장비를 몽땅 넘겨주었다.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안 가본 데가 거의 없을 만큼 자동차 여행을 많이 했다. 온 가족이 자동차 여행을 할 때 늘 부딪치는 것이 음악이었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그 당시 유행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했고, 나는 한국음악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한 것이 흘러간 팝송이었다. 먼저 나의 고교시절 유행한 팝송 중에서 제일 좋았던 것만 골라 120분 짜리 녹음 테이프 2개에 담아 운전을 하면서 틀고 또 틀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한국노래가 아니고 미국노래라서 좋긴 하지만 너무 느려서 싫다고 또 야단이었다. 하지만 들어본 적도 없는 한국노래보다는 차라리 흘러간 팝송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양보를 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아이들은 공통분모를 찾았다.

요즘도 어쩌다가 그 옛날 노래가 흘러나오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부르곤 한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너는 어떻게 오래 전 노래까지 다 아느냐”면서 깜짝 놀란다고 한다. 요즘에는 그때 듣던 노래 테이프가 어디 있는지 찾아달라고 한다. 마지못해 듣던 노래가 이제는 그리운 노래가 된 모양이다.

나는 곧 그 테이프를 찾든지 아니면 다시 만들든지 해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생각이다. 이제는 그 흘러간 팝송이 우리 가족의 세대차를 초월하는 힘이 되고 있다. 온가족이 모였을 때 내가 먼저 “You are my sunshine…” 하고 중얼거리면 아이들이 앞뒤에서 함께 “My only sunshine…” 하고 따라 합창을 한다. 그리고 그 합창이 끝나면 그들이 먼저 “Love Me Tender”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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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환 JW-YU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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