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간지 지면에 실린 모 정보통신업체 광고를 보면 가슴에 와 닿는 문구가 눈에 띈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더욱 따뜻하게 이어주는 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 일각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이어주는’ 편리성을 악용한 일탈행위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인터넷 채팅과 휴대폰 문자서비스 등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성인 남성과 여성 청소년이 은밀히 만난 뒤 돈을 매개로 성관계를 갖는 이른바 ‘원조교제’다. 이는 ‘첨단 산업사회의 꽃’이 음험한 매매춘의 끈을 이어주는 ‘가교’로 변질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지난 5월 휴대폰 문자게시판에 올라온 ‘인천 여 18세, 연락 바람’이라는 메시지를 보고 당사자인 여학생과 원조교제를 한 20~30대 남성 5명이 적발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금년 초만 해도 기존 전화방을 통한 원조교제 사범이 많았는데, 요즘은 회원제 전화방과 인터넷 채팅을 이용한 원조교제가 크게 늘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원조교제의 또 다른 수단으로 떠올라 빠르게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전 서초경찰서 소년계장 정상배 경위(48·현 서초구 서래파출소 소장)는 지난 10개월 동안 끈질기게 원조교제 사범을 추적한 끝에 지난 1월부터 10월까지 ‘총 30건 단속, 97명 검거’ 실적을 올렸다. 그 결과 경찰청 안팎에서 ‘원조교제범 포도대장’으로 불리는 그는 최근 원조교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 실태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 정소장이 현장을 직접 누비며 건져 올린 단속 실적을 토대로 경찰청 내부 문건인 ‘수사연구’ 9월호에 발표한 ‘원조교제 실태 관련 보고서’ 내용을 보면 그의 우려가 단지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실한 사람이 대다수
2000년 1월부터 8개월 동안 20건의 단속에 걸려든 원조교제 사범은 모두 66명. 이 가운데 35명은 구속, 나머지 31명은 불구속됐다. 직업을 보면 회사원(27명), 교수 및 교사(3명), 자영업자(23명), 무직자(3명), 기타(10명)였으며, 연령별로는 30대가 38명으로 가장 많았고, 20대 19명, 40대 6명 순이다.
“원조교제 사범이라고 해서 특정 직업군에 속하거나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조사 결과 오히려 직장이나 가정에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우리 사회 원조교제 문제가 무척 심각하다는 증거입니다. 불특정다수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건 원조교제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소장은 지난 9월26일 서래파출소 소장으로 발령 받아 자리를 옮긴 뒤에도 꾸준히 원조교제 단속에 나섰고, 그 결과 지금까지 10건의 실적을 추가했다. 본격적으로 원조교제 단속에 나선 지 1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만삭 10대 원조교제’ ‘휴대폰 채팅 원조교제’ ‘한 반 20명 원조교제’ 등 굵직한 제목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며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사건 수사를 대부분 정소장이 지휘했다.
정소장이 ‘원조교제범과의 전쟁’에 뛰어든 계기는 93년 서울 가리봉파출소 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단오거리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주변 유흥가를 끼고 ‘10대 가출촌’이라고 지목된 ‘벌집’이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서울 또는 지방에서 가출한 아이들이 술집 접대부나 삐끼 생활을 하며 탈선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아마 당시 그곳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나라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그 후 서초경찰서 소년계장으로 부임한 직후인 지난해 말, 청소년보호법이 강화된다는 정부발표를 보고 원조교제범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작정은 했지만 막상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몰랐던 정소장은 맨처음 전화방을 찾았고, 그곳에서 만난 10대 여학생 세 명을 통해 원조교제 추적기법을 익혔다.
“무작정 PC방에 들어가 주인을 붙잡고 인터넷과 채팅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채팅사이트 회원으로 가입한 뒤 대화방과 미팅방을 드나들며 원조교제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추적하는 식이었습니다.”
업무상 추적기법을 밝히기 어렵다는 정 소장은 경찰청 안에서도 원조교제에 관한 한 전문가로 손꼽힌다. 지금까지 그가 단속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원조교제의 실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갈수록 다양해지는 원조교제의 형태와 수법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학교 3학년인 한 가출 소녀는 PC방에서 채팅을 통해 보도방 업주를 만났습니다. 이 소녀는 업주 2명과 차례로 성관계를 가진 뒤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원조교제를 해야 했습니다. 말이 숙식 제공이지 날마다 여관방을 전전하며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운 채 하루 3~4차례 남성을 상대했습니다. 적발 당시 이 소녀가 전화방을 통해 만난 남성은 15명에 달했고, 1인당 10만원씩 받은 돈은 보도방 업주가 모두 갈취했습니다. 20대 초반 보도방 업주는 채팅을 통해 미성년자를 물색한 다음 이들을 술집에 연결시키려고 했는데, 미성년자 접대부 단속이 강화돼 사정이 여의치 않자 대신 원조교제로 돈벌이를 한 겁니다.”
관련자 9명이 구속되고 7명이 불구속된 이 사건은 잠자리와 돈이 궁한 가출 청소년의 약점을 악용해 원조교제로 내모는 신종 매매춘 수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컴퓨터통신 대화방이나 채팅방에 들어가면 ‘잘 곳 없는 여, 동거 가능’, ‘먹여 주고 재워 줌’, ‘가출 여 숙식 제공’ 등 가출 청소년을 유혹하는 문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 신체를 노출하는 등 포르노비디오를 방불케 하는 음란성으로 문제가 된 화상채팅은 최근 새로운 원조교제의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 문자 채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화상채팅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상대방 얼굴을 보며 음성으로 대화할 수 있어서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8월, ‘만삭 10대 원조교제’ 파문을 일으켰던 15세 소녀는 화상채팅을 통해 첫 원조교제 상대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공공근로로 생활하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그때 아는 오빠와 성관계를 맺고 나중에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돼 가출했습니다. 막상 집을 나와보니 막막하고…. 처음엔 낙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조교제에 나섰다가, 나중엔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결심하고 계속 원조교제를 하다 임신 9개월경에 적발된 겁니다.”
새롭게 등장한 화상채팅
정소장에 따르면 원조교제 유형이 크게 PC통신과 인터넷 채팅(화상채팅 포함), 휴대폰 문자서비스(무선인터넷 포함), 전화방, 연락방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텔레비전과 전화 등이 구비된 방에서 고객을 받는 전형적인 전화방은 오랜 경찰 단속으로 최근 ‘휴게텔’ 또는 ‘휴게방’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일반 전화방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지만, 텔레비전 모니터로 상대방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화상카메라를 설치한 곳이 최근 새롭게 등장한 ‘화상채팅방’이다. 화상채팅방은 신종 전화방인 셈이다.
시간당 1만5000원을 내고 출입할 수 있는 일반 전화방과 달리 언제 어디서든 전화만으로 일 대 일 대화가 가능한 것이 바로 ‘회원제전화방’이다. 회원제전화방은 700 음성정보서비스 전화를 통해 남성 회원을 모집한다. 5만~10만원의 회비를 온라인으로 송금하면 고유 회원번호와 비밀번호를 발급해주는데 일단 회원이 되면 ‘300분 무료 통화’가 가능하다. 회원으로 가입한 남성이 자신의 회원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곧바로 상대 여성과 일 대 일 통화가 이루어진다. 여성은 별도 회원가입 절차가 없으며 업체측이 마련한 ‘080여성무료전화’를 이용하면 언제든 통화가 가능하다.
“일반 전화방은 서울보다 근교 도시에서 더욱 성업중입니다. 버젓이 포르노비디오를 틀어주는 곳도 많습니다. 한껏 성적 자극을 받은 상황에서 여성과 전화통화 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십중팔구는 만나자는 소리가 나오게 되죠.
이런 전화방도 문제지만 특히 회원제 전화방은 더욱 심각합니다. 회원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수화기를 들고 있으면 ‘잠시만 기다리세요’라는 안내 멘트가 나오는데 여성과 통화가 이루어지기까지 수초밖에 안 걸립니다. 이런 식으로 잠깐동안 수십 통의 통화가 가능합니다. 원조교제의 온상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 회원제 전화방 업주를 적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화기와 착신에 필요한 컴퓨터 단말기를 설치할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나 사업이 가능한데다, 단속을 피해 기기 설치 장소와 운영자 사무실을 각각 따로 두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원조교제 수단으로 악용되는 ‘연락방’은 남녀 모두 별도의 회비없이 30초당 30~100원만 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700’ 전화를 이용해 회원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즉석에서 회원으로 등록돼 개인 음성사서함을 가질 수 있다. 연락방은 남성 또는 여성 전용, 남녀 혼용으로 구분되는데, 바로 이 사서함을 통해 남녀가 서로 음성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원조교제 상대를 물색한다.
“회원제 전화방과 연락방은 스포츠지나 생활정보지, 성인잡지 광고를 통해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여기엔 성과 관련한 자극적인 문구가 가득합니다. 성인 남자가 봐도 ‘전화 한번 걸어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는데, 한창 성에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실제로 단속에 걸린 아이 중에 광고를 보고 호기심으로 회원제 전화방에 전화를 걸었다가 원조교제로 빠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재미 삼아 전화했다 원조교제를 하게 됐다는 남성도 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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