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인권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편견과 차별이다. 장애인은 보통사람과 뭔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사회적 불이익을 조장하고, 거기서 생긴 ‘낙인의식’은 다시 편견을 강화한다. 신체장애인들이 부단한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정신장애인들의 인권은 아직까지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최재명(58) 사랑밭재활원장은 고난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결코 아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 착한 심성을 몸에 익혔고, 학교에서 배운 사회사업가의 모델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활동을 인권적 시각에서 조명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음지에 머무르고 있는 정신장애인들의 삶을 양지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반송리. 바로 이곳에 경산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사랑밭재활원이 있다. 진입로 양편에 사랑밭재활원에서 나온 ‘회원’(사랑밭에서는 ‘원생’이라는 말 대신 ‘회원’이라고 부른다) 20여 명이 자연보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도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행사다. 정신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닌데다,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재활원 입구의 표석에 새겨진 문구가 인상적이다. ‘이마엔 예절, 가슴엔 이상, 손엔 노동을.’ 100m쯤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왼쪽 면회실 앞에 더욱 놀라운 글귀가 있다. ‘一日不作 一日不食·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기자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으니 최재명 원장은 재활원이 설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사랑밭재활원의 설립자는 최원장의 아버지 최병흥(88)옹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참된 길만 간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신조로 살아왔다는 최옹. 그는 광복 후 건축재료상을 시작했는데, 건설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영산콘크리트, (주)호산, 한일시멘트 등이 그가 설립한 회사들이다. 이런 사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옹은 1981년 사랑밭재활원이 문을 연 이래 줄곧 땀의 소중함과 일하는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최옹은 사업이 번창하는 때에 외국인들이 한국의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 ‘우리가 언제까지 외국사람들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다. 나도 언젠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는 것. 실제로 최옹은 지금까지 사랑밭재활원과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해 만든 ‘애전장학회’ 등에 100억원 이상을 기증했다.
최재명씨가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고 사회복지사로 살아가게 된 것도 아버지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최씨는 사회사업가 남편(1978년 작고)을 만나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사회사업을 전공하고 있다.
사랑밭재활원의 구석구석에는 한국정치사의 풍운아 고 윤길중 의원의 붓글씨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윤의원은 최옹과 강원도 문막초등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말년에 몸이 약해지자 사랑밭재활원에 찾아와 흙을 밟으면서 소일했다. 윤의원은 기력이 떨어져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몸을 곧추세우고 ‘愛能益世·사랑의 능력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를 수없이 썼다고 한다. 윤의원의 마지막 외침은 바로 사랑밭재활원이 추구하는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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