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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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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만약 동아일보가 ‘오히라 외상은 한일수교 다음에는 북일수교 차례라고 말했다. 30% 정도는 북일수교 쪽에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썼다면 한일교섭은 깨졌을 겁니다. 그런 시기에 그는 담담하게 ‘뭐라고 해도 한일간이 먼저다. 사회당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려면 빨리 하라고 독촉까지 할 정도다. 실제 정치란 바로 그런 것’ 이라고 말했던 거죠. 한국 정치가들로부터는 들어보지 못한 설명이었기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와카미야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한일조약이 맺어집니다. 경제협력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가 분분했지만 결국 무상공여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 민간 3억달러로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1965년 2월 시나 에츠 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한일조약 가조인을 하러 서울에 갑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읽을 성명 문구를 놓고 외무성도 여러 가지로 고심했지요.

결국 ‘양국간 오랜 역사중에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라는 글을 넣었습니다. 공식문서는 아니지만 이 발언이 그후 다양한 ‘사죄’의 기초가 됩니다. 키워드는 ‘불행한 시기’의 ‘불행’과 ‘실로 유감스러운’의 ‘유감’ 그리고 ‘깊이 반성’의 ‘반성’입니다. 그 뒤 한국이나 중국을 상대로 한 천황의 말도 모두 이를 기초로 만들어졌습니다.

백년을 내다보는 시야

2005년은 한일 역사의 큰 마디가 되는 해입니다.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이 되고,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에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 100주년이 됩니다. 한일관계는 ‘100년을 내다보는 시야’를 갖지 않으면 그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둡니다. 그 조약 내용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한 신문이 ‘황성신문’이지요. 그때의 사설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고요.



와카미야 비탄의 사설이었겠군요.

그 글을 쓴 장지연(張志淵)은 조약에 서명한 자들은 을사오적, 즉 을사년(乙巳年)의 다섯 역적이 나라를 팔아 먹었으니 죽여 마땅하다고 규탄했습니다.

와카미야 매국노라는 것이군요.

하지만 한문 논설이라서 그것을 읽은 사람 혹은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이 드물었을 겁니다. 또 그 무렵 한국의 식자들은 대개 탄식하고 규탄만 할 뿐 국가전략론을 내놓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데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치면 아무것도 없는 한국이었으니 전략론이 있었다 해도 쓸 데가 없었겠지만….

그런 물리력뿐만 아닙니다. 연표를 보면 1905년에는 일본에서도 이런저런 일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해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우에다 빈(上田敏)의 번역시집 ‘해조음(海潮音)’이 나옵니다. 나쓰메 소세키나 우에다 빈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도 그런 책을 읽는 독자가 많았다는 것이 한국과 뚜렷하게 다릅니다.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학문의 권유’는 1870년대에 나온 책인데 100만부나 팔렸다지요. 일본 독자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소프트 파워’ 면에서도 당시 한국은 보잘것 없었습니다. 큰 격차였습니다.

1905년은 일본에 유학해 있던 중국의 혁명가 천톈화(陳天華, 1875~1905)가 ‘절명서(絶命書)’를 남기고 자결한 해이기도 하지요(천톈화의 절명서 : 1905년 청나라가 일본 정부에 자국의 혁명운동에 참여하는 유학생을 단속해달라고 의뢰했다. 이에 따라 ‘청국 유학생 단속 규칙’이 만들어졌다. 이에 반발하는 유학생들이 뭉쳐 항의운동으로 발전했다. 아사히신문이 사설에서 그들을 ‘방종하고 비열하다(放縱卑劣)’고 매도하자 유학생 천톈화는 밤새 절명서를 쓰고 다음날 도쿄 오오모리 해안에서 투신 자살했다. 1905년 12월7일, 그의 나이 31세였다. 절명서는 을사보호조약을 염두에 두고 ‘조선은 일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청나라는 나라가 크기 때문에 망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이대로 가면 조선처럼 스스로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편집자). 또 루쉰(魯迅)이 의학을 그만두고 사회 병리에 도전하는 전투적 문예로 뜻을 돌린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제껏 나쓰메 소세키도, 루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한국은 더 자학해야 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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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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