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스포츠에 대해 품는 비상한 집착은 이런 ‘가난한 민족주의’와 긴밀한 연관이 있고 그 집착은 식민지 시대에 형성되어 오늘날 후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물려졌다. 다만 ‘월드컵 4강’이라는 엄청난 경험이 어떤 새로운 전기가 될는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한다. 즉 월드컵 4강에도 진출해보았으니 이젠 좀 편하게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길 수 있는지, 또는 그 허위인 ‘세계 4강’을 지키고 싶어 더더욱 쌍심지를 돋우고 핏대를 세우며 ‘대한민국’을 외치게 될 것인지. 그런 점에서 한국인들의 스포츠민족주의는 이번 아테네올림픽에서 시험대에 오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식민지 시대 사람들에게 올림픽이 무엇이었던가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으로 잘 알 수 있다.
“진작부터 조선인들도 올림픽대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간 대항전인 올림픽에 식민지인은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에서 발생하는 온갖 원망과 기쁨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무용정신이 부족한 민족
1896년에 시작된 올림픽이 현재와 같이 명실상부한 국제적 제전의 꼴을 갖춘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대회부터였다. 46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 이르러 처음 여자선수가 등장했고 아시아·아프리카 대륙 국가도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올림픽에 대한 조선인의 관심도 이 대회를 전후로 크게 높아졌다.
그 전에는 ‘극동올림픽대회’가 조선인의 관심을 끌었다. 정식명칭이 극동선수권대회(極東選手權大會, The 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인 이 대회는 필리핀에서 먼저 발의하여 1913년부터 2년 주기로 필리핀, 일본, 중국이 번갈아 개최했다. 이 대회가 2차대전 종전 후 시작된 아시안게임의 전신이다.
특히 1921년 대회는 한국인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치러졌다. 일본은 대표선발을 위해 경성에서도 1차 예선전을 벌였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육상부문에 참가했다. 10마일 경주 예선에서 인력거꾼 김학순이 1등을 차지했지만 정작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한 듯하다. 대신 상해조선인체육협회 소속의 동포선수들이 극동올림픽 반마일 릴레이 등에 참가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1년 5월30일자 1면에 장문의 사설을 써서 상해의 동포선수들을 격려했다. 시종 감격과 안타까운 심경의 쌍곡선을 보여주는 이 글은 당시 민족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체육과 올림픽, 세계화에 대한 생각을 고루 잘 보여준다.
그러나 대회에 참가한 조선인들은 상해임시정부가 정식으로 파견한 선수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상해조선인체육협회 소속이라 했다. 이 대회가 ‘극동’을 표방했지만 상해에 거주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 스포츠클럽의 참가를 허락했던 만큼 상해조선인체육협회도 참가가 가능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조선을 대표한다는 근거는 없지만 ‘동아일보’ 사설은 “조선인 선수가 국제적 경기대회에 참가한 것은 금차(今次) 상해의 예로써 효시”라 규정했다. 그리고는 이에 감격하여 “조선인 선수의 참가는 선수 개인과 조선 스포츠계의 영예”일 뿐 아니라 “조선인이 국제적 무대에 제(際)하여 열국인으로 더불어 기를 다투는 시작이라 할지니 실로 조선인 전체의 큰 기쁨이 되는 것”이라 흥분했다. 감격의 근거는 “쇄국주의하에 생활하여왔으며 문약주의의 누습이 뼈와 살(骨體)에 투철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관점이 전혀 없고 무용의 정신이 부족”한 조선 민족의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 우리는 식민지가 되어야 했던가’에 대한 성찰이 조선인 자신에게로 향할 때, 우리가 지지리 못난 놈들이라 그렇다는 결론에 이르고 그 역사적 근거로 조선왕조의 문약과 쇄국주의를 드는 것이 당시로서는 아주 일반화된 ‘가학적 상식’이었음은 앞의 글에서도 살핀 바 있다.
그러면서 사설은 올림픽 정신을 거론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이 국가정책에 따라 올림픽 대회를 즐겼으며, 현대에 와서는 국가간 화합과 체육의 공동발달을 위해 이 대회가 환영받고 있다고 해석했다. 국가주의에 올림픽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주의는 세계 속에서의 나를 인식하여 세계주의를 달성하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과 표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만이 세계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오인은 차제에 조선운동가가 맹성(猛省)하며 조선 일반사회가 크게 각성하기를 바라노니 현금은 일 변두리(地局)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활약할 때”라는 것이다.
‘올림픽’ 큰 운동회의 대명사
조선에서 ‘올림픽’이라는 말은 이렇게 국가간 체육 경쟁의 대명사이자, 규모가 큰 운동회를 대유하는 용어로, 그리고 궁벽진 곳에서 조용히 살아온 조선인이 세계로 떨치고 나가야 할 무대의 대명사가 됐다.
1924년 6월3일자 ‘동아일보’는 조선체육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전조선육상경기대회를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면 육상경기대회에 참가하라. 조선청년의 원기를 일으킬 장쾌한 이 운동회, 세계 ‘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는 다투어 오라”는 제목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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