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기아 소피아(성 소피아 성당) 내부에서 올려다본 돔 부분.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를 뜻한다) 대성당은 역사상 가장 기독교적이었던 황제가 ‘새로운 로마’를 위해 건립한 기독교적 판테온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대 역사가 프로코피오스는 이렇게 감탄했다.
“만약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의 모형을 보여주면서 ‘이런 모습의 건물이 생길 수 있도록 성당을 허물기를 바라는가’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성당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게끔 파괴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프로코피오스는 우리를 1500년 전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데려가 전대미문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한다. 그는 “그 높이가 하늘의 경계에 닿았고, 다른 건축물들 가운데 우뚝 솟아, 마치 위에서 나머지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도시에 속하지만 그것을 지배하면서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했다.
건물의 안은 햇빛과 햇빛을 반사한 대리석의 빛이 가득 차서, 그 빛이 바깥으로 흘러넘친다고 묘사했다. 건물 중심부는 대칭적으로 배열된 거대한 벽기둥을 거느리며 그 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돔이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데, 그는 그것을 “마치 창공에 떠 있는 것 같아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표현했다.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기념비적 건축물이자 비잔틴 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고, 많은 성당의 원형이 됐다. 13세기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반 세기간 로마 가톨릭 교회로 쓰인 때를 제외하곤, 비잔틴 제국의 종말에 이를 때까지 동방정교회의 대성당으로 사용됐다.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뒤 하기아 소피아는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했다. 십자가와 교회의 종, 성상들은 제거됐고 모자이크 벽화들은 훼손되거나 두꺼운 회칠로 덮였다. 건물 바닥엔 양탄자가 깔렸고, 바깥엔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의 첨탑)가 세워졌다. 오스만 제국의 최고 건축가 시난(1489~1588)은 하기아 소피아를 모델로 삼아 슐레이마니에를 비롯한 많은 사원을 건축했다. 하기아 소피아는 그 모양이 비슷한 이슬람 사원들과 함께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는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제1 언덕에서 마르마르 해(海)와 금각만(Golden Horn)을 굽어보고 있다. 지금은 기독교 성당도 이슬람 사원도 아닌 박물관이 돼 있지만, 건물에 들어선 방문객들은 거룩한 장소에 들어온 기분에 사로잡힌다.
플라톤 기하학의 입체화
하기아 소피아는 ‘거룩한 지혜’를 공간적으로 표현한 두 건축가,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가 없었다면 건축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황제가 신봉한 것은 기독교 유일신의 지혜였지만, 건축가들이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지혜는 기하학이었다. 독실했던 황제는 기독교 정설을 확립하기 위해 주요 신학 논쟁에 관여했다. 나아가 제국 전체의 진정한 기독교화를 위해 이교(異敎)를 근절하고 이단(異端)을 축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529년 아테네의 아카데미 철폐는 서양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종말을 상징한다. 그런데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가들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의 대성당을 건축함으로써 플라톤주의 기하학을 입체화하는 데 성공한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플라톤주의 철학에서 기하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높았다. 고대 후기 플라톤주의 철학이 재부상했을 때 철학의 주요 관심은 신학에 있었다. 기하학 역시 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됐다.
고대 후기의 ‘신플라톤주의’는 기하학을 형이상학적 신학의 공간적 표현으로 간주해, ‘거룩함의 기하학’을 전개한다.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이러한 기하학을 배우고 연구한 수학자였다. 그들이 설계하고 건축한 하기아 소피아는 기독교의 거룩한 지혜뿐만 아니라 고대 이교의 거룩한 지혜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에우토키오스의 영향을 받았다. 에우토키오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 학원에서 수학을 철학 커리큘럼의 일부로 가르쳤다. 그에 앞서 수학을 가르쳤던 암모니오스는, 4세기 아테네에 재건된 아카데미의 수장인 프로클로스의 제자였다. 우리는 지금도 프로클로스가 쓴 유클리드 기하학 주석서를 읽을 수 있다. 프로클로스의 ‘유클리드 기하학 원리 주석서’는 신플라톤주의 기하학의 기본 저술이다.
콘스탄티노플 출신의 프로클로스는 5세기 대표적 이교 철학자로서, 서양 고대철학을 전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잔틴 중세, 유대교, 이슬람교, 서구 라틴 중세와 르네상스에 전해진 서양 고대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은 대부분 프로클로스의 해석을 거친 것이다. 그가 죽은 후 반세기가 되기도 전에 아카데미는 철폐되고 철학자들은 페르시아로 망명해야 했지만, 그는 기독교의 위협 속에 살면서도 고대 철학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고대의 지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낙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