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변호인’.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이 허구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은 우선 사회학적 사건이다. 영화의 질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라고. ‘변호인’에 따라붙는 1000만 관객이라는 숫자는 ‘사회학적 사건’의 일부에 불과하다. ‘변호인’ 열풍은 2014년 대한민국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담론 부재 시대와 논쟁의 시대
1970,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 대부분에게 ‘이데올로기’나 ‘민주’는 가볍게 입에 담을 만한 명사가 아니다. ‘변호인’은 이데올로기와 민주라는 어려운 명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지금이야 그런 명사를 아무렇게나 말해도 무방하지만 여전히 영화를 향유하는 주요 계층에게 쉽게 농담으로 건넬 명사는 아니라는 뜻이다.
1950, 60년대 좌우 대립의 시대를 지나 1970년대 무조건적 경제 발전 시기, 1980년대의 정치적 암흑기를 지나오는 동안 ‘시민’은 스스로를 약자와 동일시해왔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몰아친 경제의 광풍은 그 달콤한 햇볕을 쪼일 심리적 여유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대학만 졸업하면 취업이 보장되고 빚지고라도 집을 사면 몇 년 안에 보람된 이익을 돌려주던 황금시대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수치적으로 보자면, 2014년 현재 우리 사회는 1970, 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살기 좋아졌다. 문제는 사람들이 체감하는 삶의 질은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여기엔 절대적 이념의 증발을 대신한 상대성의 지옥도 한몫한다. 상대성이라는 지옥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심리적 압박감을 자극한다.
어찌 보자면 영화 한 편을 두고 좌와 우를 나누고, 정의와 부정을 구분하는 세상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를 두고 외면하는 것도 문제라면 모든 예술을 정치적 암호로 해석하는 것 역시 강박이다. 노무현의 실화이니까 봐야 한다는 논리나 노무현의 실화이니까 보지 않겠다는 논리가 서로 다르지만 닮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변호인’ 현상 속에는 노무현의 실화이니까 이상의 어떤 사회적 무의식이 담겨 있다. 우리는 우선 이 영화가 담론 부재 시대에 논쟁적 대상이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한 편의 영화를 두고 그 평가하는 방식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방식 또한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맴돌던 어떤 의견들이 ‘변호인’이라는 공동의제를 두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논쟁은, 아무리 격렬하다 할지라도 의미 있다. 문제는 논쟁이 아니라 귀를 닫고 상대를 공격하는 빌미로 영화가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변호인’을 통해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은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하고, 어떤 사람은 순수한 드라마적 감동을 이야기한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변호인’에 대해 각기 자신의 해석과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논쟁하고픈 열망들이 출구를 찾아 헤매는 셈이다.
리틀 빅 히어로에 대한 열망
논쟁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강렬한 것은 바로 ‘리틀 빅 히어로’의 탄생이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을 맡았던 1992년 작 ‘리틀 빅 히어로’에서 영웅은 바로 작지만 큰 소시민이었다. 그는 사고 현장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구하고 홀연히 자리를 떠난다. 영웅이 되고자 했던 의도는 없었지만 그의 소박한 선의는 작기 때문에 더욱 영웅적으로 조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