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잘난 분당’, ‘못난 일산’?

  • 안영배 ojong@donga.com

    입력2006-10-10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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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산은 개혁·진보, 분당은 보수·안정

    • 일산은 대외개방형, 분당은 독립지향형

    • 일산 명문 백석고와 분당 명문 서현고

    • 일산은 거대한 기자촌, 분당은 정보맨의 기지

    • 일산과 분당, 누가 더 잘 사나?

    성남시 분당구와 고양시 일산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도권의 양대 신도시다. 6공화국 시절 주택 200만 호 건설정책에 의해 도시개발이 진행된 지 10년, 일산과 분당은 폭발적인 속도로 자가 성장해 수도권의 ‘공룡 도시’로 자리잡았다. 인구 수에 있어서도 현재 분당은 39만1500명, 일산은 41만4000명을 자랑하는 매머드급 신도시다.

    사통팔달의 잘 짜인 도로망, 풍부한 편의시설, 공원 등 녹지로 둘러싸인 상큼한 환경. 이제는 일산과 분당을 설명하는 일상적인 표현들이다. 두 도시에선 개발 초기의 삭막함과 황폐함은 좀체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수도권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높은 주거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두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주민 대부분은 이른바 ‘외지인’들. 주로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서 흘러들어온 이방인이 그들이다. 현재도 주민 중 대다수는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다. 낮에는 주부와 아이들만 보이는 전형적인 베드타운인 것이다.

    그럼에도 두 도시는 어느새 지역 특색을 갖춘 나름의 ‘정서’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도시 사람들 간에 은근한 경쟁심까지 유발해서 서로 ‘우리가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일산이 국내 최대의 인공호수인 호수공원을 자랑하면, 분당은 그에 질세라 전통과 현대미를 조화롭게 살린 중앙공원을 맞수로 내놓는다.

    지난 4·13 총선은 분당 사람과 일산 사람의 서로 다른 정서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무대. 정치권에서는 두 신도시 모두 비교적 지역색이 덜한 데다, 학력수준이 높은 편이고, 중산층이 밀집해 있는 등 수도권 민심을 대변하는 ‘신정치 1번지’라는 점에서 공천단계부터 상당한 고심 끝에 ‘선수’들을 출전시켰다.



    그런데 선거 결과 표심(票心)은 서울을 중심으로 남과 북에 자리한 지리적 위치 만큼이나 극명하게 달리 나타났다.

    ‘경기 남부의 신정치 1번지’인 분당 신도시는 두 선거구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싹쓸이한 반면, ‘경기 북부의 신정치 1번지’인 일산 신도시는 두 선거구 모두 민주당 후보가 휩쓸었다. 더욱이 일산에서는 인접한 선거구인 덕양 갑, 을에서도 약속이나 한 듯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선거전문가들은 두 지역의 뚜렷한 선거 결과가 분당과 일산 주민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산 사람들이 개혁 및 진보 지향적이고, 분당 사람들은 안정 및 보수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일산, 한나라당에서 민주당 지지로

    먼저 일산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을까?

    일산이 갑, 을로 선거구가 나뉘기 전 자민련 일산지구당 자료에 의하면 일산지역 유권자의 고향은 영남 22%, 호남 20%, 충청 20%, 원주민 18% 등 지역적으로 골고루 분포돼 있다. 경상, 호남, 충청권에 비해 지역색이 옅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통계청의 ‘고양시 일산구 인구이동보고서(99년)’에 의하면 서울(45.6%)과 일산 인근의 경기권(44.7%)에서 전입해온 사람들이 전체 주민의 90.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주민 구성을 보이는 가운데 일산 사람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역대 선거에서 반(反) 김대중, 반 민주당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일산 유권자들은 96년 총선에서 국민회의(민주당)보다 신한국당(한나라당) 후보를 선택했다. 9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같은 일산 주민이던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38.5%)보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44.8%)를 더 많이 지지했다. 또 지난해 8월 시장 보궐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를 선택하는 등 일산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우세지역으로 분류됐던 곳이다.

    일산갑구에서 이 지역 출신 3선의원인 이택석 의원(자민련)과 전국구 오양순 의원(한나라당)을 제치고 당선된 정범구 의원(시사평론가)의 말.

    “일산갑 유권자(약 13만3000명)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한나라당 우세 지역으로 나타났다. 아파트 평수가 커지는 곳일수록 한나라당 지지 성향의 영남 사투리가 눈에 띄게 많았고, 반대로 평수가 작아지는 곳일수록 민주당 지지 성향의 호남 사투리가 많다는 특징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30평형대에 사는 주민들 중에서도 민주당보다는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나는 이들을 주 대상으로 개혁론과 인물론을 앞세워 파고들었다.”

    정의원은 일산갑의 경우 30평형대 아파트 값이 서울로 치면 20평형대의 서민층 아파트 값과 비슷하므로, 사람들도 당연히 개혁을 강조하는 민주당을 지지할 것으로 판단했는데 실제로는 스스로가 보수와 안정을 희구하는 중산층 계급이라는 ‘허위 의식’을 적잖게 갖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또 이런 성향은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보다는 일산에서 온종일 생활하는 가정주부와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팽배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산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가 전원 당선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일산에서 총선 시민연대 활동을 한 고양시민회의 신기철 사무국장의 설명.

    “일산구민을 포함한 고양시민들 중에는 과거의 친여 성향, 즉 보수 성향의 주민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민방위교육장에서 최근의 남북정상회담 건과 관련해 강사가 매우 비판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호응해주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그런데도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30~40대의 젊은층이 지속적으로 일산으로 유입되면서 여론 주도층으로 자리잡았고, 주민들 사이에도 변화를 요구하는 흐름이 컸다고 본다. 거기에 더해 정범구씨 등 비교적 참신한 인물이 민주당 후보로 등장한 것도 주효했다고 본다.”

    실제로 일산 주민들이 보수·안정 성향에서 개혁·진보 성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도 있다. 일산을구 선거에서는 ‘노동자의 정당’으로 각인된 민주노동당 후보가 자민련과 민국당 후보를 제치고 3위(6250표, 8.5%)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일산과 이웃한 아파트 밀집지역인 덕양을구에서도 민주노동당 후보가 6.2%(4165표)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러한 득표율은 서울에서도 좀체 찾아보기 힘든 진보계층 지지표인 것이다.

    분당 정서, ‘민주 NO, 한나라 OK’

    ‘일산은 서울의 강북과 정서가 비슷하고, 분당은 서울의 강남과 정서가 비슷하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일산은 서울의 강북쪽 사람들이 대거 진출한 곳임에 비해, 분당은 서울의 강남쪽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옮겨갔다.

    이 지역에서 6선한 오세응 의원측 자료에 의하면 분당지역 유권자의 고향은 영남이 30% 이상, 호남 23~26%, 충청과 경기가 각 5% 정도다. 수적으로도 영남 지역 출신이 우세한 곳이다. 분당 유권자의 본적지별 분포를 보더라도 서울 출신이 64%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을 영남 출신(14%)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영남 출신으로 강남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이 분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서울의 강남 정서가 그대로 연장돼 ‘제2의 강남’으로 불리는 분당에서는 역대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표차로 이겼다.

    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오세응 의원이 33.1%의 득표율로 국민회의(민주당) 후보(25%)를 물리쳤다. 이어 9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51.1%를 득표한 반면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35.3%에 머물렀다. 이런 수치는 수도권은 물론 서울 강남보다도 정도가 심한 반(反) DJ 성향의 지표였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은 분당지역의 독특한 정서를 감안,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경부 장관을 지낸 강봉균씨(분당갑)와 한국통신프리텔 사장을 지낸 정보통신 전문가 이상철씨(분당을) 등 ‘거물’을 내세웠지만 결국 한나라당 정서를 당해내지 못했다. 분당을구에서 7선 고지를 바라보다가 최저 득표로 실패한 오세응 의원(자민련)은 분당 정서가 영남 정서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철저하게 호남 대 비호남 구도의 선거전이었다는 것.

    한편 이번 선거에서 분당은 일산과 비교해볼 때 또다른 면에서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일산의 경우 일산과 인접한 덕양지역까지 전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것과는 달리, 분당의 경우 신도시를 제외하고는 그와 인접한 수정과 중원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한나라당 후보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눌렀다.

    이는 구시가지 사람들(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과 신시가지 사람들(성남시 분당구)의 정서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이번 총선에서 분당에 출마한 각당 후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분당독립시’ 문제를 선거 구호로 들고 나왔다. 분당 사람들을 독자로 두고 있는 생활문화 정보지 ‘분당소프트 21’의 발행인 고진석씨는 각당 후보들이 유권자들의 독립시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분당 신시가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남 구시가지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강하다. 옷차림, 분위기 등에서 분당 사람인지 성남 사람인지를 구별해낼 정도다. 분당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편의시설이나 문화시설이 뒤진 성남 구시가지로 가는 일도 드물다. 택시도 웃돈을 줘야 갈 정도다. 분당 사람들은 ‘성남시 분당구’라는 현 행정지역명 대신에 ‘분당시’ 혹은 ‘서울시 분당구’라는 말에 정서적으로 더 기울어 있는 편이다. 실제로 분당 사람들은 분당에 시설이 없어 충족하지 못하는 문화적 욕구는 서울 강남에서 주로 해결한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도 공연행사가 있을 때면 분당 지역에 안내문을 돌릴 정도다. 그만큼 분당 사람들이 빼놓을 수 없는 주요 고객이기 때문이다.”

    분당독립시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논리는 이렇다. 분당이 성남시 지방세수의 약 68%를 부담하고 있는 데 반해 실제로 분당 주민을 위해 투자되는 비율은 훨씬 낮다는 것. 이들은 “올해만 해도 분당구의 세입이 1678억원인데 비해 세출은 1379억원에 불과해 300억원의 예산이 다른 구로 빠져 나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금은 분당 사람들이 제일 많이 내지만, 정작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당독립시 추진위원회 이준호 위원장은 “성남과 분당은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사실상 다른 도시나 마찬가지인데, 성남시가 분당의 문화시설이나 주민편의시설에 대해 투자를 하지 않는 만큼 분당은 꼭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성남시의 분당 백궁과 정자지구 개발을 둘러싼 논란처럼, 시청이 분당의 자족기능을 갖추기 위해 업무용으로 남겨둔 토지를 마음대로 용도를 바꿔 사용한다는 인식도 독립 논의를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일부 분당 주민들은 “성남시에서 분당을 더 이상 개발하지 말고, 이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성남시와 구시가지 쪽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분당 신도시 입주 초기에 아파트 등록세와 취득세 때문에 분당에서 세금이 많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는 전체 성남시 세수의 40%밖에 안 된다는 것. 또 분당에서 나오는 생활하수 및 오수, 쓰레기 등을 수정과 중원지역에 설치된 혐오시설에서 처리하고 있는 마당에 분당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라고도 한다.

    분당구청의 한 관계자는 분당독립시 문제는 인위적으로나마 ‘분당의 상류층 정서’를 갖고 싶어하는 일부 분당 주민들의 왜곡된 욕구가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분당의 독립은 그다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96년 총선에서 당선된 당시 한나라당 오세응 의원(현 자민련)도 같은 공약을 내걸었지만 4년 동안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것. 분당이 독립하려면 지방자치법에 따라 성남시의 주민투표와 시의회에서 통과돼야 하는데 인구가 4대6의 비율로 열세인 분당 쪽이 불리하다는 것.

    어떻든 이번 총선에서 성남과 구시가지에서 민주당 후보가 전원 당선되고 분당에서는 전원 한나라당 후보가 된 것처럼, 양 지역의 정서적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일산에서도 신도시 독립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당처럼 총선 후보가 공약으로 들고 나올 정도로 첨예하게 이슈가 된 적은 없다. 오히려 일산은 고양 구시가지 사람들과 조화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는 게 시민단체인 고양여성민우회 김인숙 대표의 말이다.

    “일산 신도시는 아파트 하나 건너편에 농림지가 있을 정도로 도농 복합도시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 지역이 조화롭게 살아가보려는 정서가 있다보니 구시가지 사람들과 신시가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적은 편이다. 또 일산에서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활발한 것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고양시의회가 준농림지 내에 러브호텔 신축 등을 허용하는 조례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신시가지 시민단체들과 구시가지쪽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저지한 일도 있다. 이런 과정에 ‘이방인’들과 ‘토박이’들의 연대감과 결속감이 생기는 것이다.”

    또 김인숙 대표는 “일산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에 문화시설, 생활편의시설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건강한 시민정서’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갈등 요소를 봉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은근히 일산 주민들은 수준높은 시민의식을 자랑했다.

    어떤 이들은 일산이 개방적이고 연대의식이 강한 분위기라면 분당은 폐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기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분당과 일산의 지형적 특성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기도 한다. 분당은 동서남북이 영장 불곡 청계 맹산 등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고, 일산은 서해와 닿는 한강 하구의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일산의 지형적 특색은 아파트 개발에서도 나타난다. 자유로를 타고 일산으로 진입해보면 신도시를 중심으로 덕양구의 화정과 행신, 이웃 파주시 등에서 아파트 개발이 방사선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산 신도시 개발과 연계해 아파트를 짓다 보니 일산 구시가지를 포함해 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파트 타운으로 엮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양 토박이인 신기철씨(고양시민회 사무국장)는 “이방인과 원주민의 색깔 차가 엷어지는 것도 이런 아파트촌 건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산의 정책 역시 폐쇄적이기보다는 대외 개방형이다. 일산은 국제화운동을 통한 세계 일류 도시를 지향한다. 최근에는 외국민 3만명을 포함해 80만명이 찾은 ‘2000고양세계꽃박람회’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동북아 무역경제에 중추가 될 동양 최대규모의 국제종합전시장도 건립할 예정이다. 또 김포공항과 인천국제공합이 인접해 있어 서울시의 국제기능 일부를 흡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립군 스타일의 분당

    한편 분지지형인 분당은 탄천을 끼고 남북으로 길쭉한 신도시가 덩그라니 건설돼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판교 IC를 거쳐 분당으로 진입하면 거대한 아파트촌 하나가 고립된 채 세워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분당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남과 북으로 외떨어져 서로 다른 세상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런지, 분당은 독립지향적이다. 분당구청은 분당을 서울의 테헤란 벤처밸리에 이어 새로운 벤처요람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힌다. 분당주민이 분당에서 일하고 분당에서 사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말하자면 분당의 자급자족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테헤란밸리에서 분당으로 이동하는 정보통신(IT) 벤처기업들이 늘고 있다. 올들어 4월 현재까지 분당신도시 업무용 땅 15필지 1만8000㎡가 몽땅 정보통신관련 벤처기업에 팔린 상태다.

    이렇게 분당이 새롭게 벤처 타운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벤처 메카인 서울 강남에서 20분 거리인 데다 건물 임대료와 땅값이 강남보다 훨씬 싸고 근무환경까지 쾌적하기 때문이다. 또 한국통신 본사(정자동)와 SK텔레콤연구소(초림동), 포스데이타(서현동) 등 전자 통신 분야의 대기업과 연구소들이 입주해 벤처 비즈니스에 필수인 초고속통신망 등 기본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독립형인 분당과 개방형인 일산의 이질적 성향은 이주민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일산은 서울의 마포구와 은평구 등 주로 강북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이 많으며, 분당은 서울 강남구와 강동구 등 주로 강남 지역에서 건너온 사람이 많다.

    ‘분당소프트21’이 지난해 분당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분당으로 이사오기 직전 주거지역은 서울 강남이 38.4%, 서울 강북 22.5%, 수도권 16.7%, 성남 구시가지 7.5%, 원주민 1.7%, 기타 13.3%로 나타났다.

    분당에서 5년 살다가 최근 부모님이 사는 일산으로 이주한 이강문씨(사업·일산구 탄현동 건영아파트)는 이렇게 말한다.

    “일산은 주로 서울 강북권에서 살던 사람들이 생활편의시설 등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싶어서 이사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분당에 살기 전에는 서울 은평구에서 살았는데, 강북에 살던 친지들이 일산에 많이 모여 있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친지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고 만족해 한다.

    반면에 분당으로 이사온 사람들은 일산 이주민들과는 이주 목적이 좀 다르다는 점을 느꼈다. 주로 강남권에서 이미 문화적 혜택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공기 좋고 붐비지 않는 분당에서 여유로운 주거 환경을 즐기고 싶어하는 듯했다.”

    부동산 사정에 밝은 이씨는 실제로 아파트 시세에 있어서도 분당과 일산 주민의 성향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일산은 주엽역 주변 등 생활편의시설이 밀집한 중심지역에 위치한 아파트값이 외곽지역보다 비싼 반면, 분당은 교통편이 별로 좋지 않아도 한적하고 공기가 상큼한 외곽 지역의 아파트가 더 비싸다는 것.

    분당은 정보맨, 일산은 기자

    분당과 일산에 거주하는 주요 직업군도 확연히 구변된다. 일산구청이 조사한 ‘일산구 관내 주요 인사 현황자료’에 의하면 언론인 100명, 연예인 91명, 법조인 17명, 3급 이상 공무원 17명, 군 장성 출신 42명, 정당인 68명 등이다. 일산구청 관계자는 “이는 주민등록표 상에 기재된 직업을 기초로 한 것으로, 실제 수치는 훨씬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한다.

    구청 관계자는 비공식적으로는 언론인 600∼700명, 배우 탤런트 가수 등 연예인 300명, 문인 200명 정도가 일산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며 강북에 위치한 행정기관 소속 공무원의 수도 상당하다고 밝힌다.

    이중 특히 일산이 거대한 ‘기자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거의 모든 중앙언론사가 강북과 여의도에 몰려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일산에는 현재 SBS 방송국 스튜디오와 MBC 방송국 사옥 부지가 있다.

    일산에 거주하는 언론인 김모기자(41)는 “주민 중에 기자가 하도 많아서 일산에서 생활민원이 터지면 그 즉시 언론에 보도되거나 해결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역뉴스면에서 분당에 비해 일산이 보도되는 빈도도 훨씬 많다고 한다. 기자들이 많이 살다보니 일산이 그 ‘덕’을 보는 셈이라고나 할까.

    한편 분당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대기업체 임원, 사업가를 비롯해 판·검사 등 법조인(200여 명), 전현직 고위관료(50여 명), 군 장성 출신(200여 명)들이 살고 있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분당경찰서 정보과에 따르면 서울 강남에 근거지를 둔 전문 직업군이 폭넓게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게다가 신기동 느티마을 등 공무원아파트를 중심으로 국가정보원 직원들도 1000명 가량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실제로 분당의 시민단체인 ‘21세기 분당포럼’의 경우 현재 회원이 1500여명인데 이중 교수가 670명, 기업체 임원 420명, 언론인 50명,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종 종사자가 2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현재 분당에 살고 있거나 분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분당포럼 대표 이영해 교수(47·한양대 산업공학과)는 “분당 하면 지금까지 ‘돈깨나 있는 외지인들이 몰려 사는 쇼핑하기 좋은 신도시’쯤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런 통념을 깨고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를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지난해 5월 이 모임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이 단체는 분당 주민들로 이뤄진 훌륭한 인재풀을 활용해 지역 자치단체 및 국가의 당면 현안을 깊이 있게 토론하고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분당에서는 연고별, 출신 학교별 소규모 친목모임이 활발한 편이라고 말한다. 경북고 54회 졸업생인 이교수는 동기생도 25명이나 분당에서 살고 있고, 동문회 주소록을 보면 분당에 사는 경북고 출신들이 600명이나 된다고 밝힌다. 또 이교수의 출신대학인 고려대 졸업생의 경우 3000명 정도가 분당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일산과 분당 모두 주민들의 학력수준이 높은 편이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녀 교육 열기가 매우 높다. 게다가 두 곳 모두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라 중학교 때부터 성적 경쟁이 치열한 편. 교육계에서는 일산에서는 백석고등학교를, 분당에서는 서현고등학교를 지역 명문고로 지목한다. 두 학교를 비교해보자.

    먼저 일산 백석고등학교(교장·이은협). 24학급에 1050명이 공부하는 백석고 학부모들의 학력은 서울 명문고의 학부모 수준을 능가한다. 백석고가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대학원 졸업자만 전체 학부모의 18.4%이고, 대학 졸업자는 61.6%, 고등학교 졸업 학력은 19.5%를 차지한다. 소득수준으로 보면 월 300만원 이상의 고소득층이 8.7%, 250만~300만원의 중간 소득층은 81.2%를 차지한다. 그리고 월 250만원 이하의 소득층이 10.1%다.

    중학교 때부터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친 백석고교생들은 2000학년도에 3학년 학생 396명 가운데 무려 96.7%(383명)가 대학에 진학했다. 2000학년도 명문대 진학 상황을 보면 서울대에 24명, 고려대 41명, 연세대 56명, 이화여대에 58명이 진학했다. 99학년도에는 4개 명문대에 모두 104명이 진학했다(서울대 16명, 고려대 22명, 연세대 24명, 이화여대 42명).

    이번에는 분당 신도시 중심지에 있는 서현고등학교(교장·이철재)를 살펴보자. 서현고는 30학급에 1511명의 학생수를 가지고 있다. 서현고측이 밝힌 바에 의하면 학부모 학력 수준은 아버지의 경우 대졸 이상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고, 어머니도 대졸자가 70%에 이를 정도로 고학력이다.

    학부모들도 공무원, 대기업체 임원, 대학교수, 음악과 미술 계통의 예술인 등 관리직·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절반을 넘는다. 서현고측은 서현고 학부모들의 소득수준을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중산층 이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서현고 학생들은 2000학년도 서울 지역 4년제 대학 합격자가 전체의 98%에 이를 정도로 놀랄 만한 학력을 과시했다. 서현고측은 입시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며 명문대 진학상황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2000학년도에 서울대에 29명, 고려대 103명, 연세대 99명, 이화여대에 90명이 진학했다.

    서현고 학생들의 뛰어난 실력은 각종 경시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99년 10월 한국일보 주최 전국 학력 경시대회(전국 200여 고교 참가)에서 단체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고, 99년 11월에는 교육부와 한국외국어대 공동주최 ‘전국 중고교 외국어학력 경시대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올해도 대한수학회가 주최한 한국수학 올림피아드에서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서현고의 한 교사는 “전국 우수고교 진학담당팀이 매년 우리 학교의 ‘비법’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입시경쟁 때문에 신도시 떠나

    그러나 분당과 일산 모두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기 때문에 생기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이들 지역은 초등학교부터 과외가 성행해 이른바 ‘학원 천국’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교육부가 조사한 ‘99년 과외비 실태조사’에 의하면 분당, 일산 등 신도시 학생들은 무려 73.3%가 과외 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서울의 강남 서초 등 8학군 지역의 61%보다 높은 수치로 신도시가 ‘과외 열풍지역’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또 명문고를 다니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되는 등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분당소프트 21’이 지난해 4월 분당 주민 32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분당주민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66.67%가 자녀 교육을 우선 순위로 꼽았다.

    분당구 탑마을에 사는 주부 이혜원씨는 “분당의 과외 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다. 생활수준이 평균인 가정에서 한달 과외비로 적게 잡아 초등학생이 20만원, 중고생은 30만원 정도 지출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씨는 주부들은 고교 평준화를 바라는데, 왜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 한다. 일산에 살다가 자녀 교육 문제로 서울로 다시 빠져나온 주부 김모씨(45·여·서울시 은평구)의 말.

    “딸 아이가 중3이 되면서 고민이 됐다. 일산에서는 백석고 같은 몇몇 명문고 이외의 학교는 학교 취급도 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래서 내 아이가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할 경우 평생 열등감을 갖고 살아갈 것 같았다. 일류학교에 진학한다 하더라도 고교 3년간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서울로 이사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아이 교육 문제를 빼고는 깨끗한 환경과 교통 등 일산의 생활여건이 마음에 들었다고 아쉬워한다.

    분당과 일산, 어디가 더 살기 좋은가

    일산과 분당 주민들은 고교 비평준화지역이라는 특수성을 빼고는 대체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서 만족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분당과 일산 중 어느 곳이 더 살기 좋은 곳일까?

    이와 관련해 지난해 3월 국토연구원은 신도시 건설 10주년을 맞아 분당, 일산 등 수도권 5개 신도시와 서울시, 인천시, 경기도내 14개 도시 주민 2450명을 대상으로 ‘수도권 신도시주민 주거만족도’ 조사를 벌인 바 있다.

    조사 결과 5개 신도시 주민 중 분당 주민들이 주거환경에 가장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개 분야 주거 만족도(편리성, 건강성, 쾌적성, 안전성, 경제성, 공동체감)를 5점 만점으로 잡았을 때 분당은 3.82를 기록해 1위를 했고, 뒤를 이어 평촌, 산본, 일산, 중동 순으로 나타났다.

    국토연구원의 주민만족도 조사에서 4위를 차지한 일산은, 그러나 수도권 지역 주민들이 가장 살고 싶은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문화일보’가 서울·인천 및 경기도 23개 시 등 수도권 25개 도시 주민을 대상으로 ‘살고 싶은 지역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고양·일산이 1위를 차지했고, 그 다음으로 성남·분당이 꼽혔던 것.

    일산에서 7년째 살고 있는 김종원씨(50·일산구 주엽동)의 일산 예찬론를 들어보자.

    “일산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원과 문화센터 등 편의시설이 잘돼 있고 학교 시설도 훌륭하다. 탁 트인 호수공원의 상쾌한 환경과 맑은 공기는 무엇보다도 일산 사람들의 자랑거리다. 요즘 들어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잘돼 일산이 더 뜨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는 일산 사람도 많다. 고속도로로 곧장 진입이 가능한 분당에 비해서 지방에 일을 보러가는 것이 편치 않다는 점이 일산의 약점이었는데, 북한과 교류가 활발해져 남북 왕래가 가능하면 일산의 주가가 더 오르지 않겠는가. 그래서 ‘점심은 개성 가서 먹자’는 농담도 주민들간에 오간다.”

    그러나 김씨는 입주 초기에 비해 요즘은 오피스텔, 빌딩 등이 많이 들어서서 갑갑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으며, 계속되는 개발로 교통대란도 우려된다고 말한다. 김씨는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관계자들이 개발만 중시하지 일산을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부족한 것같다고 비판했다.

    아무튼 일산 사람들은 일산의 최대 자랑거리로 호수공원과 추억의 백마촌(일명 풍동 애니골) 등을 내세운다.

    96년 5월 개장한 동양 최대의 인공호수(9만1000평)를 품고 있는 호수공원(31만3000평)은 얼마전 꽃박람회 전시장으로 이용돼 80만명이 다녀간 곳이다. 평소에도 하루 3000여 명이 이용하고 주말이면 1만여 명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공원에는 4.7km의 자전거길과 7.5km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자연과 함께 하려는 시민들로 늘 붐빈다. 주민들은 공원수(일산 55개, 분당 102개)는 분당이 훨씬 많겠지만 호수 공원 하나로 수적 열세를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는다고 말한다. 이제 호수공원은 일산 사람뿐만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에게도 낯익은 휴식공간으로 각인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일산신도시 동쪽 끝에 위치한 추억의 먹거리촌 ‘풍동 애니골’도 빼놓을 수 없다. 백마역 주막촌이 신도시 개발로 철거됐다가 93년 ‘화사랑’을 선두로 카페와 주점이 들어서기 시작해 명소로 자리잡은 이곳은 연인들의 데이트와 가족나들이에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일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보육시설(487개)를 갖추고 있어 맞벌이 부부들에게는 더 없는 ‘낙원’으로 꼽히기도 한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두고 맞벌이를 하고 있는 박순희씨(39·여·교사)는 일산은 ‘초등학생의 천국’이라고 평한다. “차도와 확실히 구별되는 넓은 땅 위에서 자동차 사고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자전거나 롤러블레이드를 탈 수 있고, 나무 숲 아래에서 곤충을 잡는 등 아이들의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산이 최고’라는 일산 주민들의 말에 분당 사람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도시 전역이 십자형으로 뻗은 도로망을 확보하고 있어 10분이면 어느 곳에나 갈 수 있고, 분당 중심부의 중앙공원은 호수공원과 비교되며, 국내 최대 높이(45m)의 번지점프대와 자전거도로 및 사계절 꽃동산이 있는 율동공원과 카페촌은 ‘풍동 애니골’의 멋과 낭만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게 분당 주민들의 말.

    또 아파트 문만 열고 나서면 크고 작은 공원들(102개)이 반겨주고, 시원하고 맑은 공기는 일산에 못지 않다고 주장한다. 분당 시내를 관통하는 탄천 역시 비록 오염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왜가리 서식지이자 낚시꾼들의 낚시공간으로 사랑받는다.

    분당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스포트캐스터 서기원씨(분당동)는 “분당에서 일주일만 살아보면 그 말이 실감날 것”이라 하고, 미스코리아 출신 방송인 김성희씨(38·구미동) 역시 “강남 청담동에 살다가 이곳으로 왔는데 분당이 더 좋다. 다들 분당 살면 알 것”이라고 모호하게 대답한다. 일단 살아보라는 뜻이다. 주부 조재은(42·분당구 정든마을 동아아파트)씨의 말.

    “외국에 비해 쇼핑하기 편한 우리나라에서도 분당만큼 쇼핑시설(고급백화점 및 대형할인점 8개)이 풍부한 곳은 없다. 최고급 수준의 외제 물건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생활필수품들은 마치 생산공장을 옮겨다 놓은 듯이 할인매장에 쌓여 있다.

    야탑역, 서현역, 미금역 등 역세권마다 빼놓지 않고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먹자골목의 음식점 수는 헤아릴 수도 없어서 앞으로 10년을 더 분당에 살아도 음식점을 모두 가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하늘 아래서 분당만큼 살기 편한 곳이 없다는 뜻의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에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이처럼 분당 주민들은 분당을 좋아하는 이유로 첫째, 맑은 공기가 많은 녹지 공간(41.55%), 둘째 생활 편리시설인 다양한 쇼핑센터·스포츠센터(33.33%), 순조로운 교통(10.50%) 등을 꼽는다(‘분당소프트 21’ 여론조사).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분당 사람들 역시 쾌적한 생활에 불편을 느낀다. 분당포럼 대표 이영해 교수는 용인과 죽전 등지의 난(亂)개발로 인해 분당 사람들 역시 출·퇴근시 통행에 불편함을 겪고 있고, 쾌적한 전원생활을 방해하는 듯한 시 당국의 도시 개발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한다고 밝힌다.

    게다가 ‘쇼핑의 천국’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또다른 뉘앙스인 ‘문화의 빈곤’은 분당 사람들의 약점으로 지적된다. 실제로 분당은 전통문화와 고전문화는 말할 것 없고 대중문화시설도 고작 영화관 2개가 있을 뿐이었다. 최근 들어서야 복합영화관이 하나 더 생긴 정도. 일산의 경우 연예인과 예술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고 있어 나름대로 연극, 전시회, 공연 등 문화행사가 활성화돼 있고 영화관도 자동차 전용극장 2곳을 비롯해 7곳이 있다.

    분당과 일산, 누가 더 잘 사나

    분당과 일산 사람 중 과연 누가 더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을까.

    기자는 분당과 일산 사람들을 취재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분당과 일산을 직행하는 광역버스를 여러 차례 타면서 차이점을 느꼈다. 똑같은 1100원을 지불하는 버스인데도 분당버스는 차창에 커튼이 매달려 있고 좌석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반면, 일산버스는 차창에 커튼도 없는 데다 좌석도 ‘서민적’인 분위기를 주었다.

    또 일산은 값이 저렴하고 맛이 있는 ‘칼국수 집’ 등이 특히 붐비는 반면, 분당은 강남의 고급 음식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식당가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실제로 일산과 분당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평을 들어보면 차이점이 있다.

    “맞벌이 부부다 보니 외식을 자주 하는 편이라서 자연히 맛집도 많이 찾게 된다. 일산이 외식문화가 발달되긴 했지만 메뉴를 찾다보면 특별한 게 별로 없다. 주로 서민적인 음식들이 많고 강남처럼 호텔 수준의 식당은 찾아보기 힘들다. 손님이 왔을 때 접대할 만한 고급 전통음식점 등이 없는 것이 불만이다.”(일산에서 5년째 살고 있는 박순희씨)

    “분당은 한·중·일·양식 등 없는 것이 없고, 강남의 고급 음식점도 거의 대부분 있다. 음식점에서 맛을 제일 따지는데 분당 사람들의 입맛이 까다로워 웬만큼 잘 만들지 못하면 망하기 십상이다. 또 업소마다 인테리어 등에서 저마다 개성을 살려 고급스럽게 꾸미지 않고서는 견뎌내기 힘들다.”(분당에 살고 있는 이혜원씨)

    이런 차이점은 결국 경제력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일례로 분당사람들은 분당을 강남에 비유해 ‘학교 8학군, 음식 8학군’이라고 부른다. 분당이 그만큼 서울 강남 같은 상류 문화가 형성돼 있다는 뜻이다. 분당에 살다가 일산에 이사한 지 1개월이 된 주부 석연희씨(33)의 분당과 일산 평을 들어보자.

    “생활 수준이나 문화 수준 등에서 분당이 일산보다 앞서 있는 듯하다. 백화점이나 할인점에 진열된 상품을 보아도 일산보다는 분당에 더 고급품이 많고 고가다. 같은 평형의 아파트 값도 분당이 일산보다 30~40% 비싸다. 게다가 분당 주부들은 일산 주부보다 자신들에 대해 투자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분당에서는 주부들이 문화센터 강좌를 들으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등 문화 충족의 욕구가 큰 데 반해 일산 주부들에서는 그런 열기가 희박한 듯하다.”

    분당과 일산 주민들의 경제력을 객관적으로 대비해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롯데백화점 분당점과 일산점이다. 지난해 4월에 개점한 롯데백화점 분당점과 10월에 개점한 일산점은 매장면적이나 직원수, 주차면적 등 규모에서 엇비슷하다. 오히려 일산점이 약간 규모가 크다.

    그러나 매출 규모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양 지점 관계자에 의하면 지난 4월 기준으로 일산점은 하루 고객 2만명에 250억원의 매출액을 올린 반면, 분당점은 하루 고객 3만4000명에 35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분당 사람들의 구매력이 훨씬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당의 화려한 상류 문화

    분당의 상류문화는 ‘분당의 베벌리 힐스’로 불리는 분당동과 구미동의 빌라촌에서 화려한 꽃을 피운다. 인근의 아파트나 상가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잡은 이들 빌라촌은 이제 신흥 상류층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한때는 단지 공기가 맑고 한적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강남보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분당 빌라촌의 평당 가격은 평균 800만원대이고, 1000만원이 넘는 곳도 적지 않다.

    서울 강남의 호화 빌라촌 못지 않은 가격 때문에 큰돈을 가진 신흥 상류층들의 집단 주거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떼돈을 번 벤처 기업가들이 80평 이상의 고급 빌라를 많이 찾는다고 말한다. 또 이 빌라촌에서는 부동산을 거래할 때 주인이 부르는 집값을 구매자가 깎지 않는 게 예의라고 한다.

    분당동 빌라촌에 살고 있는 한 주부(45)는 “한 달에 평균 700만~800만원을 생활비를 쓰고 있는데 자녀들의 교육비 지출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서 빌라촌에서는 이 정도 생활비 수준은 결코 높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부유층은 백화점의 주요 고객이 된다. 백화점 고급매장 매니저들은 고객들의 연락처를 파악한 뒤 일일이 전화를 걸어 신상품을 소개한다. 부유층은 제품의 희소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격은 별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싸면 비쌀수록 더욱 호감을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분당의 한 대형 쇼핑센터 외제 전자제품 매장에서는 300만~400만원 하는 TV가 한달 평균 40~50대씩 팔려나간다. 1000만원대의 TV도 이미 전시되고 있고, 곧 3000만원대의 벽걸이형 디지털 TV도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일산에도 분당의 빌라촌과 같은 호화 주택가가 있다. 일산 신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정발산 기슭의 단독주택가다. 김대중 대통령이 살던 집을 비롯해 단독주택 수백가구가 정발산을 둘러싸고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70여 평의 대지에 유럽 스타일의 목재 건축물로 지어진 이 집들은 영화나 CF, 잡지사의 촬영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일산구청에서도 이 주택가에서는 기존 건물과 외형이 비슷한 집을 지으려 할 경우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을 정도로 외관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분당과 일산의 베벌리 힐스는 같은 호화 주택이면서도 분위기가 다르다. 분당의 빌라촌은 외부인을 보는 경비원들의 시선이 삼엄해 선뜻 접근할 수 없는 위압감을 준다. 집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도 없다. 반면에 일산의 주택가에는 울타리가 없다. 오픈된 공간이라서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집의 생김새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 역시 폐쇄지향형인 분당과 개방 지향형인 일산의 정서라고나 할까.

    아줌마들이 주도하는 신도시 문화

    분당과 일산은 ‘아줌마’들이 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지역의 남자들이 대부분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귀가하는 ‘하숙생 남편’들이다 보니 가정에 관한 일은 주부의 몫으로 남겨지게 마련. 그래서 분당에서는 ‘분당 남편이 분당에서 사는 것은 담배뿐’이라고들 한다.

    분당의 주부들은 남자들 대신에 지역의 대소사를 챙긴다. 구미동 고압선 지중매설, 판교톨게이트 통행료 거부 등에서 시위대로 나선 이들도 거의 주부들이다.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다보니 백화점과 대형 유통매장에서는 무차별 경품제공과 무료 강좌, 무료 셔틀버스 등을 운영하는 등으로 여성 소비자들의 소비욕을 경쟁적으로 부추기기도 한다.

    일산 강선마을에 사는 한 주부는 여성들 사이에도 ‘바람직하지 못한 경쟁심’이 종종 눈에 띈다고 말한다.

    “아파트 평형이 비슷한 곳, 그러니까 생활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다 보니까 주부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경쟁이 치열하다. 예를 들어 강선마을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지난해 여름방학 전 한 반에 3~4명씩 해외연수를 가느라 학급수업을 빠지는 바람에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기 자식을 해외연수 보낸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해외로 내보낸 것이다. 나중에는 학교 차원에서 아예 해외연수를 허락하지 않는 방침을 세워 겨우 진정됐다.”

    일산갑에서 당선된 정범구 의원은 일산 주부들을 접하면서 “신도시 여성들이 소비지향적이고 개인의 일상적 이해관계에만 깊이 매몰돼 있어 정치의식이 지체돼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정의원은 또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일산 사람들의 의식은 그를 따라가지 못해 ‘사춘기에 있는 일산’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고양여성민우회의 김인숙 대표는 “주부들이 건강한 소비문화와 시민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봉사활동이나 시민운동, 아파트 공동체 문화 만들기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건강한 시민정신을 스스로 함양하는 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일산과 분당 등 신도시를 중심으로 이웃간 ‘벽 허물기 운동’이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추세다. 일산 백마마을 삼성아파트의 경우 주민들이 먹거리장터와 재활용품 교환 등을 하는 마을잔치인 ‘뜨락 축제’를 여는 등 주민화합을 꾀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분당에서는 지난해 일산의 축제문화를 참고해 ‘구미동 마을 축제’를 열어 주민 1000명이 참가하는 성황을 누렸다.

    참여연대 아파트공동체연구소 한재연 간사는 이런 행사를 통해 아파트 주민들은 공동체감을 형성하고 나아가 참여의식과 민주의식을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아파트 주민들은 응집력이 생기면 대단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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