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장원 추문’은 짧고 시민운동은 영원하다

  •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입력2006-09-28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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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 여러분! 정말이지 힘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침묵과 무관심에 절망했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문을 닫습니다. 국민 여러분!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며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
    일제히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벌떼같은 공격이었다. 장원씨의 성추행사건을 계기로 시민단체들은 몰매를 맞았다. “이제 누구를 믿느냐” “시민단체도 별수없다” “위선자의 행태”라는 탄식과 비난이 쏟아졌다. 썩어빠진 한국사회의 각 분야에서 개혁과 반부패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시민단체도 이제 더 이상 도덕성의 표상일 수 없다는 주장이 기세를 올렸다. 특히 언론이 앞장을 섰다. 난폭한 일반화의 논리가 횡행했다. 마치 모든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부도덕하다는 식이었다. 시민단체들은 날개도 없이 바닥 모를 늪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양심세력이자 도덕적 상징이 되어 있었다. 권력남용과 정치권의 부패를 견제하고 재벌의 폐해를 공격하며 사회복지와 인권의 옹호자로서 온갖 활동을 벌여오던 시민단체들이 얻은 자연스런 결과이기도 하였다. 개발독재와 오랜 권위주의 정부하에서 무너진 공익을 일으켜 세우고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시민단체들은 국민들의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 정부기관과 검찰, 사법, 심지어 언론마저도 불신받는 상황에서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의 지도자들은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의 희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때 만난 비난 공세

    그런 상황에 장원씨 사건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장원씨는 교수이자 환경운동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수개월동안 총선연대 대변인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녹색연합이라는 우리나라의 메이저급 시민단체의 사무총장으로 10여년을 활동해 온, 시민단체의 지도급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가 국민들에게 관심의 표적이 된 것은 총선연대 대변인으로서였다. 단 100일 동안이었지만, 총선연대 활동은 이 땅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 파죽의 위세를 떨친 총선시민연대의 폭풍 맨 앞에 그가 있었다. 매일같이 언론에 비친 그의 얼굴로 말미암아 그는 시민운동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그가 18세의 여대생을 호텔에서 추행했다는 소식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5·18기념식 전야에 광주에서 벌어진 이른바 386정치인들의 추태가 알려진 직후라 그 충격은 더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파렴치한 범죄행위였다. 총선이 끝난 지 불과 한두 달 지난 시점에 벌어진 그 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10년 공든 탑이!

    오죽하면 ‘음모론’이 머리를 들었을까.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부인하고 싶은 속성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 여대생이 부산까지 갔으며 그 야심한 시간에 호텔로 들어갔느냐는 식의 의문도 꼬리를 물었다. 더구나 장원씨 본인은 혐의사실 일부를 부인했다. 단지 술에 취해 팔베개를 했을 뿐이라는 장원씨의 변명은 옹색했다. 설사 그 여대생에게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책임이 결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술에 취해있었다고 해도 그 정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미 변명으로 헤어날 수 없는 도덕적 상처를 입은 것이다.

    문제는 그 상처가 장원씨 자신이나 그가 소속된 녹색연합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단체 전체의 위신이 함께 훼손당했다. 시민단체가 그간 쌓아온 공신력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단체마다 항의와 비난의 전화가 이어졌다. 심지어 회원 탈퇴를 통고하는 전화도 잇달았다. 총선연대를 통하여 한묶음이 됐던 시민단체들은 전전긍긍했다. 총선 과정에 힘을 발휘하고 기대를 모았던 만큼 시민들의 실망이 컸고 비례해서 쏟아진 질타도 컸다.

    총선연대와 이름이 비슷한 참여연대에 빗발친 항의전화에 자원봉사자와 간사들은 기어코 눈물을 쏟고 말았다. 생각해보라. 한 명의 회원을 가입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줄줄이 탈퇴하겠다는 전화가 왔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랴. 장원씨 사건은 그동안 시민단체를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에게는 공격과 비판의 빌미가 되었으며 지지했던 시민들에게조차 불만과 이탈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 얼마나 많은 활동가들이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공익수호의 최전선에서 청춘을 바쳐왔던가. 얼마나 많은 밤을 잠도 잊은 채 사회불의에 맞서 왔던가. 어느 시민단체든, 특히 자정 가까운 시간에 한번 찾아가 보라. 수십만원의 월급, 그마저도 가끔은 거르는 보잘 것 없는 보수를 받으며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일해왔던가. 온 세상의 누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오직 사회 공익과 정의를 지키며 국민의 질높은 삶,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젊음을 불살라 왔다. 이번 사건으로 이들의 헌신마저 매도된다면 그건 진정 안타까운 일이다. 한 사람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시민운동가들의 삶이 한꺼번에 부정된다면 그 손해는 바로 우리 사회 전체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장원씨 사건을 보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총선을 앞둔 3∼4개월 동안 총선연대 사무실을 지킨 그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수십 개 단체에서 파견된 상근자들, 한 시대의 흐름과 대의에 동참하고자 몰려들었던 자원봉사자, 행사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 밤샘을 하며 플래카드를 만들고 무대를 설치하던 사람들, 그런 행사를 한두번도 아니고 매일같이 100일간 해낸 사람들이었다.

    그뿐인가. 찐빵을 쪄 나르고 김밥을 말아주시던 시민들, 한푼 두푼 성금을 모아온 정겨운 이웃들, 깃발과 전단을 들고 집회에 참석해 주신 주민들, 그리고 마침내 선거일에 총선연대가 꼽은 낙선후보에게 단호한 심판의 표를 던졌던 분들―이 모든 이들이 지난 낙선운동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의 노고와 희생이 매도되고 망각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로 유권자들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정치개혁의 시발점이 된 낙선운동, 일본에까지 수출되어 세계인들관심을 받았던 낙선운동―이 모두가 장원씨 사건 하나로 물거품이 된다는 것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장원씨 사건과 관련하여 이제 시민단체 지도자와 활동가들도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민단체의 위상이 높아지고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이미 공인이나 다름없는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검증을 받고 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정치인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비판적 기능을 행사하는 시민단체가 정작 스스로 검증하는 장치는 없지 않으냐는 반문도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민단체에 대한 아무런 규제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안방에서 부부가 ‘행복한 가정 만들기 전국연합’을 만들어도, 두세 이웃이 모여 ‘쓰레기 분리수거 전국운동본부’를 만들어도 시민단체가 된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는 사회단체가 합법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인가를 받거나 등록해야 했지만 지금은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률’조차 폐지되어 등록이나 신고 없이도 얼마든지 단체로 존립하고 활동을 할 수 있다. 결사의 자유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최근 ‘비영리단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행정자치부 프로젝트에 응모하려면 비영리단체 등록을 해야 하지만 그것을 무시한다고 단체로서 활동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결성된 시민단체가 회원을 모으고 회비를 징수해 어떤 활동을 벌이는가도 거의 제한받지 않는다. 물론 기부를 함부로 받는 것은 ‘기부금품모집 금지법’ 위반이 될 수도 있고 기부받은 돈을 사생활이나 엉뚱한 곳에 함부로 쓰는 것은 횡령이 되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는 소비자운동의 지도자들이 소비자대상을 수여하면서 특정업체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민단체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정부조차 군사독재하에서의 탄압에 대한 보상 때문인지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행정기관은 시민단체의 활동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시민단체의 위상이 커져 함부로 개입했다가는 민간단체를 탄압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시민단체끼리 서로를 견제하기도 쉽지 않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나 시민단체연합체가 있어 내부통제를 가하는 경우도 없다. 이런 상황에는 언제든 소수의 시민단체나 그 지도자의 실수 또는 고의적 범죄가 생겨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NGO붐을 타고 우후죽순 시민단체를 표방하며 간판을 건 단체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 시민단체의 성향과 그 지도자의 경력, 그 활동의 순수성이 충분히 검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 가운데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민운동판에 뛰어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처음부터 사기적 목적으로 시민운동을 벌이고 공익을 팔아 회비와 기부금을 모아 사복을 채우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장원씨 사건은 지도자 개인의 도덕성 문제였지만 시민운동을 빙자한 대중적 사기행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원씨 사건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매일 검증받는 시민단체

    그렇다고 시민단체와 그 지도자를 검증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 대해 인사청문회를 개최할 수도 없고 국회의 동의를 받아 취임하게 할 수도 없다. 이것이 시민운동가가 법률에 규정된 공직자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원씨 사건을 계기로 시민단체의 윤리강령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실제로 몇몇 단체에서는 그런 강령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윤리강령이 있다면 자신을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윤리강령을 만든다고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갖춰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시민단체 지도자들의 도덕성은 결국 그 자신과 그 조직에 달려 있다. 높은 도덕성, 엄정한 정치적 중립성은 누가 가져다주거나 강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결단과 조직적 문화와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필자가 소속된 참여연대의 경우,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관에 어떤 임원도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이 있거나 공명심이 높은 인물은 가능하면 주요 임원직에서 배제하고자 노력해왔다. 그 결과 참여연대에서 일하다 정부 고위직이나 국회의원 후보로 나간 사람을 아직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단체의 경우 이 정부 아래에서만 십수명의 임원들이 장·차관급으로 나간 것을 보면 비교할 만한 일이다. 이와 같이 도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 것은 비상한 자기노력에 달려 있다.

    그뿐만 아니라 최소한이나마 국가기관의 견제와 언론과 여론의 견제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민단체는 매일같이 일거수일투족을 견제·감시·검증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단체는 바로 국민의 신뢰에 의해서만 존립하고 유지된다. 만약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 단체는 존립 근거를 잃고 만다. 과거 특정단체의 구성원이나 단체 지도자의 잘못 때문에 위상이 급락하고 회원이 대거 이탈한 사례가 여러 번 있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라. 국회의원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이상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다. 행정기관의 장이 감옥을 갔다고 그 기관이 문을 닫는 법은 없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다르다. 장원씨의 성추행혐의 사실이 알려지자 그가 소속한 녹색연합은 물론이고 다른 시민단체들까지 위기에 봉착해 거의 회복불능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국민의 신뢰를 기반으로 해서만 존속할 수 있는 시민단체에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민단체에는 존립근거와 활동을 보장하는 어떤 법적인 장치도 없다. 재벌과 같은 금력도 없다. 적어도 국민의 신뢰를 잃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시민단체는 없다.

    “국민 여러분,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시민단체의 검증은 일상적으로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회원과 그들이 내는 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고 국민에게 호감을 주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장원씨 사건이나 경실련 테이프사건 같은 것이 터지면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우리 국민들만큼 엄혹한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백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특히 시민단체들에는 더욱 그렇다. 시민단체는 이러한 시민의식에 의해 매일같이 준열하게 검증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시민단체를 검증하려 한다면 먼저 시민단체에 그만한 혜택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국민만큼 염치없는 국민도 없다. 무임승차의식과 공짜와 이기적인 생각들이 팽배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민단체는 환경운동연합이다. 그러나 그 회원 숫자는 7만명에 불과하고 실제로 회비를 내는 사람은 이보다 훨씬 적다. 미국의 그린피스 회원은 200만명이 넘는다. 수년 동안 공권력과 싸우고 농성과 밤샘을 밥먹듯 하며 아름다운 동강을 지켜내고 새만금간척사업을 중단시키고, 백두대간을 보호하는 일을 한 단체에 우리는 그토록 인색했다.

    미국의 경우 웬만한 시민단체는 수십만명의 회원을 자랑한다. 참여연대가 그동안 국민들에게 돌려드린 돈이 줄잡아 10조원이 넘는다

    핸드폰 사용자에게 매년 1만2000원씩 전파사용료라는 이름의 근거 없는 준조세를 납부하게 하는 데 대해 소송까지 제기하여 내지 않도록 만들었다. 2500만대가 넘게 보급된 핸드폰을 생각해 보라. 국민들은 참여연대가 없었다면 몇십년 동안 전파사용료를 내야 했을 것이다. 의약품의 과잉계상을 따져 금년부터 1조원을 인하하도록 만든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우리 사회 최초의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도 참여연대가 조문부터 성안해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

    그뿐인가. 변호사·회계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부가세 부과운동, 의보통합과 의약분업, 국민연금개혁운동,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판공비 공개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회원은 겨우 9000명. 그것이 오늘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 수준이다.

    환경운동연합과 참여연대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수많은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 이 모든 공익적 시민운동이 국민들의 무관심과 지원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술집에서, 택시 안에서, 안방에서 소리 높여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사회모순에 절망하면서도 그 현실을 개혁하고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민단체의 실천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회원이 없고 회비가 없는데 시민단체가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하다.

    그러다가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목소리를 높여 비판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슬을 먹고 살라는 말인가. 물론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 게 좋다. 참여연대는 받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한푼 두푼 성금을 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뿐 아니다. 장원씨 사건처럼 무슨 문제가 생기면 모든 시민운동을 도매금으로 비난한다. 시민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마치 무슨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집 마당은 쓸지언정 동네 골목길은 쓸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골목길의 쓰레기가 금방 자기 집 대문 앞도 더럽힐 게 자명한데도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여긴다. 이 근시안과 이기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한다. 자기 딸의 안전을 위해 정거장까지 마중 나가는 부모가 성폭력 방지와 예방을 위해 운동하는 단체에는 냉담하다. 자신의 딸과 아내, 여동생을 위해 평생 그렇게 따라다니며 보호해줄 작정인가.

    오히려 한국여성의 인권은 독일사람들이 보호한다. 독일의 재단에서 매맞는 아내를 보호하는 ‘여성의 전화’에, 그리고 성폭행 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는 성폭력상담소에, 그리고 여성운동을 총람하는 여성단체연합에 매년 1억원씩을 기부해왔다. 이제 OECD에까지 가입한 한국에 대해서는 그 지원이 끊어지고 있다. 성폭행에 대한 신고를 꺼리는 사회풍토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강간율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때로 나는 상상한다. 이토록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에게 이런 성명을 내고 참여연대의 문을 닫고 시민운동을 그만두는 상상 말이다. “국민 여러분! 저희들은 최선을 다해 이 땅에 부패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워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힘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침묵과 무관심에 저희들은 절망했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문을 닫습니다. 국민 여러분,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

    미국은 시민단체를 포함한 자선단체에 회비를 내고 기부금을 내면 모두 면세혜택을 준다. 그것이 국세청 법전이다. IRC501(c)(3)는 바로 그 근거조항이다. 이 조항을 모르는 미국시민은 간첩이다.

    대부분의 시민은 어느 시민단체에든 회비와 후원금을 내고 세금을 감면받는다. 세금으로 내느니 좋은 일을 하는 시민단체에 회비로 내는 사람들이 많다. 상속세로 모두 뺏기고 마느니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공익을 위해 뛰는 시민단체에 몽땅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만큼 세금은 줄어들지만 그것은 공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더욱 유용하게 쓰이는 원리를 이 나라는 터득하고 있다. 세상의 공의를 지켜낼 수 있도록 국가가 세금제도를 정비하여 보장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편요금을 반까지 할인해주고 있다. 스스로 광고비용을 대 광고할 여력이 없는 시민단체들에 퍼블릭 엑세스를 제공해 공짜로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는 방송시간을 제공한다. 어느 지역이고 퍼블릭 엑세스 채널이 없는 곳이 없다. 인권과 환경, 소비자와 장애인, 여성과 소수민족 등의 이슈가 이런 채널을 통해 여론화하고 보편화한다. 이러한 국가적 지원과 국민적 참여를 통해 시민단체는 튼튼해지고 공의가 세상을 지배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미국은 시민단체들에 철저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확실한 혜택과 특혜를 주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무런 보호도 해주지 않으면서 단지 책임만 묻고 의무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래도 희망은 시민단체

    뉴욕검찰청에는 15명의 검사로 구성된 자선부(Charity Board)가 시민단체들의 모금과 사용의 적정성을 감시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재정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있으며 이 재정보고서는 국세청 직원들과 검사들에 의해 꼼꼼하게 검증 된다. 미국 최고의 모금단체인 유나이티드웨이 회장은 자신이 모금한 공금 중 일부를 자신의 애인과 함께 여행을 하는 데 사용했다는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라고 한다. 이렇게 미국사회는 시민단체에 대해 도덕성을 물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장원씨 사건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가 할 일이 사라지거나 줄어들 수는 없고 21세기는 여전히 NGO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참여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공직자를 선출해서 공무를 위임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초보적 단계에 불과하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의식화된 시민들이 공공적 사안에 대해 직접 참여하고 개입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여론의 힘은 결국 시민단체를 통해 구체화된다. 시민단체의 매개 없는 시민은 모래알에 불과하다. 그 구슬을 꿰는 실이 바로 시민단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시민단체의 숫자와 그 회원 수와 그 활성도에 따라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라. 미국과 유럽에 시민단체가 얼마나 많은지. 미국의 경우 이미 100만개의 시민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보라. 북한에 시민단체가 있는가. 러시아에 몇 개의 시민단체가 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보자. 유신독재와 5·6공 시대에 시민단체가 활동할 수 있었는가. 그때는 결사의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당하던 시기다. 권력이 모든 민중을 지배하고 어떤 비판의 여지를 주려 하지 않았다. 오직 독재자의 결정만 있을 뿐 시민의 개입과 참여, 여론이 힘을 발휘할 공간이 없었다.

    시민단체가 이 땅에서 특별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 사회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루트는 다양하다. 행정·사법기관과 기업, 노동조합, 언론 등이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의 참여자들이다. 그러나 기업은 자신의 이윤 추구라는 목적이 분명하고 행정기관은 감시와 모니터의 대상이 된다. 노동조합은사회개혁과 변화에 중요한 인자임은 분명하나 때로는 공익과 배치되어 계급 이기주의에 빠질 경우도 있다.

    오늘의 언론이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고 사회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며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언론은 스스로가 하나의 권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바로 시민단체들이다. 시민단체가 모조리 사라진다면 이 땅은 금방 암흑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정의가 실종되어 강자의 수렵장이 될 것이며 부패의 악취가 진동할 것이다. 심판기능과 파수기능은 사라져 불의가 판치고 부조리가 난무할 것이다. 이런 세상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시민단체는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가 소중히 가꿔야 할 사회적 실체다. 작은 소망을 모아내야 할 곳이다. 말만으로는 돌멩이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다. 작은 실천들이 모이고 참여가 이루어질수록 공익은 더욱 신장될 것이 분명하다. 간사 몇 명이 모여 피케팅을 한다고 해서 힘있는 기관들이 꿈쩍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꿈을 가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 100만명이 모여 평등권을 외치는 것, 아버지의 모임을 여는 것, 총기규제를 요구하는 부모들의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우리도 여의도공원이나 남산공원에 10만명이 모여 부패방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피케팅을 하고, 사회복지예산을 GDP의 5%로 증액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정치개혁법을 빨리 제정하라고 다그치는 시민들의 행렬을 꿈꾼다. 정말이지 나는 밤마다 꿈꾼다. 시민단체 문 앞에 회원가입을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불난 집처럼 회원가입 신청전화가 이어지는 날을.

    NGO의 길 - 시지푸스의 운명

    어느 방송사 간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방송에서 뜨면 영락없이 마음이 붕 뜬다고. 국민들에게 얼굴이 널리 알려진 MC, 앵커, 탤런트, 유명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본연의 임무를 떠나 정치권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도 이런 연유라고. 시민운동가들 가운데에도 언론에 얼굴 내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기자회견이나 모임에 언제나 앞줄에, 그것도 가운데 앉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보며 걱정이 앞섰다. 시민운동은 공익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언론에 등장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 기자들의 취재대상이 되기 마련이며 때로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기도 한다. 어쩌면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이 언론을 제대로 활용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명을 위한 얼굴 내밀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사람이 헌신과 희생을 끝없이 요구하는 시민단체에서 고난의 길을 계속 걸으리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번 시민운동에 종사했다고 끝까지 시민운동을 지켜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민운동으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개인적 목적으로 그 얼굴을 이용한다면 국민들의 배신감은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나 지도자들이 성인일 수는 없다. 그들도 속세의 인간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보통의 시민들보다 높은 도덕성과 희생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그 활동가들은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사회불의를 꾸짖는다. 그런 사람이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타락하고 부패한다면 그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받는 것도 없이 의무만 강요당하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억울한 일이지만 또 한편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닌가. 시민운동가의 길, 특히 한국에서의 시민운동은 가시밭길, 바로 그것이다.

    비온 뒤에 땅은 더욱 굳게 마련이다. 장원씨 사건으로 시련을 겪은 시민단체들이 좌절만 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힘차게 본분을 다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처음 장원씨 사건이 터졌을 때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담담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시민단체에 들어 있는 거품을 빼고 더욱 차분하게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나친 기대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이제 다시 홀가분하게 출발선에 섰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한 인권법학자이자 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셰스텍이라는 분이 있다. 이 사람은 어느 논문에서 ‘NGO의 길은 시지푸스의 운명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고 올라갔다가 굴러떨어지면 다시 끝없이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푸스의 운명이 NGO의 그것과 영락없이 닮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빛볼 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음지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사회정의와 시대정신에 복무해야 한다. 빛도 이름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다. 오늘도 이들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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