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신세계 센텀시티

또 하나가 아니라 전혀 다른 소비와 욕망의 도시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9-10-07 10:5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대형화, 초고급화는 신세계와 롯데만의 일이 아니고 또한 부산만의 일도 아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이 실험장은 ‘백화점’과는 다른 ‘도시’다.
    신세계 센텀시티
    혹시 ‘매그넘’을 아시는지. 만약 이 매혹적인 단어에서 탄환의 냄새를 맡았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밀리터리 마니아일 것이다. 적재된 화약의 양이 일반 탄환보다 두 배 넘게 많은 탄환을 매그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혹시 이 단어에서 또 다른 의미의 ‘슈팅’, 즉 사진 찍기를 떠올렸다면? 아마 당신은 디지털카메라 마니아일 것이다. 권총을 쏘는 일이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이나 ‘슈팅’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매그넘’은 현대 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그룹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1947년 전쟁 사진의 ‘4번 타자’인 로버트 카파를 비롯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등이 창립한 매그넘은 그동안 유진 스미스, 요셉 쿠델카 같은 전설의 ‘시선’들이 거쳐 갔으며 오늘날에도 토마스 휩커, 이언 베리, 구보타 히로지, 엘라이 리드 등 ‘겨우’ 60여 명의 슈팅 스타로 구성된 최고의 사진 집단이다. 최근 어느 신문사가 주관한 매그넘 그룹의 국내 전시회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을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광주문화예술회관 등에서 그야말로 ‘절찬리’에 열렸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매그넘 회원 전시회가 올여름에 있었다. 오른쪽 눈을 살짝 치켜뜨고 가볍게 웃는 마릴린 먼로와 라틴의 눈물과 희망 체 게바라의 초상 사진을 비롯해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 연작과 가난한 시절이었으므로 더욱 따스했던 한순간의 사랑을 나누는 연인 등의 사진으로 유명한 엘리엇 어윗. 그러니까 팔순을 넘긴, 매그넘 회원 중 최고령의 현역 작가 어윗의 사진전이 저 항구 도시 부산의 센텀시티에서 열린 것이다.

    어디라고? 센텀시티? 순간, 어리둥절해 하는 당신의 표정이 보인다. 몇몇 보도가 당신의 뇌를 스친다. 부산, 벡스코, 센텀시티, 그리고 최신의 세계 최대 백화점. 바로 신세계 센텀시티!

    센텀시티, 전혀 다른 공간



    그들은 ‘센텀시티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러 백화점 가운데 하나라는, 도심지 요처마다 세워진 그렇고 그런, 무지막지한 크기로 지나가는 행인을 굽어보는, 명절이나 바겐세일 때 도심지를 온통 마비시키는, 그 흔한 백화점 목록에 또 하나가 추가된 것이 결코 아님을 강조하기 위하여 ‘~점’이라는 끝 음절을 과감히 생략한 것이다. 신세계 센텀시티! 복합 문화 쇼핑몰, 아니 문화, 소비와 욕망의 거대한 도시로서 센텀시티는 항도 부산의 수영만 부지에 들어섰다.

    과연 최고령의 매그넘 사진작가 어윗의 사진전이 열릴 만한 곳으로, 실은 이 신세계 센텀시티는 올해 3월 개관 때부터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을 맨 앞에 세우면서 ‘또 하나의’ 백화점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공간과는 ‘전혀 다른’ 백화점임을 보여준 바 있다.

    그동안 여러 백화점이 계절마다 커튼이나 이불보 교체하듯 ‘중견작가 초대전’이니 ‘한국화 세일’이니 ‘수채화 동인전’이니 하는 수준으로 적당히 ‘문화공간’을 채우는 행사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리히텐슈타인과 워홀이 서두를 장식하고 어윗 같은 작가가 갤러리 공간을 압도하는 광경은, 부산의 옛 군사비행장에 들어선 이 공간이 왜 센텀시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또한 그 안에서 가장 독보적 외형을 구가하는 센텀시티가 왜 강력한 랜드마크로 떠올랐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언급하건대, 이 지면에서 센텀시티라고 부르는 공간은 대체로 ‘신세계 센텀시티’를 뜻한다. 이와 구분해 해운대구 센텀시티라고 적은 때가 있는데 이는 부산 해운대구 우동의 옛 수영비행장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발한 대규모 도시개발 구역 전체를 가리킨다. 이 구역 안에는 신세계뿐 아니라 그동안 부산·경남 지역 유통업계를 대표해온 롯데를 비롯해 홈플러스를 앞세운 삼성이 진출해 있으며 최신의 호텔과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섰고, 인근의 마린시티와 겹치면서 센텀파크, 아델리스, 베네시티 같은 초고층 아파트가 기립했다. 2013년엔 108층 규모의 월드비즈니스센터도 들어설 예정이다. 해운대구 센텀시티의 도약대가 된 벡스코는 전시장으로는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곳으로 2012년까지 제2전시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압도적 백화점

    이 거대한 ‘시티’ 안에 신세계 센텀시티가 3월3월 그 위용을 드러냈다. 겨우 6개월 남짓 지났을 뿐이지만 이제 센텀시티의 랜드마크는 ‘센텀시티’로 확연히 굳어지는 형세다. 고급 석재인 오로데조토를 사용한 건물 외관은 부드러운 회색과 밝은 브라운이 주종을 이룬다. ‘크기가 크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고전적 명제를 확인해주는 처리가 엿보이거니와 엄청난 스케일의 복합 건물임에도 강철의 유연한 곡선과 채광창, 그리고 흡사 거인이 슬며시 어루만져준 듯한 전면부의 질감은, 종종 거대한 건축물이 품은, 그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압도하면서 내리누르는 듯한 심리적 하중을 덜어준다. 이는 건물 내부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3개의 보이드(Void·건물 내부의 비어있는 공간)에서도 확인된다. 그중에서도 한가운데의 보이드는 1층부터 9층까지 시원하게 뚫려서 자연 채광이 충분한데 이는 채광 효과만이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을 극대화한다.

    “아무리 뛰어난 인테리어도 건축을 이기지는 못한다.”

    신세계 센텀시티

    부산지하철 센텀시티역에서 신세계 센텀시티로 통하는 공간

    센텀시티 부점장을 맡은 신세계 권혁구 상무의 말이다. 이 말 속에 1990년대 스타일에서 벗어난 최근의 백화점 공간 구성의 핵심이 숨어 있다. 신세계 파리사무소장 등을 지내면서 세계 유통업계의 획기적 변화를 꼼꼼히 분석해온 그는 사업 초기 기획단계부터 참여하면서 무엇보다 이 거대한 부지 위에 어떠한 공간이 세워져야 마땅한지를 상상해왔다.

    국내 최대 복합쇼핑몰, 그것이 이 공간의 일차적 목표인데,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쇼핑몰과 유통업계에서 전설을 쌓고 있는 미국 노드스트롬 백화점을 설계한 상업시설 전문 설계회사 캘리슨(Callison)이 이를 맡았다. 캘리슨은 카타르 도하의 ‘진주항’,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의 W호텔,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보잉사 본부, 샌프란시스코의 블루밍데일 백화점,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의 나이키 차이나 등을 설계했으며 한국에서도 이미 경기 수원시 수원역의 AK플라자 설계를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이 있다.

    앞서 ‘위용’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동안 ‘세계 최대’라는 이니셔티브는 1902년 문을 연 뉴욕의 메이시백화점 몫이었다. 2006년 메이시백화점은 기네스월드레코드(GWR)에 세계 최대 면적의 백화점으로 등재돼 ‘THE WORLD′S LARGEST STORE MACY′S’라는 대형 현수막을 전면에 내걸었지만, 이제 그것을 신세계 센텀시티에 물려준 것이다. 메이시백화점은 연면적 19만8500㎡로 약 6만평 크기인데, 이는 6만5000명 넘게 수용하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연면적 16만5829㎡, 약 5만평)보다 약 1만평이 더 큰 규모다. 이 백화점을 평면으로 넓게 펼치면 서강대, 동덕여대, 숭실대 같은 대학의 부지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신세계 센텀시티는 연면적 29만3907㎡(약 9만평)로 메이시백화점보다 3만평가량 더 넓다. 연면적으로 계산하면 일산의 호수공원과 엇비슷하다. 신세계는 6월 GWR로부터 세계 최대 백화점이라는 공식 인증을 받았다.

    그와 같은 ‘크기’가 영업 면적 곳곳에서 확인된다. 센텀시티에 입점한 CGV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스타리움관이 그것인데 가로 27m, 세로 11.5m에 11.1채널 디지털 서라운드 시스템을 갖췄다. 11층에서 14층까지 4개층을 통째로 활용한 골프레인지도 7603㎡(약 2300평) 규모로 국내 최대 수준. 비거리 90야드, 60타석 규모이며 티샷 위치에서 바라본 골프레인지의 전면은 그물망을 제외하고는 푸른 창공을 지향하는 공의 궤적을 그 어떤 시각적 방해물 없이 집중적으로 관망하게끔 설계됐다.

    이밖에도 많은 ‘크기’가 있다. 1만6100㎡(약 4900평)의 식품관 역시 국내 최대 규모이며 493㎡(약 149평) 규모에 408석으로 단장된 문화홀은 국내 유통시설에 들어선 홀 중에서 최대 규모일 뿐만 아니라 최적의 공연시스템을 갖춰 백화점 시설 가운데 최초로 전문 공연장 인허가 등록을 마쳤다. 이 공간에선 금난새와 유라시안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첼리스트 정명화와 뮤지컬 배우 남경주, 최정원, 전수경 등이 공연했다. 면적만 일산 호수공원만큼 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선 각종 공간과 시설 역시 최대를 지향하는 백화점이 바로 센텀시티다.

    복합 문화공간

    자, 이제 백화점, 아니 ‘시티’ 안으로 들어가보자. 백화점이라고 할 때, 우리 경험 속에 떠오르는 공간 구성과 배치가 있다. 1층에는 화장품과 잡화, 2층은 영 캐주얼, 3층은 여성복…. 그런데 이 센텀시티는 그와 같은 평면적 구성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센텀시티 안의 서점, 곧 교보문고다. 지하 주차장에서 최상층 골프레인지까지 그 넓은 공간을 구석구석 안내한 센텀시티 마케팅팀의 안용준 과장은 백화점 중간층에 교보문고가 널찍하게 들어선 것을 뽐냈다.

    “다른 백화점에서도 책을 파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문화용품, 가전제품이 진열된 층의 한구석을 할당받는 정도였다. 하지만 센텀시티는 다르다. 20만여 종의 방대한 서적을 중심으로 음반, 문구, 북카페로 구성된 교보문고는 5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희귀본이나 한정본, 엄선해 수입한 예술서적도 적지 않다. 수영강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안쪽으로 독서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그러면서 그는 교보문고뿐 아니라 영화관, 갤러리, 문화홀, 아이스링크, 스파랜드를 샅샅이 소개했다. 백화점의 본령인 의류, 잡화, 가전 매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말을 아꼈다. 이와 같은 시설 배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서의 센텀시티, 그러니까 백화점이 아닌, 백화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을 강조한 것이다. 이 거대한 공간의 4층은 아이스링크로 조성됐는데,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전이경씨가 수석 강사로 초빙돼 있다.

    그러나, 어쨌든, 센텀시티는 백화점이다. 공간의 조형과 내부의 배치와 운영 지침 그리고 현장 직원과 입점 회사 모두는 ‘단 하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상 이 거대한 공간의 존재 이유인 ‘매출 신장’을 위해 존재하고 또한 각각의 기능을 발휘한다. 이 거대한 공간은 세금이 충당된 공공문화시설이 아니며 누군가의 기부로 이룩된 자율사회도 아니다. 당장의 실용적 욕망에 따른 소비뿐만 아니라 잠재적 소비, 그러니까 내면의 욕망을 끌어올리거나 원래는 없던 욕망까지 사람들의 내면에서 끌어내야 하는 유통시설이다.

    센텀시티는 개장 100일째에 대한민국 인구의 10%에 달하는 450만명이 방문하면서 1500억원의 누적 매출을 달성했고 그중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등으로 구성된 고가 브랜드 매출이 350억원으로 매출의 23%를 차지했다. ‘개장 프리미엄’이 붙은 수치지만 그 여세는 금세 시들지 않았다. 비수기라는 7월27일부터 8월6일까지의 휴가철에도 방문 고객 수가 76만명에 달했으며 매출 또한 160억원에 달했다. 이는 개장 이후 평균 매출액보다 15% 증가한 것이며 고객 수 역시 1.7배 늘어난 것이다. 또한 서울, 대구, 울산 등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 찾아온 원정 고객이 절반을 넘었으며 외국인 관광객 매출 또한 전체 매출의 10%대에 달했다.

    “전통적으로 백화점은 8월 첫째 주에 직원 휴가를 실시한다. 그런데 센텀시티는 직원들을 휴가 보내지 않았다. 실험을 해본 것이다. 부산이라는 여름철 휴양도시에 몰려온 바캉스족이 센텀시티 안으로 들어올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5월에는 1800명을 엄선해 ‘나이트 파티’를 가졌다. 쇼핑과 식사, 공연이 포함된 이벤트로 일반 영업이 끝난 오후 8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했는데, 이 파티에서만 20억원가량의 매출이 발생했다. 획기적 발상을 존중하고 신속하게 판단하는 회사의 경영 방침이 이와 같은 최초의 실험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험은 센텀시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세계 센텀시티

    신세계 센텀시티 중앙 보이드

    센텀시티 정병권 부점장의 말이다. 그는 “백화점은 더 이상 물건 파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사람들은 이제 백화점이 아닌 복합 문화공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바로 이 점이 센텀시티를 단순히 거대한 백화점이 아니라 쇼핑+휴양+생활 문화라는 코드로 읽게 하는 요소다. 부산 이외의 지역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건너온 외국인 관광객이 적지 않다는 점, 백화점 비수기인 여름 휴가철에 오히려 매출이 늘어났다는 점, 주부 중심의 소비 패턴이 아니라 온 가족이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공간 활용을 한다는 점, 그리고 해운대해수욕장의 젊은이들이 비치웨어에 샌들을 신고 나들이 삼아 센텀시티 안으로 들어온다는 점 등이 기존의 소비 패턴과는 전혀 다른 소비를 가능케 하는(혹은 촉발하는) 신형의 공간임을 말해준다.

    센텀시티의 내부 인테리어 역시 각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가 맡았는데 패션 부문의 미국 RYA, 식음매장의 일본 NODE가 그러하거니와 특히 센텀시티 1,2층의 서북측면에 배치된 스파랜드는 일본의 저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하시모토 유키오가 맡았다. 유키오는 2008년 여름, 대만의 타이베이국립고궁박물원 근처에 개장한 음식점 실크스팰리스(故宮晶華)를 디자인해 호평받은 거장으로 신석기 시대 중국의 제기(祭器)를 응용해 매우 세련되면서도 차분한, 기품을 잃지 않은 공간을 선보인 바 있는데, 그가 어루만진 이 센텀시티의 스파랜드는 여느 ‘찜질방’과는 그 규모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때를 밀거나 땀을 내는 정도의 실용성만이 아니라 차분한 사색과 쾌적한 휴식이 가능한 ‘젠’ 스타일의 구획과 조명이 이 공간의 백미다.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는 갈등과 번뇌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류장이든 화장실이든 택시 안에서든 종잡을 길 없는 자기 속의 자기와 싸우고 대화를 하지만, 자기 몸을 방목하면서 한가롭게 머뭇거리고자 한다면 이 스파랜드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트리니티 클럽이 있다. 스포츠와 스파가 결합된 곳인데 VVIP, 그러니까 V(VERY)가 두 번이나 들어간, 극소수 고객을 위한 공간이다. 해당 층의 절반은 문화홀로 쓰여서 이 층은 다른 공간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다. 센텀시티를 안내하는 책자도 이 공간을 ‘극소수 VVIP인 트리니티 고객만을 위해 마련된 최고급 스파 시설’이라고 소개한다. 평범한 이용자는 센텀시티 10층에 그러한 시설이 있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일반 직원들이 이 클럽의 회원 명부를 들여다봐서는 안 될 만큼 철저하게 ‘관리’되는 공간이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클라우디오 실베스트린과 조명 디자이너 마리오 난니가 극도로 억제된 빛과 선으로 정돈해놓은 트리니티 클럽은, 온갖 계층과 세대와 성별이 저마다 욕망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자유롭게 유영하는 ‘시티’안에서 극소수의 VVIP가 그들만의 ‘포비든 시티’ 안으로 조용히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데, 이 점 또한 센텀시티가 왜 여느 ‘백화점’과 다른 곳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욕망의 용광로

    태초의 백화점 역시 그러한 곳이었다. 19세기 초반만 해도 유럽의 상점은 대부분 집안 대대로 이어져온 작은 가게로서 소비자가 물건을 잘 보게끔 진열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근대적 의미의 널찍한 가게가 프랑스 파리에 등장했다. 커다란 쇼윈도와 밝은 조명으로 치장한 마가쟁 드 누보테가 그것이다. 인류는 최초로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을 구경하면서 거리를 걸었다. 스쳐 지나가는 시간은 찰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진열품은 행인의 마음에 지우기 힘든 잔상을 새긴다. 언젠가 행인은 자신에게 내재한 소비 욕망의 명령에 따라 마가쟁 드 누보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의 등장은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던 1854년, 조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의 대대적인 파리 정비 사업에 따른 결실이었다.

    이 획기적인 가게는 곧 봉 마르셰(프랑스어로 저렴하다는 뜻) 백화점으로 진화했다. 이 최초의 백화점이 시도한 마케팅 기법은 두 세기를 건너뛴 지금도 유통업계에서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 백화점이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판매 방식, 즉 박리다매를 통한 대량생산-대량소비 체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고급 상품과 그 소비자를 별도로 관리하는 게 그것이다. 백화점은 정찰 가격제를 통해 빠른 소비 패턴을 유도하는 한편 바겐세일을 도입해 대형 소매업으로서는 치명적인 재고 부담을 확실히 줄였다. 계절에 앞서서 신상품을 전시하는 판매 방식은 물론 오늘날의 백화점이 그러하듯이 유리 천장, 강철 뼈대, 화려한 조명, 비실용적이지만 근사한 장식물 등으로 구성된 이 최초의 백화점은, 두 세기에 걸쳐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 욕망의 용광로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시스템을 창안했던 것이다.

    백화점 카탈로그, 달력, 가계부, 개인 수첩, 문화정보 안내서 등을 제공한 것도 19세기 중엽 파리에서 진행된 마케팅이었다. 산업화와 식민 수탈 등으로 엄청난 소비자층이 된 신흥 시민계급이 귀족 사회의 우아한 문화를 대중화시킨 봉 마르셰 백화점으로 몰려들었다. 급변하는 현대의 파리를 고독한 시선으로 응시한 시인 보들레르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쇼윈도에 대해 쓰디쓴 시를 쓰기는 했어도 그것이 오스망 남작의 대로처럼 쭉 뻗어나가는 현대의 소비 욕망에 브레이크를 걸 수는 없었다.

    이 현대의 공간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실험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20세기의 소비 천국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선 전 대륙에 걸쳐 거점 도시가 발달하고, 이를 종횡으로 잇는 대륙횡단 철도가 구축되면서 동부에서 서부로 이어지는 주요 도심 상권의 집객력이 높아졌다. 지난 1세기 동안 미국의 백화점은 크고 작은 체인점, 세일즈맨 영업, 대형할인마트 그리고 최근에는 홈쇼핑 등의 도전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매출액에선 여전히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백화점이 오랜 역사 동안 벤치마킹해온 일본의 백화점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사에 지울 수 없는 문화의 흔적을 새겼다. 1904년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 판매점으로 출발한 미쓰코시가 백화점으로 형태를 바꾸면서 시작된 일본의 백화점은, 그 초기에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을 지향한다는 근대화 정책의 한 반영으로 유럽 여러 나라의 상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곧 ‘백화점’이라는 말에 걸맞게 대중을 겨냥한 소비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채로운 것은 산업화와 지역 개발에 따라 신흥 중산층이 형성되고 이들이 도시 외곽의 신주거지에 정착하면서 거미줄 같은 철도를 따라 터미널형 백화점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백화점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왔으나 서구나 일본과는 전혀 다른 경향성이 발견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문화적 공간’으로서의 백화점이다. 과거에는(물론 요즘도 대다수 백화점에서는) 이용자들이 우선 옷가지나 생활용품을 구매하려고 백화점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왕 나온 김에 셔츠 한 벌 구경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윈도쇼핑도 하고 출출하면 밥도 사 먹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문화센터’라는 개념이 꽃을 피우면서 백화점은 강의도 듣고 수영도 하고 사람도 만나는 곳으로 진화했다.

    신세계 센텀시티

    신세계 센텀시티에 입점한 교보문고

    이는 우리 사회의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기현상으로 일반 시민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스포츠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저간의 사정을 반영한다. 1970~8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90년대만 해도 문화, 스포츠, 복지 시설은 여타의 경제 지표에 비해 그 수준이 현저히 낮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와 협력해 적절한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엽 이후의 일이고 그와 같은 인프라가 늘어나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다.

    이전까지 생활 영역에서 시민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공공 부문의 문화스포츠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일정하게 경제력이 갖춰지고 문화적 측면의 소비를 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와 같은 공간이 달리 없었으므로 시민들은 백화점의 셔틀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지하에서는 장을 보고 저층에서는 쇼핑을 하고 고층으로 올라가서 수영도 하고 노래교실도 다니는, 그런 문화가 1990년대의 백화점 풍경이었다.

    신세계 vs 롯데

    “백화점엔 시계와 큰 유리창이 없으며, 백화점 1층엔 화장실이 없다고들 말했다. 예전 방식이 그랬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그와 같은 물리적 장치로 고객을 백화점 안에 머무르게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 권혁구 상무의 말이다.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센텀시티가 일본 백화점의 지나치게 섬세하고 복잡한 구성 대신 심플하면서도 대담하게 맥락을 짚어가는 미국 방식을 도입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센텀시티는 공간 디자인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했다. 거대한 스케일이면서도 결코 바깥의 행인이나 내부의 고객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공간을 연출했다.”

    현재 센텀시티를 포함해 전국 곳곳에 신축되거나 리뉴얼되는 공간이 이와 같은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이 신형의 공간에서는 백화점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직접 상품’에 대한 필요뿐만 아니라 더욱 넓은 ‘간접 상품군’(책, 영화, 전시, 강좌 등의 문화소비)으로 강조점이 확장된다.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가는 것을 흡사 지옥행 열차라도 탄 것처럼 질색하는 남편들도 이런 공간이 제공하는 전혀 다른 서비스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점이 있고 영화관이 있고 스파랜드가 있고 아이스링크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매우 강력한 임팩트를 갖추고 있어 ‘시간을 보낸다’는 한가로운 표현이 아쉬울 정도다. 권혁구 상무는 이렇게 강조한다.

    “결국 핵심은 자잘한 인테리어가 아니라 건축 공간 그 자체다. 세 개의 수직 보이드를 중심으로 센텀시티를 설계한 이유는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선 굵은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센텀시티 9층에서 북측의 부지를 내려다보았다. 백화점이 들어선 공간은 개발예정지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개척지가 센텀시티의 북측 면으로 드넓게 펼쳐진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는 야외형 스트리트몰과 복합 오피스 빌딩으로 개발한다는 기본 계획만 수립됐을 뿐,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향후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갈지, 또 이 지역이 동아시아에서 어떤 위상을 갖게 될지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답을 찾아낼 계획”이라고 그는 말한다.

    백화점의 진화는, 대형 유통업체들의 혈전인 동시에 사람들의 문화적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신세계가 센텀시티로 부산권역에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아직까지 이 지역의 맹주는 롯데백화점이다. 지하철 센텀시티역을 공유하는 두 회사의 경쟁은 이곳을 도화선으로 전국으로 번져가는 형국이다.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매개로 한 감성 마케팅만으로는 롯데가 자칫 추월을 허용할 수도 있다. 롯데는 12월 개점 예정인 부산 중구 중앙동의 광복점으로 ‘공세적 수성’에 들어간다. 롯데가 옛 부산시청 자리에 건립 중인 107층 마천루의 일부가 백화점으로 사용된다. 이 같은 대형화, 초고급화는 신세계와 롯데만의 일이 아니고 또한 이 부산만의 일도 아니다. 롯데의 김포 스카이파크, 현대의 일산 킨텍스점이 줄을 잇는다.

    이런 경향은 국내만의 흐름이 아니다. 2003년에 완공돼 ‘도쿄 안의 도쿄’로 불리는 73만㎡(22만평) 규모의 롯폰기 힐스는 아파트, 상업시설, 미술관, 영화관, 호텔, 오피스, 공연장 등으로 구성됐다. 일본인 특유의 세밀함을 강조해 몇 번을 들러도 지형지물의 위치를 쉽게 기억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된다. 다층의 기억이나 복합의 역사는 이 공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새로운 공간과 시설의 행렬일 뿐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프랑스 파리의 ‘라 데팡스(La Defence)’나 영국 런던의 ‘카나리 워프(Canary Wharf)’도 복합 도시의 사례로 꼽힌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 월드’에선 45개의 초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삼성물산이 건설해 완공을 앞둔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를 비롯해 야자수 형상의 인공 섬 ‘팜 주메이라’, 사막 안에 들어서는 ‘스키 리조트’, 세계 최초의 7성 호텔 ‘버즈 알 아랍’ 등이 이 신도시를 구성한다.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도 대규모의 인공도시다.

    ‘신세계 센텀시티’를 중심으로 한 해운대구의 센텀시티 역시 수년 안에 해운대 연안의 스카이라인을 일신하고, 항구 도시 부산의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인근의 마린시티는 물론 롯데가 주력하는 옛 부산시청 부지의 ‘롯데타운’ 또한 이 압도적 행렬의 강력한 동반자다 이러한 개발 행렬이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해온 부산이라는 퇴적층 위에 아름답게 올라서는 것인지, 거꾸로 부산의 전통을 뭉개버리는 초대형, 초고층 신드롬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