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K-스포츠 다섯 가지 스토리로 배우다

[백승주 칼럼] 파리 올림픽 빛낸 대한민국의 힘

  •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前국회의원

    입력2024-08-2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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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핍박에 굴하지 않은 손기정 일장기 말소

    • 대한민국에 첫 금메달 안긴 양정모의 패기

    • 반대 무릅쓰고 유치한 서울올림픽의 경제효과

    • 남북의 냉엄한 현실 일깨운 평창동계올림픽

    • ‘지원하되 관여는 최소화’ 대한양궁협회 리더십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Gettyimage]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Gettyimage]

    2024 파리 올림픽이 우리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을 뒤덮은 총성도, 이스라엘과 이란 간 군사 충돌도, 여의도를 점령한 갈등과 증오의 정치도 파리 올림픽의 후끈한 열풍을 막지 못했다. 올림픽 기간 온 국민이 올림픽을 TV와 스마트폰으로 감상하면서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대동단결의 전통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 아름다운 광경이 뜨거운 감동과 전율을 안기며 올림픽에 투영된 우리 근대사를 돌아보게 한다. 필자는 오륜과 코리아의 관계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K-스포츠 스토리를 생각해 봤다. 그 속에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에너지의 원천이 자리하고 있다.

    스토리 하나-손기정의 피눈물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동아DB]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동아DB]

    한민국에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선수를 손기정이라고 답하는 데는 고민이 따른다. 손기정 선수는 1936년 8월 9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올림픽 공식 기록에도 손기정 선수의 우승 당시 국적이 일본이어서 시상식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갔다. 손기정 선수는 우승 부상으로 받은 월계수를 이용해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고의로 가렸다. 후일 그는 “일장기를 보면서 매우 슬펐다”고 고백했다. 동아일보는 그 당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수상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하고 기사를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그때 동아일보 사회부장이던 현진건과 이 사진을 ‘신동아’에 전재한 최승만 잡지부장 등 8명이 구속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손기정의 금메달은 국적 귀속 분쟁에 놓였다. 베를린 기념비에 새겨진 그의 국적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번 바뀌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바뀌었다. 비극적이지만 사실이다. 손기정 선수 본인과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올림픽위원회를 통해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국적 변경을 신청하려 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기정의 눈물 젖은 금메달은 우리 현대사에 몇 가지 정치적 울림을 만들어냈다. 첫째, 한민족이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 패망했지만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다. 특히 손기정이 우승한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만난 사실 자체가 한민족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 동아일보 및 언론사들이 징역형 등 핍박을 무릅쓰고 항일 독립정신을 선양하려 했다는 점이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인에게 폴란드의 독립을 자극한 쇼팽의 피아노 선율과 비슷한 역사적 울림을 만들어 냈다. 셋째, 대한민국 건국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우여곡절 많은 20세기 역사지만 일제강점기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운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손기정의 눈물과 환희에 20세기 전반기 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스토리 둘-양정모의 비행깃값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레슬링 국가대표 양정모 선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위키피디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레슬링 국가대표 양정모 선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위키피디아]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하고도, 올림픽에 참가할 ‘비행깃값을 포함한 체류비’ 걱정 때문에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대한민국 선수가 있었다. 밀레니엄 세대는 이게 실화인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불과 42년 전 양정모 선수의 일이다.

    1976년 8월 1일 오전 9시 40분 몬트리올 올림픽에 레슬링 국가대표로 출전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올림픽에서 획득한 첫 번째 금메달이다. 올림픽 금메달 수상은 광복 이후 31년 만이자, 정부 수립 이후 28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선수가 획득한 올림픽 메달은 은메달 5개, 동메달 7개가 전부였다.

    양정모 선수는 1972년 운동을 1년여 동안 중단한 적이 있다. 1972 뮌헨올림픽 대표선발전에서 우승, 국가대표로 선발됐지만 당시 정부·대한체육회는 소수정예 파견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올림픽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중량급에 해당하는 페더급에서 메달을 딸 확률이 없다는 핑계였다. 정부는 우리 선수단의 출전 경비를 줄이기 위해 양정모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뮌헨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해 낙심한 그는 1년여 동안 운동을 중단했다. 그러다 주변의 권고로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정부는 조폐공사에 근무하던 양정모 선수의 직급을 서기(9급)에서 주사(7급)로 승진시켜 사기를 올려줬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건 우연이 아니다. 선수 각자가 쏟아부은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그러나 국가경제가 허약하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 한국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 역사가 우리 경제성장사와 궤를 같이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한강의 기적이 올림픽 강국으로 나아가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항공료가 없어 뮌헨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던 양정모 선수는 돈 걱정 없이 운동에만 전념하는 후배 선수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스토리 셋-뚝심 리더십이 만든 서울올림픽 유치

    88 서울올림픽 개막식. [동아DB]

    88 서울올림픽 개막식. [동아DB]

    지난해 말 2030 부산엑스포 유치 노력이 좌절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3선 출신 이영일 전 국회의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영일 전 의원은 대학교 재학 시절 4·19혁명의 주역이다.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 사건과 관련해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적도 있다. 제5공화국에서 집권당 대표(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경력도 갖고 있다. 필자는 1983년 대학 시절, 남북문제와 통일 문제에 관한 그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남북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오랜만에 만난 이 전 의원은 느닷없이 19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과정을 아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고 하자 이 전 의원은 당시 집권당 대표 비서실장으로 현장에서 들은 생생한 목소리와 회의 내용을 상세하게 소회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 20여 일 전에 올림픽 유치를 결정했고, 정변으로 올림픽 유치 문제가 흐지부지됐다. 당시 남덕우 경제부총리는 올림픽 유치 자체를 즉각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은 남덕우 부총리 말을 듣고 난 이후 담담하게 의견을 제시, 결론을 내렸다. ‘올림픽 유치 문제는 나와 정주영 체육회장에게 맡기시고 남 부총리는 경제문제에 집중해 신경을 써주세요’ 하고 말이다.”

    그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박정희 시대 후반기 최고의 경제 참모였던 남 부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올림픽 유치를 반대했다는 주장에 팩트 검증을 하고 싶었다. 올림픽 관련 사료를 통해 그의 주장을 검증해 봤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1979년 9월 3일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의 주도적 노력으로 국민체육진흥심의회에서 의결했다. 보름여 뒤 9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결심했고, 정부는 10월 8일 하계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봄, 남덕우 경제부총리는 ‘올림픽망국론’을 전개하며 올림픽 유치 철회를 공론화했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올림픽 유치 포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은 올림픽 유치 신청을 지시했고, 12월 2일 신청을 완료했다. 1981년 9월 30일 1988 올림픽 서울 유치가 확정됐다. 당시 일본 나고야시와 벌인 1대 1 대결에서 서울이 52표, 나고야가 27표를 얻었다. 국내외 모든 예상을 뒤엎은 ‘바덴바덴 대첩’이었다. 1982년부터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은 대한체육회장 및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올림픽 유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 전 의원의 증언은 올림픽 관련 사료와 정확히 일치했다. 서울올림픽은 한반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 변화에 큰 획을 그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직후 구소련은 해체됐다. 우리는 올림픽 준비 과정, 개최 과정에서 확보된 외교 자산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외교 지평을 200% 확대했다. 러시아, 중국, 동유럽과 국교 정상화가 일거에 진행됐다.

    서울올림픽 유치에 공헌한 박정희·전두환·정주영의 뚝심 리더십을 우리는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개별 정치적 사안에 대한 공과(功過) 논쟁을 넘어 올림픽과 코리아의 관계사에 새로운 금자탑을 세운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이만열(Emanuel Pastreich) 교수의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이란 책 제목을 차용하면, 우리 국민만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외면하고 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심하고 추진한 경험 속에 뚝심 리더십이 녹아 있다.

    스토리 넷-평창동계올림픽과 김여정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김여정 당시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뉴스1]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김여정 당시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뉴스1]

    2018년 2월 9일부터 25일까지 평창에서 제25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세 번의 도전 끝에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할 때 유치가 확정됐다. 유치 직후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동계올림픽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동계올림픽 준비위원회 정부 측 위원으로 일정 기간 일한 필자는 박근혜 정부가 얼마나 올림픽 준비에 집중했는지를 잘 안다. 그러나 이들 대통령은 유치와 준비에 공이 있음에도 국내 정치의 격랑에 부대껴 편한 마음으로 올림픽을 보지 못했다. 대신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부터 큰 관심을 끈 인물은 북측의 김여정 당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다. 국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북측 손님을 맞는 데 거의 30억 원의 예산을 사용했다고 한다. ‘과공(過恭)’이라고 생각한다.

    김여정은 정전협정 이후 김일성 일가 중 처음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문재인 정부는 6자회담 참가국 정부 대표단과 함께 한반도 평화 문제가 진지하게 다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측 인사를 초청하고,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올림픽 이후 진행된 결과를 보면 문재인 정부의 노력은 북측에 의해 철저히 무시됐다. 남북 단일팀 구성에 합의한 하키 종목의 경우 성적이 저조했다. 단일팀 선수 운용과 관련해 양측 정부의 의욕과 입장을 선수 뜻보다 우선하면서 또 다른 논쟁을 만들었다.

    김여정과 북측 인사들을 올림픽에 참가시켜 남북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결국 좌절됐다. 평창동계올림픽은 김여정의 북한 내 위상을 강화했다. 올림픽 이후 대남정책 행동대장으로 나선 김여정의 대남강경 정책은 한반도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올림픽 과공 약발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통해 남북관계 긴장을 완화하고, 통일 여건을 만드는 길이 요원하다는 냉엄한 현실을 재확인해 줬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데이비드 미트라니(David Mitrany·1888~1975)는 “논쟁이 적은 비정치 분야의 협력이 축적되면 정치적 통합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남북 단일팀 구성, 북측 인사에 대한 과잉 접대 등은 미트라니식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평창동계올림픽은 문재인 대통령의 과잉 의욕과 기대보다 냉정한 정세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웠다. 그럼에도 올림픽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 노력은 올림픽이 개최될 때마다 국가 어젠다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스토리 다섯-앵발리드 기적 만든 신뢰 리더십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경기가 열린 프랑스 전쟁기념관 앵발리드. [2024 파리 올림픽 홈페이지]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경기가 열린 프랑스 전쟁기념관 앵발리드. [2024 파리 올림픽 홈페이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앵발리드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 전쟁 영웅과 애국심을 기리는 박물관 겸 현충 시설이다.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과 유사한 국가기관이다. 파리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애국가가 가장 많이 울려 퍼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열린 양궁 경기 덕분이다. 우리 대표선수는 양궁에 걸린 다섯 개의 금메달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뤘다. 40여 년간 1위 자리를 지킨 대한양궁협회와 선수들에게 축하를 넘어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2023년 9월 2일과 3일 한국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개최한 ‘정몽구배 양궁대회’가 새삼 떠올랐다. 대회 당일 필자는 정의선 대한양궁협회장,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등 체육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관심 사항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의선 회장이 거의 한나절을 선수·협회 관계자들과 시간을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인 그가 얼마나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양궁 선수 한 명 한 명을 격려하고 협회 관계자들과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습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뢰와 소통의 리더십’을 읽을 수 있었다.

    장영술 양궁협회 부회장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다섯 개 금메달을 모두 가져올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앵발리드에서 열릴 올림픽 양궁경기에 대비해 용산전쟁기념관 광장을 비싼 대관료를 주고 전지훈련 장소로 삼은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의 다섯 번째 금메달 획득을 확정한 후 정의선 회장과 협회 관계자는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정몽구배 양궁대회’를 연 것은 파리 올림픽 대비용 전지훈련의 일환이었다”고 언급했다. 그 말에 감사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평화의 광장을 적지 않은 금액으로 대관한 사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심양면 지원은 하되 선수 선발과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 정몽구·의선 회장의 통 큰 리더십이 앵발리드의 기적을 이뤄냈다. 스포츠 단체는 물론 모든 사회단체, 정부 기관이 이처럼 지원은 하되 관여는 최소화하면서 성과를 극대화하는 ‘대한양궁협회 리더십’을 분석하고 신속하게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대관료를 받지 않고, 양궁선수단의 올림픽 전관왕 기념행사를 전쟁기념관에서 하고 싶다.

    이상의 다섯 개 스토리는 올림픽과 K-스포츠 발전이라는 역사적 교집합에 녹아 있다. 만약 1980년대를 이끈 지도자가 정치적 관심을 돌리려 3S(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의 일환으로 올림픽을 유치한다는 세론에 겁먹어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나라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의 진전이 더뎌졌거나 어려워졌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지혜를 찾고, 현실 속에서 최선을 찾아 선택하고, 미래를 준비해 가야 한다. 앵발리드에서 김우진 선수가 마지막 슛오프에서 양궁 다섯 번째 금메달을 확정하는 모습, 함께 환호하는 모습을 같이 기억하며 협력과 신뢰가 넘치는 ‘코리아’를 만들어가야 한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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