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던 우리는 그로부터 꼭 15년째가 되는 올해 월드컵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월드컵 유치를 진지하게 고려한 것이 1987년쯤이었으니 생각보다 빨리 대회를 유치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은 올림픽 개막을 1년 앞둔 시점이었는데, 올림픽 관련시설과 개최 준비로 얻은 노하우를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월드컵 유치를 생각해냈다.
당시 월드컵에 대해 상당히 깊은 연구와 검토가 이뤄졌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본격적인 대회 유치작업을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에나마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때의 연구가 큰 힘이 됐을 것이라고 믿는다. 월드컵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월드컵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도 월드컵대회의 성공과 별개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즉흥적인 남미 축구
월드컵은 세계적인 축구경기다. 하지만 거기에는 축구 외에도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곁들여진다. 어떻게 보면 축구는 이런 외부적인 요소들이 제 힘을 발휘하도록 장(場)을 열어주는 무대 노릇을 해낸다고 할 수 있다. 지역예선을 거친 32개국 선수들이 축구라는 단 하나의 종목에서 경기를 벌이는 월드컵이,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30여 개 종목에서 각축을 벌이는 올림픽대회보다 더 많은 사람을 TV 앞으로 끌어들이고, 경기 일수도 올림픽의 두 배인 30일에 이른다는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월드컵 열기가 이토록 뜨겁기 때문에 개최국가는 월드컵을 계기로 경제 특수를 누릴 수 있고, 자기네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으며, 대회 우승국은 국민적 긍지와 단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1998년 월드컵 대회를 유치한 프랑스가 개최국으로서뿐만 아니라 우승국이 거둘 수 있는 부가효과까지 만끽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축구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과 열기는 축구를 축구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런 열기를 유지, 강화하면서 입지를 넓혀온 것이 20세기 축구와 월드컵의 역사다. 축구는 경제이고 정치이고 문화다. 이 점은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기도 하지만, ‘월드컵 이후’를 생각 한다면 모든 논의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축구는 20세기 들어 남미세와 유럽세로 나누어져 자웅을 겨뤘다. 지금까지 16차례에 걸쳐 벌어진 월드컵 대회에서 남미 국가와 유럽 국가는 각각 8차례씩 우승을 나눠갖는 팽팽한 경쟁관계를 유지해왔다.
제1회 월드컵이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남미 쪽이 유럽세를 조금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유럽대륙에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된 데다 곧이어 나치의 등장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시기라 축구 또한 위축됐다. 이에 반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럽대륙과 멀리 떨어진 남미는 그런 정치적 불안도 없었거니와 전란에 휩싸인 유럽으로 양모와 육류 등을 대량 수출해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지금은 환란(換亂)에 허덕이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다.
그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대규모 축구 경기장을 건설하고 축구교실을 열었으며, 우수 선수를 기르는 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 결과 남미는 축구 명문대륙으로 부상했고, ‘줄리메컵(월드컵의 전신)’이라는 세계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남미 축구를 한마디로 ‘삼바 축구’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남미 선수들은 천부적인 골 감각과 현란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화려하고 열정적인 경기를 펼친다. 팬들은 멋진 쇼를 감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와 즉흥성은 전략, 전술, 조직 면에서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이러한 특성은 축구 행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은 뛰어난 축구선수들을 길러냈으되, 축구를 비즈니스로 승화하는 데는 별 재주를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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