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전에도 가끔 아마야구 중계를 한 적이 있다. MBC에서 그 모습을 보고 프로야구 해설을 맡기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난 대학 강의를 나가야 했다. 야구 해설과 강의를 병행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내가 MBC에 제안한 것이 전속이었다. 즉 대학 강의를 포기하는 대신 MBC 전속 해설위원으로 계약을 맺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방송 출연료가 회당 3만5600원이었는데 내가 요구한 1년 연봉이 2200만 원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박철순 등 특A급 선수가 2400만 원, A급 선수가 2200만 원 받던 때다. 2200만 원이면 강남의 3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방송국이 난리가 났다. 내가 요구한 금액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런 조건이 아니면 나도 안 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오랜 대화 끝에 연봉 1400만 원에 계약을 맺었고, 부족한 부분은 해외출장과 자료 수집비 등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덕분에 외국에 자주 나갈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한 살이었다. 서른한 살에 MBC와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Q 일본식 조어 투성이던 야구용어를 한국 실정에 맞게 정립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언어 순화에 반대하는 이가 많았다고 들었다.
내가 국어학자는 아니지만, 야구에서만큼은 국적 불명의 일본식 조어를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로야구 출범 때 용어를 올바르게 정리하지 못하면 잘못된 일본식 조어가 계속 쓰일 거라는 생각에 MBC의 PD, 아나운서, 해설가를 모아놓고 우리식 야구 용어를 정립해나갔다. 당시 야구계에는 포볼(볼넷), 데드볼(몸에 맞는 공), 언더베이스(태그업), 사이드스루(사이드 암), 라이너(라인드라이브) 등 일본식 용어가 만연했다. 야구의 본고장이 미국임을 감안할 때 일본식 조어를 바로잡고 되도록 한국에 맞는 용어로, 그것이 어려우면 차라리 미국식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대회 나가서 일본식 조어를 쓰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언론의 반대가 거셌다. 무리한 시도를 한다면서 4차례나 사설을 통해 비판을 쏟아냈다. 그래도 난 흔들리지 않았다. 방송할 때마다 새로운 야구용어로 해설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던 시청자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사용하는 야구용어에 익숙해졌고, 반대만을 일삼던 언론도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용하는 야구용어로 기사를 썼다.
Q 오래전 신문기사를 찾아보면 KBS와 MBC에서 야구중계를 할 때 야구팀 명칭을 달리한 것으로 나와 있다. 예를 들면 삼성 라이온즈를 KBS에선 대구 라이온즈로 불렀고, MBC에서는 삼성 라이온즈를 고집했다. 이유가 뭔가.
아무래도 프로야구가 시작되는 시점이다보니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방송국마다 제각각 팀명을 불렀다. KBS는 지역명을 따 ‘대구 라이온즈’ ‘부산 자이언츠’로 불렀지만, MBC에선 기업에 초점을 맞춰 팀 이름에 기업을 앞세운 것이다. 기업이 팀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 이름을 내걸지 않는다면 굳이 프로야구단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KBS는 지역 이름도 뺀 채 ‘라이온즈’ ‘청룡’ ‘타이거즈’ ‘베어스’라고 하다가 시청자들로부터 ‘프로야구가 무슨 동물농장이냐’는 항의를 받고서 어쩔 수 없이 기업 이름을 내세우게 됐다.
메이저리그를 접하다!
Q 1984년 처음으로 미국 메이저리그를 방문했다고 들었다. 박찬호의 양아버지로 알려진 LA 다저스 전 구단주 피터 오말리 씨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던데.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쇼크를 받은 시간이었다. 오말리 씨와는 원래 인연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다저스 구단주이고 메이저리그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에 한국에서 편지를 써 미국으로 보낸 게 인연이 됐다. 오말리 씨는 이름도 모르는 한국 해설가에게 정말 아름다운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비행기표만 자비로 마련했고, 현지 숙소와 식사는 다저스에서 모두 배려했다. 당시 다저스의 스프링캠프는 지금의 애리조나가 아닌 플로리다 베로비치 다저타운이었다.
현지에 가보니 어마어마한 야구장 시설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야구 시설에 비하면 한국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선수들 훈련을 지켜보니 한국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투수들이 투구를 마치면 어깨에 얼음으로 아이싱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선 아이싱과는 반대로 따뜻한 물에 팔을 담가 피로를 푸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한국으로 돌아와 중계 때마다 아이싱으로 어깨를 관리하는 방법을 역설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난 야구의 본고장인 메이저리그, 그것도 스포츠 의학이 가장 발달한 곳에서 하는 선수 관리법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 프로야구팀 중에선 처음으로 미국 베로비치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선진 야구를 보고 배우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해 삼성은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3월 19일 텍사스 레인저스 스프링캠프에서 추신수와 대화하는 허구연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